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우리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요란했던 행사가 마무리됐다.
“거기. 거기. 빨리 치워.”
최준호는 늘어놓은 선간판과 임시로 설치한 탁자와 의자 그리고 대강당 입구에 길게 붙여놓았던 현수막까지 모두 다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행사장으로 이용했던 대강당의 정리야 삼덕빌딩 측에서 알아서 해준다지만 그 외의 것들은 어질러 놓은 신성증권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한바탕 사람들과 씨름을 하느라 치운다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러나 정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신남 그 자체였다.
몇몇은 콧노래를 불렀고 또 다른 이들은 어깨춤을 추는 것이 보기만 해도 그들이 이번 행사에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뒀는지 알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자자. 얼른 정리하고 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도록 하자. 앞으로 한동안 고객들과 상담하느라 힘이 들 테니까 오늘하고 내일 푹 쉬도록 해. 회식은 내가 낼 테니까 한 사람도 빠지지 마.”
최준호도 신이 났는지 큰 소리로 회식을 제안했다.
그리고 김미진에게 근처에 단체로 들어갈 곳을 알아본 뒤 예약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점장님. 그냥 맥주만 내시면 안 되죠. 술 마신 뒤에 노래도 불러야죠.”
“그럼 아예 가라오케로 알아보라고 할까?”
“그것도 좋죠.”
“그래. 미진 씨. 근처에 괜찮은 가라오케로 잡아봐. 그래도 식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식사할 곳도 알아보고…… 그것도 내가 낼 테니까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좋은 곳으로 잡아. 오늘 아주 내가 날 잡고 제대로 한턱 낼 테니까.”
“와~~”
최준호의 통 큰 결정에 정리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최준호는 사람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화답했다.
“오늘 회포 제대로 풀고 월요일부터 열심히 일해야 해. 그리고 앞으로도 고객들만 잘 끌고 오면 오늘 같은 회식은 내가 백 번이고 더 낼 테니까 다들 어떻게든 고객을 끌고 온다는 것 명심하고…….”
“네!”
최준호는 한목소리에서 나온 것 같은 직원들의 대답에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나머지 정리를 계속 이어 하도록 지시했다.
“아빠~”
최석영이 정리를 하는 곳으로 최석영의 딸이 달려왔다.
최석영은 달려온 딸을 품에 안고 번쩍 들었다.
“어이구. 우리 공주님. 아빠 봤어?”
“봤지. 엄청 멋졌어.”
“멋졌어?”
“어! 어!”
최석영 딸은 강연하던 최석영의 모습에 푹 빠졌는지 최석영을 꼭 끌어안았다.
“자기. 멋졌어.”
최석영의 부인도 최석영을 가볍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줬다.
최석영은 이런 가족의 모습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남편과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가족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마음이 달궈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자 아저씨.”
아들은 아빠에게 달려오지도 않고 바로 이성우에게로 달려갔다.
아빠가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듯이 오히려 이성우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어? 뭐야?”
이성우는 의자를 옮기다 말고 자기를 안아오는 최석영의 아들 때문에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충분히 아빠에게 고생했다는 마음을 전했다고 느꼈는지 딸도 아빠를 버리고 이성우에게 달려들었다.
“부자 아저씨!”
이성우는 왜 최석영의 아이들이 자기의 왼 다리와 오른 다리를 감싸 안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이 다리를 꽉 안은 채 무언가를 바라는 듯하며 웃는 모습에 섬뜩함마저 느꼈다.
“……저, 얘들아?”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이성우가 당황하고 있을 때 최석영의 와이프도 이성우를 향해 다가왔다.
“어머. 애들도 참. 그나저나 성우 씨. 잘 지내셨죠? 어머. 왜 이렇게 고생하고…… 여보. 와서 성우 씨 좀 도와줘.”
최석영은 잠시 왜 가족들이 이성우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심전심인지 그는 와이프의 마음을 한 번에 알아채고 들고 있던 것을 냉큼 내려놓은 채 이성우에게로 다가갔다.
“그래. 성우야. 너는 이거 잠시 내려놓고 아이들하고 놀아줘. 내가 나머지 다 할 테니까.”
“에?”
