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가는 길에 네가 있을 뿐이다
한진영은 비어있는 이성우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성우는 잔을 잡아 술을 받은 뒤 술병을 건네받아 한진영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둘은 말없이 그렇게 술을 나눠 마셨고 마침 나온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한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느끼기에는 회장님이 어떠신 것 같냐? 주식시장에 관해서 말이야.”
“싫어하시지. 얼마나 싫어하시는데. 그러니까 삼덕빌딩에서 우리가 강연회 하기 전까지 누구도 행사하지 못한 거지.”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회장님이 너한테 그리 대하는 거다. 그렇기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니까?”
“네 말은 그럼 아버지가 주식시장에 관심이 있다는 거야?”
우물거리면서 나온 안주를 먹는 한진영에 비해 이성우는 젓가락도 들지 않았다.
한진영을 통해 자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휴지로 입에 묻은 음식을 닦아낸 후 이성우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 앞에서 어떻게 했냐? 괜히 괴롭히고, 놀리고, 머리 잡아당기고 하지 않았어?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 아버지이자 기풍철강의 회장이신 이정훈 회장님이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관심이 있으면서도 싫은 척 행동했다는 말이야?”
“맞아. 내 말이 그 말이야.”
한진영은 다시 술잔을 들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단숨에 술집에 온 지 10분이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소주 한 병을 비운 두 사람은 다시 술을 시켰다.
평소 이성우라면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을지도 몰랐다.
조금 더 갖춰진 곳에서 좋은 술을 마시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허름한 나무 탁자에 좁고 음침해 보이는 실내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게 이성우에게는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성우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은 채 술잔을 계속 기울였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아버지의 진심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었다.
“아까 아버지랑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이 그 말이야? 나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그래. 네가 알고 있었다면 아버지를 돕는 모습을 보였을 텐데 너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그저 귀찮은 곳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것에 짜증 내며 그냥 시간이 흐르기만 바라고 있었지. 그러니 회장님 눈에는 얼마나 한심스러워 보였겠냐? 뭐 결국 신성증권이 회장님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인수 이야기는 물 건너가 버렸는데…… 너는 계속 신성증권에 있지 않냐? 원래대로였다면 일이 틀어진 마당에 너도 있을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야.”
“나는…….”
이성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부끄러운 자신을 감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무슨 시간?”
“회장님의 마음을 돌릴 시간. 후계 구도가 정해지지는 않았잖아.”
이성우는 목이 말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술잔을 거칠게 들어 마신 이성우는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네가 위에 앉혀준다는 말이 그냥 입에 발린 말인 줄로만 알았어.”
“내가 왜? 돈 많은 부자 친구에게 알랑거리기 위해?”
“……솔직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웃기네. 너 인마 지금 당장은 네가 회장님에게서 받은 게 많아 나보다 돈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너 넘어서는 데 얼마가 걸릴 거 같냐? 당장 오늘 올린 실적에 앞으로 얻는 수익을 더하면 네가 가진 것 넘어서는데 일이 년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그런데 내가 왜 너에게 잘 보이려 하겠어?”
“그러게 말이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성우는 술병을 들어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또 술을 꺾어 마셨다.
그리고 약간은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을까?”
“힘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거야. 네가 아버지에게 낙점받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다가는 모든 걸 다 놓치고 말 거다.”
“나는…… 아버지에게 밉보인 게 많아. 네가 봐서 알겠지만, 아버지 눈에 한참 모자라게 보일 거야.”
“어제 내린 비에 옷 젖는 걸 걱정하지 말아라.”
한진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성우의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기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내가 널 위에 앉혀준다는 말. 이건 농담이 아니다. 대신 너는 나를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너 믿지. 내가 너를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어.”
“아니. 그 정도로 믿어서는 안 돼. 내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고 땅이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너는 저 하늘이 땅이 되어야 하고 네가 밟고 있는 곳이 하늘이라고 생각해야 해. 할 수 있겠어?”
이성우는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그리고 술잔을 잡은 채 한진영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의심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내가 왜 너를 위에 앉히려고 하는 게 궁금하지?”
이성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든든한 조력자가 생기는 데 내가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게다가 오늘처럼 너를 위에 앉히는 과정에서 나는 돈도 벌 수 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기풍철강을 손에 넣으면 너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게 되지. 너의 인맥과 정보 그리고 정부와의 새로운 접촉 루트까지…….”
“너…… 그냥 신성증권에서만 끝낼 생각이 없구나?”
“네가 위로 올라가려 하듯이 나도 위로 올라가려 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를 기풍철강의 맨 꼭대기에 앉혀주겠다는 거고…… 오해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좋아하거나 너를 도와주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 내가 가는 길 위에 네가 있었을 뿐이라는 거 명심해.”
“진영아.”
이성우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한진영을 와락 껴안았다.
“왜 이래? 너 취했냐?”
