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의욕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자
자리를 마친 뒤 한진영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이성우가 물었다.
“아까 정 회장하고 나눴던 대화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떤 대화? 기풍철강 이야기?”
한진영의 말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성우의 팔이 살짝 움찔거렸다.
“야야. 운전대 꽉 잡아.”
“어. 미안.”
이성우는 잠시 흔들렸던 차를 똑바로 세운 후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그 김 본부장 이야기. 김 본부장하고 정 회장하고 왜 이야기를 나눴다는 거야?”
“아~ 그 이야기?”
한진영은 한가로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 본부장이 나에게 부탁을 하더라고. 기회가 되면 정 회장하고 연결 좀 시켜주면 안 되겠냐고 말이야.”
“김 본부장이 왜? 정 회장은 리츠 계열이잖아. 김 본부장하고 연결고리 될 만한 게 있나?”
“리츠 회사도 결국 고객 상대로 영업 뛰어서 돈 버는 곳 아니냐? 그거나 그거 나지.”
“뭐가 그거나 그거 나야? 엄연히 둘이 다른 거 아니야?”
이성우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진영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이성우를 바라봤다.
과거 같았으면 이런 한심한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풍철강의 도련님이기에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하며 이성우에게 친절히 가르쳐줬다.
“리츠 회사에 투자하는 사람이나 증권사에 돈을 맡기는 사람이나 다 목표는 똑같아.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거지. 그들에게 방법은 중요한 게 아니야. 결과만 중요할 뿐이지.”
“그럼 서로 고객을 공유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야?”
“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비슷해. 서로 긴밀히 협조하자는 말속에 고객 공유의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이성우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슬쩍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거…… 우리가 하면 안 되는 거였냐?”
“우리가? 뭘?”
“그 고객 공유 말이야.”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니까 네 말은 프라임 리츠의 고객을 우리가 가지고 가는 건 어쩌냐고 물어보는 거야?”
“비슷해. 김 본부장이 하는 거라면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냐 해서 말이야. 우리도 고객을 가지고 있고 공유라는 개념을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우리랑 프라임 리츠라 하는 게 어떠냐 해서……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이성우는 한진영의 웃음소리에 주눅이 든 모습을 보였다.
괜한 소리로 창피를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제법 배포가 커. 프라임 리츠랑 고객을 공유할 생각을 하고 말이야.”
“배포? 그게 왜 배포랑 상관이 있어?”
“리츠 회사야. 부동산을 다루는 회사라는 말이지. 게다가 프라임 리츠는 어중이떠중이 투자자를 모으는 곳도 아니야. 그렇다면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투자자의 덩치는 일반 투자자와 다르다고 봐야 해.”
“그렇게 차이가 나?”
“생각해봐라. 기본적으로 뭐가 돈이 더 많이 들겠냐?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하고 주식에 투자하는 것하고…… 마인드나 투자 방법은 둘째치더라도 투자 규모에서 차이가 나. 물론 위로 올라갈수록 그놈이 그놈이라 차이가 줄어들겠지만…… 아래서는 차원이 달라.”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왜 그런 기회를 김정대에게 넘겼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해가 됐다고 하여 아쉬운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성우는 뚱한 표정을 지은 채 계속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쉬워하지 마. 줘도 못 먹는 거야. 프라임 리츠에서도 그걸 알아서 나에게 어쩌겠냐고 한번 물어보지 않은 거고 나도 내가 해보고 싶다고 나서지 않은 거지. 김정대 본부장도 알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나를 통해 정 회장을 만나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를 통해 정 회장에게 이야기를 넣은 거야.”
한진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허황된 꿈과 같은 목표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눈앞에 있어.”
“더 중요한 거? 어떤 거?”
“강연회.”
“강연회? 진짜 그거 하려고?”
“해야지. 그래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지점장님께서 허락하실까? 안 된다고 하셨다며?”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지셨을 거야.”
“그래?”
“그렇겠지. 그 정도 생각은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지점장이라는 자리에 올라가 있는 걸 테니까.”