이성우는 자기가 들고 있던 의자를 뺏어가는 최석영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왼 다리와 오른 다리에 매달려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언가를 갈구하는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마지막으로 환한 미소를 짓는 최석영의 와이프를 보고 한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족 사기단?’
이성우는 최석영 가족들이 자기를 애타게 찾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최석영을 향해 한 소리 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한진영이 이성우의 등을 두드리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넸다.
“여기서는 빨리 지갑을 꺼내는 게 쓸데없는 시간을 단축하는 길이야. 괜한데 기운 빼지마.”
“이런…….”
이성우는 화를 내려다 안겨 있는 아이들을 보고 꾹 참았다.
그리고 얼굴에 고객을 만날 때나 짓는 미소를 지으며 지갑을 품에서 꺼냈다.
그 모습에 아이들은 이성우의 다리를 안은 채 즐거워했다.
“그래. 그래. 나를 이렇게 반겨주니 그것만으로 감사해야겠지. 어디 보자.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오늘은…… 파란 거?”
“누런 거. 누런 거.”
“누런 거?”
이성우는 아이들을 향해 웃고 있는 얼굴을 들어 최석영을 바라봤다.
멀리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어쩌면 최석영이 시킨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성우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다시 내려다보고 지갑을 열었다.
“그래. 누런 거…….”
5만 원짜리를 꺼내 한 장씩 아이들에게 건넨 이성우는 지갑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고 손을 벌린 채 계속 서 있었다.
“왜 그러지?”
이성우가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만 벌리고 있었다.
최석영의 와이프도 웃는 얼굴로 이성우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최석영 또한 이성우를 향해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최석영의 가족의 웃는 얼굴에서 이성우는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것을 느꼈다.
이성우는 또다시 참지 못하고 최석영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 할 때 이번에도 한진영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해? 왜 시간을 질질 끌어. 빨리 끝내. 그러게 지난번에 누가 그렇게 많이 주래?”
“나는 이렇게 빨리 또 만날 줄 몰랐지. 보통 동료 가족들은 평생에 한두 번 만나는 게 전부 아니냐? 아이들 키 큰 것도 못 느껴질 만큼 자주 만날 이유가 없잖아.”
이성우가 억울한 듯 이야기했다.
이성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느껴지는 한진영의 어깨 두드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갑을 다시 열며 웃었다.
“그래. 까짓거…… 옜다.”
“와~~~”
“그래. 이런 환호를 너희 아빠가 조금 전에 들었는데…… 나도 듣는구나. 근데 누구는 돈을 버는 환호고 누구는 돈이 빠져나가는 환호니…….”
이성우가 지갑에서 5만 원짜리를 대여섯 장씩 아이들에게 건네자 아이들이 즐거워했다.
“어머. 성우 씨. 미안해요. 얘들아 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지?”
“고마워요. 부자 아저씨.”
“어. 그래. 그런데 부자 아저씨라는 단어는…….”
이성우가 아이들의 머리라도 한번 쓸어보려 했지만, 아이들은 이성우의 말도 듣지 않고 쌩하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성우야. 아니. 애들한테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줘? 애들 버릇 나빠지게…….”
그동안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던 최석영이 이제야 입을 열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왜 이렇게 많이 줄까요? 마치 강탈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말이에요.”
엄마에게 돈 자랑을 끝낸 아이들은 한진영의 곁에 섰다.
미리 최석영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지 아이들은 한진영의 좌우에 섰고, 뒤이어 최석영의 와이프가 한진영을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성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가온 최석영에게 물었다.
“왜? 진영이하고 사진을 찍어요?”
“어. 미리 사진 찍어놓으라고 했어. 나중에 자랑이 될지도 모르니까.”
“저는요?”
“너? 너하고 왜 사진을 찍어?”
“그러니까 용돈은 저한테 받아 가고…… 사진은 진영이랑 찍고요?”
최석영은 뭘 알면서 물어보냐는 식으로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 애들 용돈 준 만큼 한 턱 쏠 테니까. 설마 내가 입 싹 닦겠어?”
“……저번에 준 것까지 얻어먹을 겁…….”
“여보. 애들아. 먼저 들어가. 나는 조금 이따 갈게.”
최석영은 애써 이성우의 말을 외면하며 아이들과 와이프를 보냈다.
“부자 아저씨. 또 봐요.”
