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서로 잘하는 것을 하자
투자대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식의 시상식을 거행할 생각이 없었던 대경TV였다.
그저 축하 인사와 메인 프로그램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는 것으로 끝을 내려 했다.
그 정도만 해도 전문가 입장에서는 감지덕지라며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시청자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었다.
게다가 시청자뿐만 아니라 타사 방송국에서도 최석영을 탐냈다.
그래서 대경TV는 최석영에게 좋은 대우를 해 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투자대회에서 1등을 한 신성증권의 최석영 과장님을 자리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따뜻한 박수로 최석영 과장님을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
진행자가 이야기하자 장내에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박수 소리와 함께 최석영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겨우 스무 명을 모아놓고 12주를 진행하는 대회에 이런 시상식이 열린다는 게 이상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석영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흔들며 단상으로 향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아래에서 최석영을 올려다보던 한진영을 향해 갑작스레 김영철이 다가왔다.
한진영은 박수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억울이요?”
“저 자리는 원래 한진영 씨의 자리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석영 과장님이 진영 씨의 자리를 뺏었으니 억울할 만한 일이지요.”
한진영은 김영철을 돌아봤다.
김영철은 한진영의 곁에서 박수를 치며 최석영을 향해 축하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프라임 리츠에서 제 억울함을 풀어주려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희가 억울함을 풀어드리지요.”
한진영은 김영철의 말에 말없이 웃고는 다시 최석영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상 위에서는 한창 최석영에 대한 시상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럴듯한 상패와 상장 그리고 상금이 크게 적힌 플라스틱판이 최석영에게 건네졌다.
그리고 이어진 촬영 현장에서는 대경TV의 간부들이 모두 나와 최석영과 함께 사진을 찍어댔다.
“지난번에 회장님께서 직접 최준호 지점장님에게 부탁하셨는데 답장이 없어 답답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직접 담판을 지으러 오신 건가요?”
한진영은 사진기를 들고 멀리서 최석영의 시상식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다.
최석영이 특별히 부탁한 것으로 한진영도 기꺼이 최석영의 부탁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김영철은 딴짓을 하는 것 같지만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한진영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새내기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사진을 찍는 것을 멈추고 김영철을 향해 말했다.
“시상식이 대충 끝나가니 최 과장님이 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요.”
“함께요?”
“네.”
김영철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경TV 간부들과 연신 악수를 하는 최석영을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같이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까? 저희가 원하는 건 한진영 씨 한 분입니다.”
“저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최 과장님과 함께 이야기 듣겠습니다.”
“끄응.”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김영철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영철을 향해 시선도 건네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 가질 자리는 단순히 프라임 리츠만 제안하는 자리가 되진 않을 겁니다. 프라임 리츠와 저는 그런 단순한 관계로 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관객이 많은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김영철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한진영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 것이 물어도 조금 뒤에 들으라는 대답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김영철이 뒤로 물러나자 한진영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어리었다.
생각지 못한 시상식이 끝이 나고 최석영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손에 상패와 상장 그리고 꽃다발까지 들려있었다.
최석영은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대경TV 관계자분들이 식사를 하자는데. 어쩔까?”
“우리는 다른 볼일이 있다고 말씀하세요.”
“다른 볼일?”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김영철을 바라봤다.
김영철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석영은 그런 김영철의 인사에 어정쩡하게 마주 인사하고 한진영을 말없이 쳐다봤다.
“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겠습니다.”
김영철은 주도권을 빼앗긴 현재 상황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띠곤 고개를 끄덕였다.
최석영 역시 회장이라는 이름까지 나오자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던 대경TV 간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사과를 한 뒤 돌아왔다.
“그럼. 이리로 오시죠.”
김영철이 앞장서서 한진영과 최석영을 대경TV 밖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오자 차 한 대가 건물 앞에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타시죠.”
김영철이 차 문을 열어주자 한진영은 거침없이 차 안으로 몸을 옮겼다.
최석영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올라탔다.
최석영은 한진영 곁에 앉아 한진영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렇게 막 따라가도 괜찮을까?”
“괜찮을 겁니다. 조폭같이 위험한 사람들은 아닐 테니. 아, 그럴 수도 있나? 하긴. 프라임 리츠의 자금 출처가 밝혀진 게 없으니 검은돈으로 설립된 곳일 수도 있겠네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어쩌면 어디 지역 조폭 두목일 수도 있겠는데요.”
“왜 이래. 무섭게.”
최석영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하여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최석영은 차에 올라타는 김영철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다.
김영철이 마지막으로 차에 타고 기사에게 출발할 것을 지시하자 차가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진영은 점점 빠르게 움직이는 풍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경TV하고는 잘 아시는 사이인가 봅니다.”
“대경TV에서 부동산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확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긴 지금은 주식만 가지고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한계가 있겠지요. 같은 의미로 주식시장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그건 회장님과 이야기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김영철의 말에 한진영은 묻는 것을 그만뒀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차는 30분을 달려 삼청동 근처에 멈춰 섰다.
“이제 내리시지요.”
그럴듯한 한식집 앞에 멈춰선 차에서 김영철이 먼저 내렸다.
뒤를 이어 내린 최석영은 널따란 한식집을 둘러봤다.
“들어오시지요.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한진영 일행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나와 길 안내를 시작했다.
최석영은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대경TV에서부터 가지고 온 상패 등을 품에 안은 채 직원의 뒤를 따랐다.
“이상한 곳은 아니겠지?”
