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끈끈한 관계
한동안 아침 회의 자리는 평온함의 연속이었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다들 허허 웃고 지나갈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고객계좌에서 일어난 사소한 사고쯤은 알아서 처리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지옥 같던 회의 자리가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시끌벅적한 객장의 분위기 덕분이었다.
발 디딜 틈 없는 분위기는 방송이 마무리된 지 2주가 지났는데도 여전했으며 최석영을 보기 위해 찾아온 고객들로 창구의 북적임 또한 처음과 같았다.
하지만 이런 회의 자리의 평온함이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걸 지금 실적이라고 가지고 온 거야?”
사자후와 같은 최준호의 외침이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오랜만에 터진 최준호의 외침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최준호는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책상에 내던졌다.
“지금 지점에 놓여있는 커피믹스가 하루에 얼마나 나가는지 알아? 200개짜리 박스가 점심시간을 넘기기가 어려워. 하루에 두 통을 사놓아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수준이야.”
최준호는 일어선 채로 고개만 숙이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계속 소리쳤다.
“최근 1년 동안 이렇게 고객들이 많이 찾아온 적이 있었어? 난 이렇게 사람이 몰린다는 지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다른 곳은 사람이 찾지 않아 지점 폐쇄 이야기가 나올 지경인데 우리는 의자를 더 놓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어. 그런데…… 겨우 가지고 온 실적이 이 모양이야? 뭣들 해?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우리 때 이 정도 고객이 몰렸으면 지점장 앞에 실적이 산처럼 쌓여. 알아?”
회의실 책상 위에 재떨이라도 있었으면 재떨이가 날아갔을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했다.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얻어먹는 욕에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누구도 최준호의 호통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이렇게 몰리는 고객들에게서 얻는 실적이라고 하기에는 최준호에게 건넨 것이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씩씩대던 최준호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실적 채우지 못할 것 같으면 할 수 없어. 다들 본인 계좌라도 돌려서 실적 채워 넣어. 알았어?”
최준호는 가장 끝에 앉아 있는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진영이 앉아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끝자락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압도적인 실적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 씨는 조금 뒤에 서류 챙겨서 프라임 리츠로 가도록 해요. 보라고. 회사의 막내는 이런 대형 건을 턱턱 따가지고 오는데, 도대체 선배들이라는 작자들이 뭘 하는 건지…… 밥을 차려줘도 떠먹지도 못하는 얼간이들만 모아놓은 건지. 이거야 원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어휴…….”
최준호는 몸을 돌려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최준호가 자리를 뜨자 그제야 긴장하고 있던 직원들의 몸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후우…… 이거 뭐 아침부터 살 수가 있나.”
“사람들이 지난 사태로 몸을 사리는 걸 우리보고 어쩌라고 저러는 거야?”
“답답하면 자기가 하던가. 아니. 요즘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저러는 거야? 나야말로 답답해서 살 수가 없네.”
일과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기운을 다 쓴 것 같은 사람들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서로를 쳐다봤다.
“장 과장님. 장 과장님은 돈 얼마나 박아 넣으셨어요?”
“나? 나 5천.”
“그래도 소소하네. 박 차장님은요?”
“나 말도 마라. 한 장 집어넣었어.”
“한 장이요? 형수님이 아무 말도 안 해요?”
“아무 말? 나 요새 죽겠다. 우리 각방 쓴 지 석 달이 넘어가.”
“각방 쓰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난 자다가 눈떴을 때 옆에 마누라 있는 거 보고 깜짝깜짝 놀라는데…… 나도 한 장 집어넣으면 마누라가 각방 쓰자고 하려나? 차라리 한 장 집어넣고 각방 쓸까?”
“하하하.”
최준호가 나가서 그런지 굳었던 분위기가 금방 풀어졌다.
그러나 분위기만 풀어졌을 뿐 근심은 계속됐다.
“언제까지 우리 돈을 넣어서 매매해야 하는 건지…… 막말로 우리 돈을 회사에 바치는 거잖아요.”
“내 말이…… 그냥 나도 남들처럼 주식 들고 계속 버텼으면 이놈의 회사 때려 치고도 남았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넉넉해야지. 맨날 안 잘리려고 모자란 실적 채우기 위해서 내 돈으로 사고팔고를 반복해야 하니 뭘 먹을 수가 있나. 우리나 보험쟁이나 다를 것 없어. 자기 돈으로 보험 들어서 실적 채우는 친구들이나 내 돈으로 계좌 돌려서 실적 채우는 우리나…… 이런 거 법으로 다시 금지하면 안 되나? 언제까지 우리 돈으로 남은 실적을 채워야 하는 거야?”
“회사에서는 자기매매를 통해서 올린 실적에 성과급 준다고 오히려 큰소리치던데요?”
쾅!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친 박 차장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리쳤다.
“법으로 자기매매 할 수 있게 해주니까 별소리를 다 하네. 예전에 안 될 때도 억지로 차명으로 계좌 만들라고 해서 돌리더니, 지금은 법으로 인정해줬다고 대놓고 압박하면서 성과급 준다고 큰소리쳐? 자기매매 해서 성과급 받는 것보다 수수료로 돈까지는 게 더 많은데 누가 누구에게 큰소리쳐?”
“나도 이번 달에 수수료만으로 200 나갔어. 근데 성과급으로 100은 나오려나? 환장하겠다. 환장하겠어. 이럴 바엔 그냥 실적 못 채우고 잘리는 게 낫겠다.”
다들 같은 상황이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박 차장은 잠시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차라리 자기매매 안 되게 예전처럼 돌아가든가 아니면 법으로 회전율을 제한해야 해. 제한하지 않으니 최하 2,000% 이상 돌리라는 지침이 회사 내부에서 내려오지. 회전율을 회사에서 정해주는 데 살 수가 있나.”
