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확실하게 먹을 수 있는 자리
신성증권은 다른 증권사들보다 조금은 빡빡한 성과급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성과급에 대한 포상을 분기별로 해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주는 것이었다.
성과급은 나름대로 꽤 후하게 지급되고는 했다.
그러나 성과급이 후한만큼 기본급에 대한 제약이 있었다.
일정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본래 계약한 금액의 80%만 기본급을 지급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정한 분기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석 달 동안은 본래 받기로 한 연봉보다 더 적은 금액을 받으면서 회사에 다녀야만 했다.
이성우는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부터 실적을 채우지 못해 이 조항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야 겨우 실적을 채워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성우는 성과급을 받는다는 사실보다 이런 사실에 더 즐거워했다.
“나는 성과급 필요 없으니까 그냥 제대로 된 월급이나 받았으면 좋겠다.”
이성우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성우의 시선이 한진영에게 꽂힌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던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이성우가 걸어갔다.
“너~~는~~ 얼마나~~ 받았을까나~~”
이성우는 한진영이 가릴 것을 의식하여 모니터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성우의 예상과 달리 한진영은 모니터를 가릴 생각이 없었다.
이까짓 성과급 정도야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으헉!”
조금 전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성과급 표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왜 그래?”
성과급은 개인 프라이버시라 생각하여 일부러 보지 않던 최석영은 이성우의 반응에 슬쩍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이성우와 마찬가지로 놀라고 말았다.
“뭐야?”
이성우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저거 잘못된 거 아니냐? 미진 씨에게 가서 확인해보자.”
“잠깐만. 기다려봐.”
한진영은 전화기를 들어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휴대폰으로 잔고를 확인하는 방법이 직접 은행에 전화를 거는 방법밖에 없음을 귀찮아하며 한진영은 이성우와 최석영 앞에서 폰뱅킹을 통해 입금 내역을 확인했다.
“금일 고객님의 입금내역은…… 신성증권…… 4천 3백 2십…….”
“4천만 원?”
“야야. 끝까지 다 듣지도 못했다.”
“만원 아래 금액 들어서 뭐 해? 4천 3백 맞아? 진짜야?”
“진짜네. 저기 봐. 미진 씨가 메일로 보낸 거 하고 입금액하고 같잖아. 왜? 네가 보기에 이상 있어?”
“아니. 이상 있는 건 아닌데…… 과장님. 원래 성과급이라는 게 이렇게 들어오는 거예요?”
이성우는 조금 전까지 최석영이 받은 성과급 금액이 엄청나게 큰돈인 줄 알고 호들갑 떨었던 자기가 부끄러워졌다.
앞으로 남은 3번의 분기 성과급을 모두 500만 원으로 받더라도 한진영이 받은 성과급의 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최석영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든 이성우였다.
최석영도 이성우와 같이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큰 금액의 성과급은 자기도 이야기만 들었지, 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이렇게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누군가 했더니 진영이 같은 사람이 받는 거였구나. 대단하다.”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어? 이제 시작? 뭐가 시작이야?”
“뭐가 시작이기는 제대로 된 성과급을 받는 게 이제 시작이라는 거지. 분기에 4천만 원 받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놀라? 나나 너 그리고 과장님 모두 이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갈 거야. 그리고 더 큰 금액을 받아낼 테니까 그렇게나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허풍이라고 생각할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진영이 말을 하니 다르게 느껴졌다.
허풍이 아니라 진짜로 한진영이 그렇게 만들어낼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 한턱은 과장님이 아니라 네가 내라.”
“한턱이고 두 턱이고 뭘 그렇게 자꾸 내라고 그러냐? 각자 알아서 밥 먹으면 될 일인데.”
“아니야.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같이 밥 먹고 다들 나하고 같이 갈 곳이 있어.”
“갈 데가 있다고?”
“그래.”
조금 전까지 성과급 얘기에 활활 불타오르던 이성우가 한진영과 최석영을 끌어안았다.
“오늘 정말 나에게는 중요한 날이야. 그러니까 나에게 힘을 줘.”
“정말 중요한 일이 회사 끝나고 벌어지는 거야?”
“어. 회사는 중요하지 않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조금 뒤에 일어날 테니까.”
이성우는 한진영의 품에 푹 안겨있던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진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꼭 나에게 힘을 줘야 해. 분기 성과급으로 4천만 원이 넘는 금액을 찍은 너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뭔데?”
