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프라임 리츠 일을 진행하며 홀세일 본부장과 만날 것을 준비했었던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그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도 한진영이었다.
프라임 리츠 일을 알리면 그 이야기를 들은 김정대가 득달같이 시흥지점으로 달려올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최준호 지점장을 통해 알린 것이었고, 그가 찾아오면 그에게 어떤 말을 할지도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한진영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김미진을 향해 가볍게 대답했다.
“고객은 아닙니다.”
김미진은 한진영의 대답에 지점장실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한진영에게로 돌렸다.
“고객이 아니라고요? 저렇게 극진히 지점장님이 모시는데요?”
“고객은 아니고…… 본사에서 오신 분입니다.”
“본사에서…… 누가? 왜요?”
“저를 찾아오신 거겠죠. 그리고 누구인지는 저기 있는 저 친구가 알려주겠네요.”
김미진이 알지 못하게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볼 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이성우가 달려왔다.
“야야. 홀세일 본부장이 왔다며?”
한진영은 마치 재미있는 구경을 하러 온 것처럼 흥분한 이성우를 보고 웃었다.
“너는 모르는 게 뭐냐? 홀세일 본부장이 온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우리 지점에서 모르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냐? 그런데 홀세일 본부장이 왜 왔어? 그것도 우리 지점에 말이야.”
얼굴에 한가득 궁금증을 담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김미진이 한진영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진영 씨 보러 오셨다는데요.”
“네? 진영이를 보러 왔다고요? 누가 그래요?”
김미진은 이성우의 질문에 한진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성우는 김미진의 손가락을 따라 한진영을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진짜? 홀세일 본부장이 널 보러 왔다고?”
“왜? 이건 생각도 못 한 일이야?”
“어. 생각도 못 했다.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하냐?”
“그 정도로 대단한지 아닌지는 네가 계속 지켜보면 알 테고…… 나는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 안에서 기다리시겠다.”
한진영이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성우는 점차 자기를 지나쳐가는 한진영을 향해 몸을 돌리며 물었다.
“어딜 들어가?”
“어디긴 어디겠어? 저기지.”
한진영이 지점장실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자 이성우는 또 한 번 놀랐다.
“진짜야?”
“뭘 그렇게 진짜를 찾아? 누가 너에게 사기 친 적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사람이 의심이 많아?”
한진영은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홀세일 본부장이 있는 지점장실로 향했다.
똑똑똑.
“들어와요.”
지점장실의 문에 노크한 한진영은 안에서 들려온 최준호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셨다고요?”
“그래. 이리 들어와. 여기로…….”
최준호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이 앉을 곳을 안내했다.
김정대 본부장의 맞은편으로 어느새 그곳에는 사람보다 먼저 차가 나와 자리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진영은 안으로 들어가며 앉아 있는 김정대를 슬쩍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한진영의 머릿속에 있던 김정대의 외모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이가 자리에 앉아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진영은 속으로 웃으며 자리에 앉아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김정대는 앉은 채 한진영을 빤히 바라봤다.
“자네가 바로 한진영이구먼. 나를 물 먹였다는 그 한진영 말이야.”
“물 먹였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적의를 드러낸 김정대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의 말을 차분히 받아냈다.
김정대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이미 한진영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진영을 바라봤다.
“혹시 자네는 나를 아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날 알아?”
“어떻게 신성증권을 다니며 홀세일 본부장님을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디서 만난 듯한 느낌이 드는데?”
“글쎄요. 저는 본부장님을 아는데 본부장님이 저를 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정대는 한동안 말없이 한진영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그래. 자네가 너무 태연히 나를 맞이해서 내가 그런 느낌을 받았나 보군. 자네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전혀 무섭지가 않아 보여서 말이야.”
김정대의 말대로 나란히 앉아 있는 최준호와 한진영의 모습은 흑과 백처럼 완전히 달랐다.
김정대가 말을 한마디 꺼낼 때마다 자기에게 하는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 최준호였다.
그런 최준호에 비해 한진영은 너무나 태연하기만 했다.
마치 동네 아는 형을 만난 듯한 그의 모습에 날카로운 말끝이 점차 뭉툭해져 가는 것을 김정대는 느꼈다.
“같은 회사의 상사를 만난 것이 무서워할 이유가 되는 것 같지가 않은데요?”
“내가 자네를 쫓아낼 수도 있는데?”
“이유가 타당하면 그러시겠죠. 하지만 그러시려고 이곳에 오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려고 온 게 아니라고? 그럼 내가 왜 여기 왔다고 생각하나?”
“저를 보고 싶으셨겠죠. 그리고 저를 향해 화를 내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이겠죠. 화를 풀 상대가 필요했는데 마침 적당한 존재가 나와서 그 핑계를 대고 이곳에 오신 것 아닙니까?”
한진영의 말에 최준호가 한진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최준호는 제발 한진영이 입을 다물었으면 했다.
가뜩이나 기분 나빠 있는 김정대를 계속 자극하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한진영과 자기는 가만히 앉아 김정대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다 자리를 마무리했으면 하는 게 최준호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의 마음을 모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내가 별 시답지 않은 일에 이곳으로 왔다는 이야기인가? 내 화를 풀기 위해?”
“비슷합니다. 본부장님께서 겨우 20억짜리 물건 때문에 움직이실 분이 아니니까요.”
