17화 지금은 호의를 베푸는 시기이다
두 번째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이후 소란은 오히려 잦아들었다.
회사를 향해 걸려오는 전화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도 사흘째 되는 날부터 잦아들었다.
오히려 창구를 통해 최석영에게 상담을 받고 싶다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석영 과장님을 찾으신다고요?”
“네. 최석영 과장님께 상담을 받고 싶은데요.”
“그렇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다릴게요.”
“네. 그럼 자리가 나면 말씀드릴 테니 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시겠어요? 오신 순서대로 상담을 이어가니 끝자리에 앉으신 분 옆에 가 앉으시면 됩니다.”
손가방을 품에 안은 아주머니는 이성우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시로 마련된 의자에는 이미 다섯 명의 사람이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잠시 사람들을 보더니 가장 끝자리를 향해 고민 없이 걸어갔다.
이성우는 그런 아주머니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재빨리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야야.”
한진영은 호들갑을 떨며 찾아온 이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는 일 안 하냐?”
“그게 아니라 봐봐. 저기. 저기 좀 보라고.”
이성우가 최석영의 창구를 가리켰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기가 왜?”
“저 아주머니. 딱 봐도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도 최 과장님 상담받겠다고 저기 앉으셨다.”
“그게 왜?”
“신기하지 않아?”
“내 동기 성우야.”
“어?”
여전히 최석영 앞에 놓인 대기 의자에 앉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이성우를 향해 한진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연한 일에 좀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말아라.”
“당연하다고?”
“그럼 당연하지.”
한진영은 이성우의 옷을 잡아끌어 시선을 모니터에 오게 했다.
“그렇게 딴 곳에 신경 쏟지 말고 네 본분에 맞게 여기나 잘 확인해. 여기에 답이 있으니까. 정작 봐야 할 곳은 보지 않고 왜 자꾸 딴 곳에 안테나 세우고 있는 거야?”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타박을 들으며 한진영이 손으로 두드린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파랗게 칠해진 숫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뭐냐?”
“뭐긴 뭐야? 지금 주가지.”
“이렇게나 장이 안 좋아?”
“그러니 고객들이 찾아오는 거 아니겠냐?”
지난주부터 시작된 지수의 약세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종합주가지수는 800에서 단기간에 1500을 찍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큰 변동 뒤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출렁임이 따라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차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에서 빛을 발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전문가 투자대회에서 2주 차까지 무포를 잡은 최석영이었다.
2주 차에 진입한 지금 최석영의 1위 자리는 더욱더 굳건해져 있었고, 2위 그룹과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져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고객들은 최석영을 보기 위해 신성증권 시흥지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휴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석영은 땀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마감 이후에도 찾아오는 고객과 상담을 하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낸 최석영이었다.
그는 잠시 한숨 돌리고 이제 퇴근 준비를 하려 했다.
“헤헤. 과장님. 일 끝나셨어요?”
“여기 이것 좀 마시세요. 요 앞에 나가 제가 막 사 온 시원한 음료수입니다.”
“과장님. 말씀 많이 하시니 허기지시죠? 이거요. 초코바입니다. 드시고 기력 좀 보충하세요.”
최석영의 일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최석영 주변에 모여들었다.
최석영은 이것저것 건네주는 물건들을 손에 가득 들었다.
“저기. 과장님. 바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저도 시간이 많습니다. 과장님.
“최 과장. 아무리 봐도 고객들이 몰려 불편한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나한테 좀 돌려? 내가 도와줄 테니까.”
고객들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군침을 삼킨 직원들이 최석영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최석영은 돌려 말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들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웃었다.
그리고 받은 것들을 돌려주지 않은 채 꼭 끌어안고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은 채 다가온 최석영을 올려다보고 인사했다.
“다 끝나셨어요?”
“어. 다 끝났어.”
최석영은 한진영의 책상 위에 받은 걸 쏟아냈다.
그리고 한진영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 참 염치도 없어. 그렇지?”
“상황이 바뀌면 마음도 바뀌는 법이니까요.”
“나는 마음 바뀌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믿습니다. 과장님 마음이 바뀌면 제 마음도 바꿔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 내 마음은 절대 안 바뀌니까 자네도 바뀌지 말아줘. 난 자네만 믿고 있으니까.”
한진영의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확인한 최석영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게 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최석영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최종 목표를 달성한 것도 아니라 가는 과정 속의 초반부에 위치한 상황이었다.
최석영은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 때문에 큰 기회를 놓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잘할 테니까 자네가 많이 도와줘. 그리고 나한테 오는 고객들 좀 자네 쪽으로 돌릴까?”
오히려 최석영이 먼저 고객을 나누겠다는 제안을 한진영에게 건넸다.
아직 오는 고객을 나눌 정도로 버거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한진영의 마음을 잡고 싶은 생각에 건넨 제안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고개를 저으며 최석영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은 괜찮지만 여기서 고객이 더 늘어나면 버거워진다는 건 사실이야. 그래서 나도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원래 그러기로 하고 시작한 일이잖아. 고객들을 자네와 내가 나누자고 말이야.”
“나눠야 하는 것은 맞지만 지금은 저와 과장님이 나눌 시기는 아닙니다. 그러니 고객은…….”