“오는 길을 보니 삼청동이던데 서울 한복판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겠어요? 게다가 보세요. 번듯한 기와집 모양의 한식집인데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 해서 그런 거 아냐.”
“하긴 조폭이라면 이런 곳에서도 이상한 일을 벌일 수 있겠죠.”
“야!”
최석영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온 것을 알고 급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이상한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김영철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별채로 따로 나와 있는 건물 앞에 서게 됐다.
“회장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안에서 기별이 나오자 문이 열렸다.
직원과 김영철이 안으로 손을 뻗어 한진영에게 먼저 들어갈 것을 권하자 한진영은 거절하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솔향이 은은하게 피어나는 별채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반 가정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 속에 식당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안에 준비된 커다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내가 들어오는 한진영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한진영은 인사를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그를 가만히 살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는 염색을 한 것인지 유독 새까만 머리카락을 자랑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급히 김영철이 다가와 소개했다.
“회장님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한진영 씨. 앉으세요.”
정병선은 한진영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곤 손을 들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음식들이 커다란 탁자에 깔리기 시작했다.
명절에나 볼법한 음식부터 시작해서 TV 속에서나 보던 음식과 이건 뭘까 싶은 것까지 온갖 음식들이 탁자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뭘 좋아할지 몰라 그냥 전부 깔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드시고 입에 맞는 것을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다소 놀라워 하는 최석영에 비해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한 한진영을 보며 정병선은 흥미로운 듯이 한진영을 쳐다봤다.
“이런 곳에 자주 오셨나 봅니다. 50여 가지가 넘는 음식이 깔리는 것을 처음 보면 다들 놀라기 바쁜데 말입니다. 바로 곁에 계시는 최 과장님처럼 말입니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탁자에 깔린 음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자주는 아닙니다. 일 년에 두어 번쯤 오는 곳이지요. 이런 음식 구성은 저도 처음 보는 겁니다. 놀랐습니다.”
말은 놀랐다고 하지만 눈은 전혀 놀란 눈은 아니었다.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시군요. 그럼 들어보시지요. 맛도 달라졌는지 말입니다.”
음식을 권하는 정병선의 손에 한진영은 사양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맛있군요.”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한진영 씨를 보니 빙빙 돌려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군요. 어떠십니까? 우리 프라임 리츠로 자리를 옮기는 게 말입니다. 보수는 섭섭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 씨. 이렇게 직접 회장님이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입니다. 그만큼 한진영 씨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니 심사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병선의 말에 김영철까지 추임새를 넣었다.
“저를 많이 조사하신 것 같네요.”
“많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사실 한진영 씨가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기도 하네요. 많이 조사할 것도 없었네요.”
한진영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곤 함께 나온 차 한잔을 마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요새 부동산 경기가 좋지 못하지요?”
“…….”
“투자받은 자금은 있는데 마땅히 수익을 창출한 구멍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하자니 당장 투자자들이 목을 죄어 올 것이 걱정이고…… 여러 가지로 고단한 하루를 보내실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저 같은 하룻강아지에게까지 눈독을 들이시는 것 같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정확하게 핵심을 꿰뚫고 있군요.”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하지 않아도 회장님께서 어떤 상황이신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정병선 같은 경우에는 프라임 리츠를 설립하여 처음 겪는 일이겠지만 한진영은 여러 번 겪어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투자금은 계속 들어오는 데 그 돈을 돌리지 못하여 답답한 순간.
바로 지금 정병선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투자의 다각화를 노리고 주식시장에 발을 담그려 하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사람은 잘하는 것을 해야 하니까요.”
뜻밖의 대답에 정병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다른 사람 그것도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젊은 친구에게 지적당한 것에 적잖이 놀란 것만 같았다.
“제가 프라임 리츠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 길을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우리 프라임 리츠에 들어올 생각은 없지만 길은 알려주겠다?”
“네. 신성증권에 투자하십시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신성증권에 있는 저에게 투자하시면 됩니다.”
“결국 신성증권에 돈을 맡기라는 말이군요. 한진영 씨가 우리 프라임 리츠에 들어올 생각은 없고요?”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입니다. 프라임 리츠는 잘하는 부동산 투자를 하시고 신성증권은 전문인 주식투자를 하고…… 이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입니다.”
정병선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한진영은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정병선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병선은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썩 내키는 건 아니지만, 흥미로운 제안이긴 하군요.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우선 20억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 20억으로 매매한 뒤 나머지를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으로 하지요.”
“테스트인가요?”
“그편이 이해하기 쉽겠군요. 맞습니다. 테스트입니다. 한진영 씨와 신성증권에 대한 우리 프라임 리츠의 평가를 그 20억으로 하는 거라 생각하면 됩니다. 금액을 늘릴지 아니면 20억으로 마무리할지는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도록 하죠.”
“테스트라니 그럼 수수료율도 거기에 맞게 책정해도 되겠군요. 통상 0.2%의 수수료율이지만 ‘테스트’라고 말씀하시니 0.4%를 책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바로 그렇게 치고 들어올 줄 몰랐습니다. 테스트라는 것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수수료율을 조정하는 모습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모습입니다. 0.4%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조건은 한진영 씨가 운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괜찮겠습니까?”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돈부터 회장님께서는 준비해 놓으시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왜 더 큰돈을 집어넣지 않았나 후회하지 않도록 그 뒤에 집어넣을 자금도 미리 준비해 놓으시고요.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시원시원하니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이어질 것 같군요. 그럼 이 자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건배하도록 합시다.”
정병선이 술잔을 들자 한진영이 마주 술잔을 들어 올리며 계약이 이루어졌음을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