“겨우? 겨우 20억? 자네 겨우라는 말을 너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쓰고 있다는 것 알고 있나? 내 입장에서도 20억이라는 돈은 큰돈이야.”
“그럴 리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화를 내러 이곳에 왔다고 치고…… 그럼 내가 뭣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나?”
최준호는 당연히 김정대의 질문에 프라임 리츠 일이 대답으로 나올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진영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회사 내부에서 FICC(Fixed Income Currency Commodity) 사업부와 세일즈 사업부를 통합하려는 일 때문에 화가 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조금 전까지 웃음기가 돌던 김정대의 표정에 웃음기라고는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는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문을 품기는 최준호도 마찬가지였다.
최준호는 당황스러운 이야기에 김정대보다 먼저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진영 씨. 그게 무슨 소리야? FICC 사업부하고 세일즈 사업부가…….”
“잠깐. 최 지점장은 그만 말하고…… 자네가 이야기해보게. 그걸 어떻게 알았지?”
김정대가 손을 들어 최준호의 말을 끊었다.
지금 최준호가 하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부장님의 심기는 자그마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발걸음을 회사 밖으로 돌려야 할만한 일이라면 지금 딱 떠오를만한 일이 몇 가지 없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업부의 재편이겠지요. 그리고 FICC 사업부와 세일즈 사업부의 통합이야말로 지금 가장 유력한 사건 중에 하나라서 쉽게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 쉽게 추론할 만한 일이 아닐 텐데…… 그 일은…… 그렇게 추론으로 떠올릴 만한 일이 아니야.”
김정대의 말대로 단순히 추론하여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한번 겪어봤기에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그럴듯한 포장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 시장의 추세가 바로 통합이니 저도 추론할 수 있지요. 세일즈와 운용조직을 하나로 묶어 서로 긴밀한 협조를 하게 만드는 게 시장의 트렌드로 굳어져 이미 서봉증권은 통합이 시작되었고 다른 증권사들도 이미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곳에서 이미 진행하고 있는 일을 우리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지요. 우리도 언젠가는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본부장님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나를 보고 알게 됐다고?”
“네. 본부장님이 이렇게 몸으로 알려주시니 알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김정대는 한진영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내가 다른 이들에게 알려줬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했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많은 사람이 안 것은 아니지만 자네가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김정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네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아닙니다. 아직은 한 가족 아닙니까?”
“아직은…… 한 가족? 하하하.”
김정대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심장을 졸이며 이야기를 듣던 최준호는 김정대의 웃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정말로 즐거울 때는 회의 자리에서도 크게 소리 높여 웃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최준호는 김정대와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는 한진영이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떻게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얘 뭐야?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
김 사장에게서 10억을 유치할 때도 그랬고, 투자대회에 나갔을 때도 그랬다.
한진영의 정보력과 정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번에도 지점장인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멀뚱히 옆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정대는 한동안 웃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보고 물었다.
“좋아. 그럼 이야기해보게. 그럼 나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 입지가 좁아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내 입지가 좁아진다고?”
김정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를 향해 준비했던 말을 풀어냈다.
“그렇습니다. FICC 사업부는 홀세일본부 산하에 있던 곳입니다. 게다가 다른 곳들보다 빨리 사업이 번창하는 곳이 바로 FICC 사업부였습니다. 아마 본부장님도 FICC 사업부에 큰 기대를 걸고 계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곳이 떨어져 나가 세일즈 사업부와 합쳐진다면 새로운 본부급으로 재탄생 된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홀세일본부 산하로 FICC가 들어올 일은 다시는 없다는 이야기죠.
“그래. 두 사업부가 합쳐진다면 어지간한 본부급 이상의 체급을 가지게 되는 거지. 다른 곳에 들어갈 일은 앞으로 없을 게 분명해.”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사업부 세 군데 중에서 한군데가 떨어져 나가며 홀세일본부의 규모는 쪼그라들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래 그 말도 맞는 말이야.”
김정대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고 김정대가 한진영의 눈을 바라본 채 말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풀어갔으니 마지막까지 가봐야겠지? 좋아. 그럼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최준호는 김정대의 말에 매우 놀라 앉았던 의자에서 살짝 엉덩이를 떼고 말았다.
지점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기가 일개 사원에 불과한 한진영에게 의견을 묻는 것도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김정대는 지점장급조차도 어려워하는 본부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일개 사원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건만 의견을 물어보고 있었다.
보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에 최준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대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의 성격을 이미 경험했던 한진영이었다.
그가 이곳에 올 거라는 것과 지금의 대화 모두 한진영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제 준비했던 작품을 마무리 짓기 위한 말을 시작했다.
“FICC와 세일즈 사업부의 통합본부를 맡으십시오.”
“통합본부를 맡으라고? 처음은 사업부로 시작을 한다는 것 알고 있나? 규모는 사업부 두 곳을 합친 곳이기에 웬만한 본부급과 같다고 하지만 어쨌든 시작은 사업부로 시작하는 거라네. 아무리 홀세일본부가 떨어져 나간 FICC로 규모가 줄어든다지만 엄연히 신성증권의 주력 본부이고, 통합본부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곳인데…… 새로운 곳을 맡으라고? 나보고 스스로 좌천을 택하라는 이야기인가?”
“이럴 때 쓰는 좋은 표현이 있지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본부장님께서는 그걸 선택하시는 겁니다.”
김정대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