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함께 돈을 벌어보자
방 안은 간단한 사무를 보기 위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한 응접용 소파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널따란 크기에 비해 가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에 속했다.
이곳은 임시로 사용되는 사무실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그런 이곳에서 조금 전까지 이정훈은 강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임시로 가져다 놓은 티비 화면 속에는 최석영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정훈은 화면에 아직 남아있는 최석영의 모습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는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저 친구 저쪽 방면으로는 꽤 성공할 것 같아.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길 수 있는 건 저 친구만의 매력일 테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 과장을 전면에 내세웠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자네가 움직이고?”
이정훈은 한진영을 향해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의 매서운 눈길에도 주눅 드는 모습 하나 없이 대답했다.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
잠시 이정훈은 말을 멈추고 앉아 있는 한진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다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좋은 선택이야. 자네보다는 저 친구가 앞에 나서는 편이 나아. 자네는 다수를 끌어당기는 것보다는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으니까.”
“칭찬이라고 알아듣겠습니다.”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게나.”
이정훈은 주눅 든 모습 하나 없이 노련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한진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궁금하지 않나?”
“저보다 회장님께서 더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요?”
“내가? 내가 뭘 궁금해할 것 같다는 거지?”
“어떤 선물을 가지고 왔는지 말입니다.”
“선물? 자네가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건 생각도 못 한 이야기인데? 이봐. 김 비서. 저 친구가 선물을 가지고 왔다는군. 어떻게 생각해?”
방에 들어와 이정훈의 뒤에 가만히 서서 이야기 듣던 김 비서는 이정훈의 말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을 뵙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선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하하하. 이거 참. 그래. 무슨 선물을 가지고 왔나?”
이정훈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에 조금은 부드러워진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선물을 어서 꺼내 보라는 식으로 앞에 놓인 식탁을 향해 눈짓했다.
한진영은 당장에라도 선물을 꺼낼 것처럼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정훈은 한진영의 손을 따라 주머니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한진영의 손은 주머니에 들어간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정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한진영의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선물을 꺼내기 전에 회장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응?”
이정훈은 당장에라도 선물을 꺼내놓을 것 같던 한진영이 자기에게 무얼 해줄 수 있느냐는 말을 꺼내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선물을 드리면 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으신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내가 자네에게 뭘 해달라고?”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은 아니시죠?”
“당돌한 친구구먼.”
이정훈은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놀란 이성우가 한진영의 바짓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급히 한진영을 대신하여 이정훈에게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한진영이 먼저였다.
한진영은 손을 들어 이성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막은 채 입을 열었다.
“제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들으시면 깜짝 놀랄만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나와 협상을 하자는 건가?”
“이런 모습을 기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제 얼굴이 궁금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것은 아니시지요? 삼덕빌딩에서는 주식 관련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스스로 깨면서까지 말입니다.”
이정훈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웃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의 표정에 자기도 모르게 소파 끝으로 붙고 말았다.
자리에 한진영이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대기실 밖으로 몸을 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이성우에게 이정훈의 지금 표정은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의 모습도 담담히 받아넘겼다.
어차피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가 왜 강연회를 삼덕빌딩에서 하기로 한 줄 아십니까?”
“삼덕빌딩에서 한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있지요.”
한진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천여 명의 사람들을 모을만한 곳이 삼덕빌딩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한국거래소 앞에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따지자면 삼덕빌딩만 한 곳이 없기는 하지만 뭐 그런 세세한 것을 따지지 않는다면 강연회를 열 곳은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부러 삼덕빌딩에서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는 말인가?”
“네. 일부러가 맞습니다.”
한진영은 품 안에 들어 있던 손을 꺼냈다.
이정훈은 꺼내진 한진영의 손을 쳐다봤다.
한진영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을 것으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 사실에 이정훈은 조금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 밑바탕에는 한진영이 대단한 무언가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은 방에 들어온 지 5분도 지나지 않는 동안 보여준 한진영의 태도와 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아까보다 더한 흥미를 느낀 이정훈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내가 자네를 알아보게 하고 강연회 장면을 보게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습니다. 그러길 원해서 성우에게 삼덕빌딩에서 강연회를 열고 싶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성우는 자기 이름이 한진영의 입에서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이성우는 바짝 긴장한 듯 보였다.
이정훈은 긴장한 이성우의 모습에 고개를 흔들고는 한진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삼덕빌딩에서 강연회를 연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말인가?”
“맞습니다. 회장님 때문입니다. 회장님이 흥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강연회 속의 뜨거운 주식 열기를 직접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내가 왜 강연회의 열기를 봐야 하는 거지?”