“이따 같이 가보면 알아. 과장님도 같이 가실 거죠? 분기 성과급 500만 원의 도움도 필요해요.”
“야. 그 성과급 500만 원 이야기는 빼면 안 되냐?”
“둘이 합쳐 4천 8백. 남들 연봉을 성과급으로…… 그것도 분기에 받는 사람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최석영이 한진영에게 뭣 때문에 얘기 이러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한진영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기풍철강의 도련님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얼까 궁금하기는 한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아~ 오늘 아이들에게 일찍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진영아. 너 좀 팔자.”
“절 팔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같이 갈 텐데요. 성우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라도 가봐야겠어요.”
이제는 무릎까지 꿇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이성우를 한진영은 내려다봤다.
***
한턱 크게 내라고 말을 많이 했지만 결국 먹은 거라고는 곱창집에 가서 곱창과 소주 한 병을 마신 게 전부인 세 사람은 커다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정말 여기 가려고?”
“오늘 중요해. 과장님. 과장님도 저만 믿으세요.”
회사에 있을 때와 눈빛이 달라진 이성우였다.
항상 주눅 들고 누가 봐도 하기 싫은 일을 하던 모습의 이성우는 먼 곳으로 떠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한진영의 눈앞에 서 있는 이성우는 의욕에 차 무슨 일이든 할 것처럼만 보였다.
그런 이성우와 달리 최석영은 더욱 주눅 든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짜 가려고?”
“과장님.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따요.”
“아니.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과장님. 다른 직원들도 다들 하는 거잖아요. 왜 무서워하세요? 처음도 아니시라면서…….”
“처음은 아니지. 그런데 좋은 기억이 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한진영도 유독 눈치를 살피는 최석영이 궁금해졌다.
꺼리기는 자기도 마찬가지였지만 최석영만큼 이 정도로 두려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이나 선후배들끼리 와서 좋게 돌아가는 걸 본 적이 없어. 다들 여기서 멱살 잡고 주먹질한 뒤에 헤어지지. 그리고 그 뒤에는 둘이 평범한 관계로 돌아가지도 못하더라. 남보다 못한 것도 모자라 원수가 되더라고…….”
“그런 사람을 보셨어요?”
“봤다 뿐이야? 우리 지점에도 있잖아. 박 차장하고 정 과장.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였어. 그러다가 같이 과천 갔다 온 뒤 원수가 되어 버렸지. 그 둘만이 아니야. 지점장님도 동기하고 정선인가 마카오 놀러 갔다 와서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됐다고 하던데…….”
최석영의 말에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어떤 식으로 벌어지는지 이성우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그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왔거나 확신이 없는 일에 친구를 끌어들여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저는 달라요. 이건 정말 확신이 있는 일이에요. 보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그걸 증명하는 거예요.”
넓게 펼쳐진 광장인데도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성우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통은 이렇게 많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이름하여 전세금 매치 데이. 일 년에 한두 번 벌어질까 말까 한다는 날이 바로 오늘이에요.”
“전세금 매치? 그게 무슨 말이야?”
특이한 이름에 최석영이 흥미를 보였다.
이성우는 가슴을 활짝 열고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이야기했다.
“단승식 배당률이 1.2 이하가 나올 때 우리는 그걸 전세금 매치라고 불러요.”
“왜?”
“배당률 1.2는 정말 나오기 어려운 숫자니까요. 무조건 먹는다고 봐야 해요. 특히 말과 기수 둘의 컨디션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경마와 달리 경륜은 오로지 선수의 컨디션 하나만 봐도 되기 때문에 이변이란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배당률이 뜨면 전세금 빼서 들어온다고 해서 전세금 매치라고 불러요.”
“…….”
최석영은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줄 알았던 이름에 쓸데없는 이유가 붙은 것을 듣고 급격히 흥미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최석영과 달리 한진영이 지금의 설명을 듣고 흥미가 올라갔다.
“그러니까 1.2 배당이 걸린 선수가 무조건 우승할 테니 거기에 전세금을 빼서라도 박아라 라는 이야기지?”
“그래. 그거야. 역시 너는 내 생각을 제대로 알아들을 줄 알았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어깨를 두르고 광명 경륜 돔 경기장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옆에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전세금 매치면…… 그게 이거였나 보네.’