“회전율은 제재한다는 말이 있는데 금방 되겠어요?”
“제재하면 뭐 하나? 회사에서는 그냥 돌리라고 할 텐데…… 내 돈으로 내 계좌 돌려서 실적 채운 뒤에 성과급 받으면 내가 이 짓을 왜 하나라는 자괴감 무지하게 든다. 자기들도 한번 경험해 봐.”
박 차장은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이야기하다가 자리 끝에 앉아있는 한진영을 발견하고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진영 씨는 좋겠어. 이런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박 차장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진영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박 차장이 어떤 의미로 한진영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저는 안 그래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하는 중입니다.”
보통의 신입사원이라면 박 차장의 말에 겸연쩍어하거나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기 마련이었다.
그런 모습이 나올 것을 예상하여 박 차장이 말을 건 것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부러움 반, 시기 반으로 그런 대답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여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한진영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신입사원이 할 말을 잃은 채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한번 쓸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매매를 하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거기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니까요. 실적도 실적이지만 내 돈이 깨지면 멘탈 나가는 건 개인투자자나 우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매매에 너무 발 들였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면 돈을 잃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박 차장을 가만히 쳐다봤다.
한진영의 기억 속에 있는 박 차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 돈 잃는 것을 못 견뎌 자기매매만 주야장천 돌리다가 결국 회사에서 잘리고 말았다.
회사를 나간 뒤에도 계좌를 복구하겠다고 매매를 계속 이어갔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뻔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같은 결말을 맺지 않았겠냐는 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한진영은 앞에 놓여있던 서류를 들고 말했다.
“저는 아까 지점장님이 말씀하신 일로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한진영이 회의실을 나오자 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한진영은 회의실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회의실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는 인연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흥지점에 있는 사람 중에 알짜는 최 과장과 성우뿐이야. 나머지는 쭉정이들이지. 그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어. 어차피 도태될 테니까.’
한진영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정병선은 한진영이 건넨 서류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한진영에게 서류를 받자마자 비서인 김영철에게 건넸고 김영철이 한쪽에서 서류를 확인하는 것으로 직접 보는 것을 대신했다.
서류를 보는 것을 대신하여 정병선은 한진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함께 온 이성우에게 또한 한진영을 보는 것만큼이나 자주 시선을 보냈다.
“이성우 씨라고요?”
“네.”
이성우는 쭈뼛쭈뼛 정병선의 말에 대답했다.
자신 없어 하는 모습과 긴장한 모습 그리고 자기가 왜 여기에 온 것인지 모르겠다는 모습 등이 섞여 주눅 든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 모습이 주눅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색하겠지.’
한진영은 이성우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정병선을 향해 말했다.
“제 동료입니다. 저를 도와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 함께 왔습니다.”
“동료?”
“네. 같이 신성증권 시흥지점에 있습니다.”
“그래요?”
정병선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성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이성우를 향해 물었다.
“우리 어디서 만나 적 있지 않습니까?”
“……제가요? 제가 어떻게 회장님을 뵈었겠습니까? 저는 처음 뵙니다.”
“그래요? 정말요?”
“네. 정말입니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이성우의 목소리에는 궁금증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알면 어쩌냐는 걱정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정병선은 한진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본 후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아는 분과 굉장히 많이 닮아서 물어본 겁니다.”
“아시는 분이요? 어떤 분과 닮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진영의 질문에 이성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의 행동과 이성우의 반응을 맞은 편에 앉아 지켜봤다.
그리고 한진영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기풍철강이라고 아십니까?”
“기풍철강. 알죠.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우리나라 굴지의 철강사 아닙니까? 한 해 매출이 5,000억대 정도 하는 철강사를 모를 수가 없지요. 최근에는 비철금속 업체도 인수해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린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건설에 중장비대여 그리고 레미콘 사업도 한다던가? 성우야. 레미콘 사업이 맞냐?”
“어? 난…… 잘 모르겠는데.”
이성우가 한진영의 질문에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회피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정병선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기풍철강 말씀은 왜 하시는 건가요?”
정병선은 이성우의 어깨에 올린 한진영의 손을 보고 말했다.
“기풍철강에 계시는 분이 떠올라서 여쭤본 건데…… 그런데 두 분께서 친하십니까?”
“네. 친합니다. 아무래도 입사 동기여서 그런지 다른 직원들보다 더 끈끈한 관계이지요.”
“그래요?”
정병선은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시선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정병선은 한진영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성우는 뜬금없는 정병선의 말에 다른 쪽을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알겠다는 말 이후에 아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 한진영과 정병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한쪽에서 서류를 확인하던 김병철이 일어나 정병선에게 다가왔다.
“이상 없습니다.”
정병선은 서류를 받아 들고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도착하기 전에 20억이 입금될 겁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이건 1차 투자금액일 뿐입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테스트 형식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이걸 가지고 어떤 식의 투자를 하든지 간에 우리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결과만 알려주십시오. 한 달에 한 번. 그것을 보고 이후의 투자 지속 여부와 투자금 상향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망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인을 마친 정병선은 계약서 한 부를 김영철에게 넘기고 나머지 한 부를 한진영에게 건넸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사인이 들어간 계약서를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정병선은 확인을 마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김정대 본부장이 얼마 전에 연락했었습니다.”
“역시 연락을 했군요.”
“김 본부장이 연락할 거라는 한진영 씨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했습니다. 그와 제가 할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연락을 받은 뒤에 생각이 달라지셨군요?”
한진영은 정병선의 사인이 들어간 계약서를 덮고 정병선을 바라본 채 웃었다.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와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이성우는 한진영과 정병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둘의 대화 속에서 한진영이 원하는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