한진영은 최준호에 대한 믿음에 가까운 말을 던지며 시흥지점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
아침 회의는 점점 험악한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지점을 찾는 고객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드는 데 다들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회의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혼이 나는 자리였다.
최준호는 애가 타는 심정으로 자리에 있는 직원들에게 소리를 쳤지만, 뾰족한 수를 떠올려 이야기하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최준호의 피는 바짝바짝 타들어갔고, 그럴수록 언성은 높아져만 갔다.
“이제 어쩔 거야? 최 과장이 물어온 이 거대한 먹잇감이 썩어가는 걸 그대로 지켜만 보고 있을 거야?”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 차장이 고개를 들어 최준호를 보고 말했다.
“지점장님. 아무래도 고객들이 작년에 있었던 서브프라임 공포를 다 털어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점장님도 아시겠지만, 그때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저는 이대로 전 세계 주식시장이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았어?”
박 차장이 도와달라는 식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박 차장을 돕기 위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2000에서 놀던 지수가 깊은 조정을 받아봤자 1700이나 1600까지 빠질 줄 알았지, 누가 900대까지 갈 줄 알았겠습니까? 그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죠.”
“아마 중간에 1300대쯤에서 기존 주식 투자자들은 다 묻혀버렸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춘 게 아니라 900대까지 가버렸으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죠.”
박 차장은 자기를 도와주는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최준호를 향해 강력하게 말했다.
“그래서 다들 꺼리는 걸 겁니다. 지금 지수가 얼마나 올라왔습니까? 이 상황에서 갑자기 지수가 떨어질지도 모르니 다들 몸을 사리는 거죠. 1500을 넘어 1600을 봤다면 오를 만큼 다 오른 겁니다. 여기서는 살 때가 아니죠.”
박 차장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다시 돌아봤다.
어서 자기의 말에 동조하라는 뜻을 눈빛으로 보냈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이들은 급히 박 차장의 말이 맞는다는 뜻을 표했다.
“저도 박 차장님 말에 동의합니다. 고객들이 몸을 사릴만한 지점입니다.”
“와서 그냥 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 방문했다는 데 큰 의의를 둬도 되지 않을까요? 주식 투자할 생각이 들면 우선 우리 지점부터 찾아올 테니 말입니다.”
“우리와 계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돈이 오가고 서류에 사인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잠재적인 고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 차장은 다들 자기의 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금은 기운을 차린 모습으로 최준호를 바라봤다.
자리에 서 있던 최준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박 차장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지금의 상황을 납득하는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 등신들아! 고객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붙잡지 않고 놓치고 나서 한다는 변명이 그따위 것들밖에 없어? 어?”
최준호는 박 차장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는 지수가 바닥에 있을 때만 고객을 유치할 수 있어? 그럼 2000이 다시 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지수가 너무 올랐으니 주식 투자를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할 거야?”
“에이. 그런 날이 다시 오겠습니까? 2000 넘겼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땐 다들 미쳐 있었을 때 아닙니까? 그러다 세게 한 방 먹었는데 그런 날이 다시 오겠습니까? 2000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을 지수입니다.”
“이것들이 제정신이 아니네. 꼴 보기 싫어. 다 나가!”
최준호는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려버렸다.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핀 후 의자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인 채 하나둘 회의실을 떠났다.
한동안 몸을 돌리고 있던 최준호는 제자리로 의자를 돌렸다.
모두 떠나 텅 빈 회의 탁자에 한 사람만이 남아 최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왜 안 나갔어?”
“제가 나갔으면 하십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나갈까요?”
“잠깐!”
한진영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최준호가 급히 손을 내밀어 한진영을 제지했다.
“잠깐 앉아 봐.”
한진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최준호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지점장님. 답답하시죠.”
최준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냐고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다.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야.”
최준호는 머리에 손을 짚은 채 계속 이야기했다.