이성우가 경륜은 물론이고 경마에 카지노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이자 미래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전세금 매치인지 뭔지에 돈을 크게 꼬라박아 한동안 실의에 빠져 회사에 다녔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도대체 전세금 매치가 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실의에 빠졌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함께 오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올해 들어서 처음 열리는 전세금 매치다. 다들 돈 준비됐죠?”
“네가 돈 빼 오라고 해서 빼기는 했다만…… 나 이거 성과급 다 뺀 거야. 와이프가 성과급 얼마 벌었는지도 다 알고 있어. 그냥…… 나는 구경만 할게.”
“아~ 과장님. 저만 믿으세요.”
이성우는 눈까지 부라리며 최석영에게 말했다.
평소 회사에서 보여주던 이성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경륜 돔 경기장 앞에 서 있는 이성우는 다른 이성우처럼 느껴졌다.
“전세금 매치가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나 본데 이건 경륜 공단에서 그냥 먹으라고 주는 경기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다른 경기도 하라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확실한 경기, 무조건 먹는 경기, 눈감고 과장님 아이들이 돈 집어넣어도 안전할 만한 경기니까 와서 하자는 거지요. 형수님이 성과급 얼마 받는지 알고 있다고 하셨죠?”
최석영은 이성우의 모습에 놀랐는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팔에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럼 과장님에게 얼마가 떨어져요? 100만 원을 주시겠어요, 아니면 우리 남편 고생했다고 마음껏 쓰라고 90만 원을 주시겠어요? 끽해야 10만 원? 술이나 한잔하고 오라며 주는 그 정도의 돈이 전부일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런데 그게 유부남들의…….”
“과장님. 석 달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그런 용돈 같지도 않은 돈 받으시면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나는…….”
“그래서 제가 특별히 기회를 알려드리는 거예요. 이번 경기에 배팅해서 1.2배 돈 받으면 100만 원 돈이 과장님 주머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성과급 그대로 형수님께 돌려드리세요. 그럼 모두 해피한 결말 아니겠어요? 성과급 받아왔다고 형수님은 즐거워하며 고생한 남편 엉덩이라도 한 번 두드려줄 테고 과장님은 성과급으로 ‘안전한’ 배팅을 통해 비자금을 얻어 즐겁고…… 정말 하늘이 도와 우리 성과급 들어온 날 전세금 매치가 벌어져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하고 싶어도 못 했을 거예요.”
최석영은 이성우의 말에 설득이 당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기도 하네. 다른 날이었으면…… 10만 원 집어넣는 것도 어려웠겠지.”
“그거 봐요. 그냥 앉아서 먹는 날이 운 좋게도 이렇게 찾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런데 너는 무슨 돈으로 집어넣으려고?”
파라락.
최석영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성우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표 다발을 꺼냈다.
이성우는 수표 다발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제가 말씀드렸죠. 이런 날은 흔히 오지 않는다고요. 저 이런 날 오면 제대로 배팅하려고 준비 많이 했어요.”
“지금 손에 든 거 그거 수표야? 얼마나 가지고 온 거야?”
“많이는 아니에요. 3천이요.”
“3천? 3천이 많이가 아니야?”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우리가 이 정도 금액에 놀라면 안 되죠. 진짜 저는 재미로 하려고 3천만 뽑아온 거예요. 제대로 하려면 여기에 공이 하나가 더 붙어야죠.”
최석영은 이성우의 통 큰 배팅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500만 원을 집어넣으려 하는 것도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3천을 집어넣으려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모자라 재미라는 표현을 하는 이성우였다.
최석영은 오히려 이런 배포 있는 이성우의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진짜 확실한가 보네.”
“확실하다니까요. 단승식 1.2 배당률은 정말 안 나오는 숫자예요. 일 년에 한두 번 공단이 이벤트성으로 만드는 경기라서 나오는 거로 생각하시면 돼요. 그거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흥미를 유발하며 돈을 따는 맛을 보여줘서 고객을 유치하려는 경륜 공단의 상술이에요. 이런 날은 무조건 먹어줘야죠.”
지금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진영은 수표 다발을 들고 있는 이성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 오늘 내 말 무조건 들어야 한다.”
“어?”
한진영이 손을 잡는 순간.
“와~~~!”
돔 경기장에서 막 한 경기가 끝난 것인지 환호가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이런 환호에 흥분도가 높아져야 정상이건만 이성우는 오히려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