한진영은 얼굴이 따끔거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성우가 몸을 배배 꼬며 애끓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우 쪽으로 조금 돌려주세요.”
“어? 성우라니?”
최석영은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이성우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성우는 한진영에 이어 최석영이 자기를 본 것에 이야기가 잘 진행된다고 생각했던지 환한 미소를 띠었다.
최석영에게 고객이 쏠리는 모습을 보고 이성우가 한진영에게 조심스럽게 꺼냈던 부탁이었다.
아무래도 최석영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진영에게 이야기하는 편이 편하고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진영에게 있어 이성우도 나중에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이성우의 미소에 급히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진짜 저 친구에게 고객을 돌리라고?”
“네. 지금 들어오는 고객들은 좀 나눠줘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모두 받으면 바쁘기만 하고 불편한 사람들이니 과장님도 다 끌어안으려 하지 마세요. 지금은 다른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호의를 베푸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고객을 나눠주라니…….”
얼마 만에 고객들이 제 발로 찾아와 바쁜 나날을 보내는지 모르게는 최석영이었다.
한진영이나 되니까 고객을 나눠줄 생각을 하는 거지 아니었다면 단 한 명도 나눌 생각이 없었던 최석영은 한진영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와 내가 둘이 다 해 먹기로 했잖아.”
“과장님. 버릴 때는 버릴 줄도 아셔야 합니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어차피 진짜 돈이 되는 고객들은 지금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뒤에 물러나서 한동안 지켜볼 겁니다. 과장님을 정말 신뢰할 수 있는지 아닌지 계속 재고 또 재죠. 그런 사람들에 비해 지금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수준입니다. 좀 괜찮아 보이니 손해난 걸 빨리 과장님을 통해 메우고 싶은 사람들이요. 안 그렇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최석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맞아. 대부분 간접이건 직접이건 투자를 하다가 손해를 본 사람들이었어.”
최석영은 상담 중에 자기 옆에 앉아 상담내용을 지켜본 것만 같은 한진영에게 놀랐다.
그러나 한진영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도 방송을 비롯한 신문과 매체를 통해 명성을 크게 얻은 뒤에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먹을만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자리를 비워놓으세요. 진짜배기가 오기 전에 앉을 자리가 꽉 차버리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은 호의를 베푸는 시기로 이용하세요.”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을 알아들었던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3주 차 전문가들의 포지션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송 두 번 만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해서 그런 것인지 대경TV에서는 포지션 공개에 힘을 준 모습이었다.
그전 방송에서는 보이지 않던 화려한 효과가 추가되어 각 전문가의 포지션 공개에 쓰였기 때문이다.
탕!
흡사 불꽃놀이를 보는 듯한 효과 뒤에 나타난 포지션에 앵커가 놀란 듯이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또 다른 전문가의 포지션에 탄성은 더욱 커졌다.
“아!”
연속으로 다섯 명의 전문가가 모두 포지션 란을 비워놓은 것이 공개되자 최준호도 참지 못하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왜들 저러는 것 같나?”
“배운 거죠.”
“배웠다고?”
“네. 포지션을 비워놓아도 된다는 것을요.”
“그건 배우고 말고 할 게 아니지 않나?”
“여기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것도 저기 들어가 있으면 떠올리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하는 것으로 보고 떠올린 걸 겁니다. 무포도 포지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최준호 지점장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당사자가 되면 판단을 다르게 내리기도 하지.”
투자대회기에 무조건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사로잡혀 포지션을 잡았던 사람들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억지로 종목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투자대회 참여자들은 외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무포지션으로 자리를 지킨 최석영을 부러워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도 포지션을 비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약세장인 지금의 상황에서 포지션을 비우고 가지고 있는 돈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포지션 란을 비워놓았다.
스무 명의 참가자 중 열 명이 넘는 참가자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
특히, 2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서 이런 모습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미 큰 손해를 보아 어떻게든 만회를 해야 하는 하위권과 달리 지키면서 기회를 노릴만한 이들은 우선 쏟아지는 비를 피하자는 태도였다.
투자대회 참가자들에게 선택권이 또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서슴없이 최석영을 따라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최준호는 2위권 전문가들이 전부 공란인 것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이번에 우리도 포지션이 없는 건가? 그렇게 되면 이 격차를 계속 유지하면서 1등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사실 두 번 만에 이렇게 큰 격차가 벌어졌으니 이제부터는 지키는 쪽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최준호는 2등과 벌써 10%가 넘게 벌어진 차이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저것들 우리한테 항의 전화 했던 놈들 아냐?”
최준호 지점장은 자기에게 전화해서 그럴 거면 직원을 왜 내보냈냐며 따졌던 타사 지점장의 직원이 포지션 란을 공란으로 만든 것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면서 하락장 속에서도 포지션을 잡아야지 진정한 고수라더니 하더니 꼴좋다.”
최준호는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이렇게 그냥 가자. 어차피 지난주도 그렇고 이번 주도 별 볼 일 없는 거 보면 다음 주도 큰 상승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여. 이대로 간격을 유지한 채 굳히기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방송을 보고 있던 다른 직원들도 최준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진영만큼은 다르게 생각했다.
“지금 이런 상황이니 차이를 더 벌려야지요. 저들이 무서워 가만히 섰으니 이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최석영의 포지션에 ‘미래차’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