“주식시장이 돈이 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정훈은 한진영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계속 말해보게.”
한진영은 이정훈의 손짓에서 흥미가 생겼음을 알게 됐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을 향해 그의 마음을 당기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3대 욕구라느니 5대 욕구라는 거창한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모든 욕구 위에 돈을 향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계속 이야기했다.
“행복도 살 수 있는 돈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그 모습을 직접 보여 드렸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서? 자네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뭔가?”
이정훈은 날카로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성우가 가장 싫어하는 눈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 속을 훑어내겠다는 특유의 눈빛에 이성우는 몸서리치고는 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런 눈의 사람을 제일 좋아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에게 돈을 턱턱 안겨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시장을 보여 드린 이유가 뭐겠습니까? 함께 돈을 벌어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회장님과 함께 돈을 벌고 싶어 이렇게 회장님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함께 돈을 벌어보자?”
“회장님도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이런 곳에 빌딩을 매입하셨을 테고 이 친구를 신성증권에 집어넣으셨을 테니까요.”
“알고 있었군.”
“모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친구는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한진영은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뜻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전한 것이었다.
이정훈은 그런 한진영을 가만히 쳐다보다 크게 웃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비서를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가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고 해서 만난 건데 그 말 듣기를 잘한 것 같아. 생각보다 똘똘한 친구야.”
“모두 도련님이 친구를 잘 사귀어 둔 덕분이지요.”
“내가 봤을 땐 저 모자란 놈이 친구를 잘 사귄 게 아니라 저 음흉한 놈이 친구가 되기 위해 접근한 것 같은데?”
“그것도 결국 도련님이 저분을 끌어당긴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방식이건 도련님이 저분을 회장님과 마주하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쨌든 성우를 끼고 왔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으니까.”
이성우는 여전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진영을 믿고 이성우는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정훈은 이성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조금 전에 무슨 말이냐며 묻던 아들이 한진영의 손길 한 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만큼 한진영을 믿고 있다는 것이 이정훈에게 전해졌다.
이정훈은 한진영을 향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좋아. 그럼 어떻게 내가 자네와 함께 돈을 벌게 되는 건가? 그것까지 생각하고 이 자리에 온 거겠지?”
“당연하지요.”
“신성증권을 인수하라는 소리는 하지 말게. 이미 그 일은 끝난 일이니까.”
“저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정훈은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한진영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말에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 함께 돈을 버는 일은 신성증권을 인수한 뒤, 한진영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일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의 생각은 달랐다.
“신성증권을 회장님이 인수해봤자 저에게 떨어지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성우와의 친분과 이렇게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이용하여 승진을 조금 빠르게 하는 것 정도? 그것도 위에 차곡차곡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 다 헤치고 나가려면 한세월입니다. 그렇게 올라가다가는 회장님과 함께 돈을 버는 일은 다 지나가고 말 게 분명합니다.”
이정훈의 꼬아져 있던 다리와 팔짱이 풀렸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친구구먼.”
“욕심이라고 보지 마시고 목표가 높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좋아. 뭐가 됐건 같은 이야기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지. 그럼 이제 제대로 이야기해 볼 텐가? 그럼 나와 어떻게 돈을 벌어보자는 건가?”
한진영은 이정훈의 말에 품속에 손을 다시 집어넣었다.
아까와 달리 한진영의 손에는 전화번호가 적힌 자그마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이정훈은 자그마한 종이와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자그마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자네 제대로 비즈니스를 할 줄 아는구먼. 그게 나에게 가지고 온 선물인가?”
“맞습니다. 그냥 자리에 앉아 회장님과 함께 일하자고 말하면 그것만큼 염치없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먼저 선물 이야기를 해서 내 관심을 끌고 차분히 자기 이야기를 듣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선물 이야기를 꺼내 깊어진 관계를 이용하여 원하는 목적을 끌어낸다.”
이정훈은 오늘 한진영이 자기 앞에서 한 행동을 짧게 리뷰했다.
듣기에 따라서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임에도 한진영은 흐트러지는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정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미소를 띠었다.
“자네가 성우와 동기라고?”
“네.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군.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사람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아.”
“칭찬이라고 듣겠습니다.”
“이번엔 진짜 칭찬이니까 편하게 들어도 되네.”
“감사합니다.”
한진영이 고개를 숙이자 이정훈이 손을 맞잡은 뒤 한진영이 내민 종잇조각을 향해 턱짓했다.
“자 그럼 선물이 뭔지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이게 뭔가?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것 같은데…….”
“5억 불 짜리 선물이 담겨있는 전화번호입니다.”
“뭐? 얼마라고?”
“5억 불 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지금까지 웃고 있던 이정훈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