“권역 지점장 모임에 가면 다들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 복 받았다고…… 어떻게 남들은 다 꺼리는 방송사 투자대회에 나가 압도적인 실적으로 1등을 한 직원을 보유한 거냐고 아주 난리도 아니야. 그러면서 은근슬쩍 물어봐. 얼마나 고객을 유치했냐고…… 솔직히 말해보라고…… 그러고 나서 실적 발표 때 다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아? 이런 씹…….”
최준호는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듯했다.
그리고 쥐어진 주먹이 당장에라도 탁자를 부실 것만 같았다.
“다음 회의가 언제 있습니까?”
“분기마다 있으니까 앞으로 두 달 뒤. 심지어 그땐 우리 지점에서 한다.”
최준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한진영은 대답 뒤에 꽉 다문 최준호의 입에서 분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부러 우리 지점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나 보군요.”
한진영의 말이 정곡을 찌른 건지 최준호의 질끈 감은 눈이 확 뜨였다.
“그래. 그 썩을 놈들이 일부러 우리 지점을 다음 회의 장소로 잡았어. 그 지랄 맞은 놈들이 우리 지점을 정한 이유는 뻔해. 찾아오는 고객에 비해 늘어나지 않는 약정금액과 변변치 않은 실적을 가지고 놀리기 위해 그런 거야. 분명해.”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무슨 일이 있어도 실적을 채워 넣어야지. 그것들이 아무런 소리 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지점장님.”
한진영은 최준호를 부르고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최준호의 당장에라도 불꽃을 튀길 것처럼 이글거리던 눈과 차갑게 가라앉은 한진영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뜨겁게 타오르던 최준호의 눈빛이 삽시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왜…… 그래?”
“지점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뭘 알아?”
“이대로는 절대 고객이 늘지 못할 거라는 것 말입니다.”
조금 전 회의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들고 있던 서류가 한진영의 얼굴로 날아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둘만 있는 자리에서 차분히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목소리에 최준호도 다짜고짜 화를 낼 수만은 없었다.
“고객이 늘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점을 찾는 고객은 점점 줄어들 겁니다.”
“최석영이 전문가 코너에 고정으로 들어가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한 가닥 희망에 기대를 걸고 있는 최준호였다.
하지만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지 못하다는 거 이번에 증명된 거 아닙니까? 이대로 최 과장이 방송에 나가 아무리 좋은 소리를 내뱉어도 지점을 찾는 사람을 우리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점장님도 그걸 모르고 계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알아. 나도 안다고…….”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소리를 꽥 하고 질렀다.
그리고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소리쳤다.
“아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방법이 있어? 최소한 우리 지점에 한 명이라도 더 오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 아냐? 그리고 그다음은 그 사람들을 우리 고객으로 만드는 것. 그건 너희들이 할 일이고…….”
“의욕 없이 찾는 사람들을 우리 고객으로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욕이 없어도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야. 제 발로 먹잇감이 되겠다고 찾아온 이들을 그냥 놔둬? 그것도 못 하면 여기서 앉아있을 이유가 없어.”
“지점장님.”
나지막한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왜 모른 척하는 거냐는 무언의 의미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최준호는 지점장이었으며 한진영은 입사한 지 일 년이 채 넘어가지 못하는 직원이었다.
둘의 경계는 어마어마하게 넓어 감히 둘이 마주하고 일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나 한진영과 최준호는 서로 마주 앉아서 일 이야기를 하는 것도 모자라 마치 정신을 차리라는 듯한 이야기를 한진영이 최준호에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의 목소리에 최준호가 반응했다.
“알아. 알아. 그런데…… 정말 방법이 없잖은가?”
“방법이 왜 없습니까?”
“있어?”
한진영의 말에 점점 꺼멓게 변해가던 최준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뭔데?”
“의욕이 있는 사람들이 지점에 찾아오게 만들면 됩니다.”
“찾아오게 만들자고? 어떻게?”
“강연회를 열어 의욕이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면 됩니다.”
“또 강연회 이야기야?”
“그게 가장 좋은 수라는 것. 지점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