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42화 (42/650)

42화 계속 지켜보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진영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이정훈은 한진영이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한진영의 말이 너무나도 황당하기만 했다.

“그 종이가 5억 불짜리라고?”

한진영은 의심이 한가득 담긴 이정훈의 눈을 보고 말했다.

“최근에 호주에 있는 철광석 회사들이 합병을 진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정훈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지?”

“세계 2위와 3위 회사들의 합병으로 이게 성사가 된다면 철광석 가격이 요동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래서 세계 철강회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호주 업체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스치듯이 들은 게 아닌 것 같구먼.”

이정훈의 놀람은 상상 이상이었다.

철강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들만이 알만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한진영과 같은 피라미들은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한진영은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이자 미래였던 곳에서 두 업체의 깜짝 합병 발표로 철광석 가격이 요동쳤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는 이정훈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합병은 진행될 겁니다. 앞으로 한 달 내에 긴급으로 타결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절대 그럴 일이 없어. 자그마한 회사들도 아니라 철광석 생산량 세계 2위와 3위 업체야. 그런 곳이 긴급으로 합병이 진행된다고?”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급히 손을 들어 휘두르며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쉽게 결론이 나는 일이 아니야.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

“호주 정부는 자국의 철광석 회사가 한 군데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회장님도 그건 알고 계시는 사실 아닙니까?”

이정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가만히 모았다.

깊은 고민이 보이는 모습이 마냥 한진영의 말이 틀렸음을 주장하기에는 자신이 없는 듯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드러난 것이 없는 일이라는 회장님의 말씀대로 외부에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회장님도 제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모르는 일 때문에 미리 철광석을 준비하던 회장님의 모습도 우스워질 테니까요.”

“그것도……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습니다.”

“숨기지 않고 바로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우리 움직임이 그만큼 허술했다는 이야기인가?”

이정훈이 고개를 돌려 김 비서를 바라봤다.

분명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은밀히 지시를 내렸던 일이었다.

김 비서는 송구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이정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탓하지 마십시오. 제 정보력이 더 뛰어나서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정보력?”

“주식쟁이들이 하는 일이 이런 일입니다. 세상 모든 곳에 귀를 열어놓고 들어오는 이야기들을 잘 정리하는 일이 바로 저희가 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회장님도 정확하게 모를만한 일도 알고 있는 겁니다.”

“아직 신입 딱지도 제대로 떼지 못한 자네의 말을 내가 믿어야 하는 건가?”

“신입 딱지도 떼지 못하는 제가 물어온 정보들을 회장님께서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믿고 말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 텐데요.”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았다.

이성우가 삼덕빌딩 이야기를 꺼낼 때 함께 꺼냈던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고 김 비서를 통해 한진영을 조사했던 이정훈이었다.

이제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업적이랄 것이 없는 친구였지만, 그가 해낸 일은 도저히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성우가 한진영을 소개할 때 들었던 말이 친구를 위하여 허풍을 떤 거로만 생각 들었던 이정훈은 오히려 모지리 이성우가 한진영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진영은 말이 없어진 이정훈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톤당 50불에 천만 톤을 준비했습니다.”

“톤당 50불? 천만 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정훈의 비서가 놀란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한진영의 말을 따라 했다.

말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비서가 급히 자기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정훈은 슬쩍 비서를 돌아본 후 한진영에게 말했다.

“톤당 50불에 천만 톤을 구했다고? 그게 얼마인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인가?”

“조금 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5억 불어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5억 불어치를 어떻게 준비했다는 이야기인가? 우리 1년 소모량이 500백만 톤이야. 그런데 2년 치 물량을 자네가 구했다고? 그것도 시중 가격보다 20%나 할인된 가격으로? 무슨 돈으로? 어떻게?”

“제 돈으로 구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5억 불을 주고 샀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구했다고 했지요.”

“그게 무슨 차이란 말인가?”

이정훈은 점점 늪과 같이 한진영의 말속에 자기가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믿을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아들의 친구라는 놈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에 마련한 자리였다.

물론 한진영이라는 녀석이 똘똘하다면 성우와 잘 지내보라는 뜻으로 몇 푼쯤 투자금으로 던질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이정훈의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한진영의 혓바닥에 휘둘리며 한진영의 입을 바라보고만 있는 이정훈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이 꺼낸 선물이라는 것이 너무나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정훈의 표정을 보고 이미 넘어왔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편안한 모습으로 쪽지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브라질 바레와 철광석을 매수하는 것에 대한 우선협상권을 얻었습니다. 이 전화번호가 그 협상권을 획득한 곳의 전화번호입니다.”

“우선협상권? 정말인가?”

“그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보시면 가능한 일이지요.”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김 비서에게 손을 들어 확인해보라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브라질 놈들이 그렇게 쉽게 가격을 깎아주는 놈들이 아닐 텐데?”

“호주의 두 철광석 회사가 합치면 철강회사들만 피해를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쩌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곳이 이제껏 선두에 서서 시장을 호령하던 1등 업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진짜로 합병이 된다면 말이야.”

“진짜로 합병을 하니 브라질 업체가 우선협상권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한진영 말에 이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뒤에서 이정훈의 지시로 브라질 바레의 우선협상권에 관한 이야기를 확인한 김 비서가 이정훈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천만 톤에 관한 우선협상권이 국내 업체에 넘어갔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국내업체?”

이정훈은 한진영을 지그시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의 시선을 받으며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프라임 리츠라는 곳입니다. 부동산 회사이지요.”

“부동산 회사가 철광석에 대한 우선협상권을 취득했다고? 부동산 회사가 왜? 아니. 어떻게?”