아이들은 가면서도 이성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또 만날 것을 인사했다.
이성우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 너희들 대학 갈 때나 만나자. 그때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용돈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한진영은 메뚜기떼에 당한 것 같은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 준비해야지.”
“뭘 또 준비해? 오늘 준비하자는 이야기만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또 준비할 게 있어?”
“왜 모르는 사람처럼 이야기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
“뭔 일?”
한진영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저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있잖아.”
“이런…….”
이성우의 얼굴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
회식을 하러 가는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한진영과 이성우는 잠시 건물 밖에서 담배를 피웠다.
최준호에게만 사정을 이야기한 둘은 잠시 모든 사람이 빠져나간 뒤의 고요함을 즐기는 중이었다.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이성우의 신분을 알고 있었으며 강연회가 열린 곳을 무상으로 빌린 사정 또한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성우의 아버지이자 기풍철강의 회장님이 강연회가 끝난 뒤에 한진영과 이성우를 불러올리는 것을 이해했다.
어차피 강연회의 주인공은 최석영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강연회의 성공에 흠뻑 취해 한진영과 이성우가 빠지는 것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최석영에게만 사정을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최준호의 지휘 아래 직원들은 썰물처럼 삼덕빌딩을 빠져나갔다.
“도련님.”
모든 직원이 떠난 뒤 건물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둘을 향해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몇몇이 찾아왔다.
이성우는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을 모시는 사람들의 등장에 이제야 진짜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일이 실감이 나는 듯해 보였다.
찾아온 사람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람은 한진영과 이성우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시죠.”
말을 마친 남자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삼덕빌딩 안으로 이끌었다.
삼덕빌딩의 지상층은 대부분 임대를 하여 사용하는 중이었다.
오직 가장 위에 자리 잡은 곳만이 삼덕빌딩의 주인인 기풍철강이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는 한진영과 이성우를 삼덕빌딩의 가장 높은 곳으로 안내했다.
“긴장하지 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어.”
“걱정하지 마. 너는 크게 이야기할 게 없을 테니까.”
“나는 이야기할 게 없다고? 지금 우리 아버지 만나러 가는데?”
“네 아버지가 너 보고 싶어서 우리를 불렀겠냐? 당연히 나를 보고 싶어 부른 거지. 그러니 너한테는 별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이야기할 게 있어도 내가 할 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도 돼.”
“정말 그래도 될까?”
아직 엘리베이터가 멈추지도 않았는데 바싹 긴장한 모습의 이성우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등을 어루만진 후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것을 준비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성우와 친한 듯한 사람이 내리는 두 사람을 맞이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회장님께서 흡족해하십니다.”
“그래요?”
“네. 오늘은 별일 없이 지나갈 것 같으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럼 가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진영의 다독임과 엘리베이터를 내린 뒤의 대화로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이성우가 먼저 아버지이자 기풍철강의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회장의 수행비서인 김 비서는 그런 이성우의 말에 웃으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문 앞에 서자 김 비서가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한진영과 이성우가 왔음을 알렸다.
“회장님. 한진영 씨와 도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으로 안내해.”
“네.”
회장의 지시로 문이 활짝 열리자 한진영은 거침없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성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소파에 앉아 들어오는 한진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진영과 함께 들어온 이성우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왜 온 거냐?”
“어. 저…… 는…….”
이성우가 몸이 굳었는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가볍게 이성우의 등을 쓸어준 후 이성우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오늘 강연회를 진행했던 최석영 과장과 저 그리고 여기 있는 성우까지가 한 팀입니다.”
“팀?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저 아이가 무슨 팀에 들어간다고…….”
기풍철강의 회장이자 이성우의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은 코웃음을 흘린 후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그 유명한 한진영이구먼.”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강연회 잘 봤네.”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강연회도 재미있었고 그 앞에 행보와 강연회가 끝난 뒤의 행동까지 모두 재미있게 지켜봤어.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이정훈은 한진영을 향해 웃어 보인 후 김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김 비서는 이정훈의 손짓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고 한진영에게 이정훈 곁에 준비된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들어와 앉으셔서 이야기하시지요. 도련님께서도 옆에 앉으시면 됩니다.”
한진영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런 한진영의 모습과 달리 이성우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마지못해 한진영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