이정훈은 한진영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자기 상식선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나 쉽게 한진영의 말속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혼란스러워하는 이정훈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회장님. 저희 같은 주식쟁이나 부동산쟁이가 정보에 가장 목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인맥에 대한 갈망과 쓰임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저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동산 회사가 자기 인맥을 동원하여 브라질 철광석 업체와 줄을 댔다는 말인가? 이유는?”

“이유야 뻔하지 않습니까? 기풍철강과 줄을 대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공장부지 때문인가?”

이정훈은 그제야 모든 것이 확연히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진영이 부동산쟁이라고 낮추어 말했지만, 리츠회사는 엄연한 투자회사로 그중에서도 프라임리츠는 손에 꼽히는 인맥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전 세계에 줄을 대고 있었으며, 그 줄을 이용하여 브라질 쪽에 접근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우선협상권을 통해 기풍철강의 새로운 공장부지를 프라임리츠가 보유한 땅으로 낙점받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진영은 말없이 그윽이 웃으며 쪽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처음 소파에 앉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이정훈 앞에서 다리를 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에게 무얼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정훈은 가만히 한진영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웃던 이정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 비서가 이정훈에게 코트를 건넸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이제 나가보겠다는 듯한 모습의 이정훈이었다.

이정훈은 김 비서가 잡아주는 코트를 입으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프라임리츠에서 자네에게 뭘 해주겠다고 하던가? 나와 연결해주는 조건으로 말일세.”

“예치금 금액을 50억으로 늘려준다고 하더군요.”

“그래? 좋아. 그럼 나도 거기에 맞춰 넣어주지. 단, 기풍철강의 이름이 아닌 나 이정훈의 이름으로 들어갈 거야.”

“아버지.”

지금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성우가 급히 이정훈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너는 뭐?”

이성우는 이정훈의 인상 쓰는 모습에 고개를 푹 숙였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 자기에게 펀드 하나 가입한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위에서는 은근히 기풍철강의 아들이니 큰 거 하나 물어오지 않겠냐는 기대를 하는 듯한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라 이성우는 회사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김 비서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도와주는 바람에 근근이 체면은 차리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한진영을 향해 50억을 집어넣는다니 이성우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내가 너한테 10원 한 장 넣지 않아 섭섭한 거냐?”

이성우는 대답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잘했어 봐라. 50억이 아니라 500억은 물론이고 이 기풍철강도 네 것이 됐을 테니 말이다. 에이~”

말을 하며 점점 기분이 잡쳤다고 느꼈는지 이정훈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진영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재미있었어. 오랜만에 젊음의 패기를 느껴 나도 한 3년은 젊어진 느낌이야.”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내가 자네에게 돈을 집어넣는다는 건 자네를 계속 지켜보겠다는 뜻이야. 알고 있지?”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좋아. 기대하지.”

이정훈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을 막아 세웠다.

“잠시만요. 회장님. 설마 저에게 50억을 예치한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하하하. 이럴 것 같아서 빨리 도망가려 한 건데…… 잡혔군그래. 좋아. 말해보게.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회장님 이름을 한번 팔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 이름을 판다고? 재미있는 친구구먼. 내 이름을 어디다 쓰게?”

“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쓰려 합니다.”

“하하하.”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궁금해서라도 자네 부탁을 들어줘야겠구먼. 단, 내 이름을 판 뒤에 어디에 팔았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하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정훈은 다시 한번 크게 웃은 뒤 몸을 돌려 나갔다.

김 비서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쪽지를 집어 든 뒤 인사를 하고는 이정훈의 뒤를 따랐다.

한진영은 떠난 이정훈의 뒷모습을 보고는 전화기를 들어 김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한진영입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목소리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한진영은 그런 김영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30억. 서류 들고 조만간 회사에 방문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잘됐군요. 감사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오셔도 될 만큼 준비가 다 끝난 상태입니다.

“하하하. 저도 바쁘니까요. 가기 전에 먼저 연락 드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진영은 전화를 끊고 여전히 서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성우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 피곤했으니 소주나 한잔하자.”

“소주?”

“그래. 나가자.”

한진영은 이성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주말이라 한산한 여의도 거리를 지나 자그마한 술집으로 들어간 둘은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시켰다.

술이 나오자마자 한진영은 뚜껑을 따서 먼저 이성우의 잔에 술을 채워줬다.

“속상하냐?”

“속상하냐고?”

술잔에 따라지는 술을 내려다본 이성우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까 항상 있었던 일이라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한진영은 비워진 자기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네가 그래서 회장님에게 계속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거다. 새삼스럽지도 않다니…… 생각이 잘못됐어.”

“뭐라고?”

한진영은 술이 채워진 술잔을 들었다.

이성우도 한진영의 모습에 맞춰 자기 술잔을 들어 잔을 부딪쳤다.

한진영은 단숨에 술을 꺾어 마신 후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네가 신성증권에 왜 들어왔는지 아냐?”

“왜라니? 내가 신성증권에 들어간 이유가 있다는 말이야?”

“그럼 네가 아무 이유 없이 회장님이 너에게 신성증권에서 일하라고 했다고 생각한 거야? 기풍철강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곳에서? 너의 커리어에 도움도 되지 않는데 3년 동안이나 이곳에 있으라는 게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급히 자기도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유가 뭔데?”

“네가 신성증권에 들어가면 공식적으로 신성증권을 들여다봐도 되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들을 위한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은 거라고 남들에게 이야기하기가 좋지 않겠어? 회장님은 그걸 이용해서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신성증권을 들여다본 거야. 이걸 인수해도 될지 안 될지 판단하기 위해 말이지.”

“신성증권 인수? 아버지가 신성증권을 탐냈었다고?”

이성우는 처음 듣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