짧은 시간 안에 연거푸 술을 들이켰기에 술에 취할 만도 했다.
그러나 취하고 보이는 주사가 남들 보기 민망한 것이라 한진영은 어떻게든 이성우를 떼어내려 했다.
“야야.”
한진영이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이성우는 한진영을 꼭 끌어안았다.
“네가 말은 그렇게 해도 나를 걱정해서 도와준다는 거 잘 알아. 그리고 너는 네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내가 네 말만 잘 따르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아. 진영아. 너밖에 없다. 정말 고마워. 난 너 없으면 못살 거 같아. 너뿐이야.”
“알았으니까 이거나 좀 놓고…….”
한진영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 이성우와 뿌연 조명이 이상한 실루엣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자그마한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한진영이 있는 곳을 흘깃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 쫌.”
“진영아. 사랑해.”
“이 미친…….”
한진영은 모이는 술집 손님들의 시선과 불편해하는 주인의 시선을 느끼며 난감해하기만 했다.
***
최준호 지점장은 아침부터 싱글벙글한 얼굴로 지점 안을 돌아다녔다.
객장에 자주 와서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처음 방문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까지.
시흥지점에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듯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이 쉬어가는 날인가 보네요?”
“어이구. 장 사장님. 오늘도 오셨네요? 어떠세요? 그거 봐요.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 종목은 못 간다니까요. 그러니까 이제 슬슬 저희에게 맡기세요. 그리고 그만 신경 쓰지 말고 사모님하고 좋은 곳이나 놀러 다니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 순시만 돌고 지점장실로 들어갔을 만한 시간인데도 최준호 지점장은 뒷짐을 진 채 지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점장님.”
그런 최준호 지점장 곁으로 시흥지점의 안살림을 도맡아 진행하는 김미진이 찾아왔다.
최준호는 김미진을 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떻게 준비할까요?”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그냥 평소대로…… 전과 다름없이…… 원래 우리가 하던 대로…… 내가 하는 말 알지?”
김미진은 가만히 최준호 지점장을 바라보다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미진이 최준호 지점장의 지시를 받아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주변 꽃집을 몇 군데를 수배하여 꽃을 들였다.
회의를 진행할 회의실 주변에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그림들이 걸리기 시작했으며 간단하게 다과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먹거리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을 확인하고 몇 가지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정리한 서류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준호 지점장에게로 갔다.
“무슨 일이야?”
한참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서류와 가방을 들고 찾아온 한진영을 보고 최준호 지점장이 물었다.
한진영은 서류를 최준호 앞에 보이며 말했다.
“프라임 리츠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프라임 리츠?”
“네. 프라임 리츠에서 직접 와서 지난달에 있었던 거래내역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서요.”
“그래? 그럼 설명해 줘야지. 50억이나 집어넣은 큰 고객이신데 설명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서 해야지. 그런데…….”
최준호는 고개를 돌려 김미진이 한창 준비하고 있는 회의실을 한번 쳐다본 후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좀 곤란하다고 말씀드려.”
“오늘은 안 된다고 하라고요?”
“오늘 말고 내일. 그래. 그게 좋겠다. 내일 나도 같이 가겠다고 말씀드려.”
“지점장님이 가실 필요는 없어요. 저만 가면 됩니다.”
“아니야. 오늘 오라는 거 내가 막았으니 당연히 나도 가서 인사드려야지. 그러니까 어서 말씀드려. 오늘은 안 된다고…….”
최준호는 어서 연락하라며 한진영의 등을 밀었다.
한진영은 서류를 든 채 최준호에게 밀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최준호와 김미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왜 그래?”
최석영이 고양이처럼 몰래 찾아와 한진영의 곁에서 한진영을 따라 최준호와 김미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지점장님이 안 보내주지?”
“쉽게 보내주지는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단박에 끊어내실 줄은 몰랐네요.”
“안 보내주지. 오늘만 기다리셨던 분인데 자네를 보내주겠어?”
“그래도…….”
한진영은 최석영에게 고개를 돌려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최석영은 그런 한진영의 마음을 아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자네나 나나 지점장님 곁에 서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지점장님 삐친다.”
한진영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최준호의 표정을 보고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최준호 지점장이 오늘 왜 이렇게 즐거워하는지 알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경기남부권역 지점장 회의가 오늘 이곳 시흥지점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지점장 회의가 열리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던 최준호 지점장이었다.
높아진 관심과 몰려오는 고객들에 비해 늘어나지 않던 실적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은 지난 강연회 이후 싹 사라졌다.
오히려 빨리 지점장 회의를 했으면 싶을 정도로 최준호 지점장은 오늘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어이구. 최 지점장.”
가장 먼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안양 지점장이 지점 안으로 들어오며 최준호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최준호도 그런 안양 지점장의 손을 잡아 악수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즘 시흥지점이 그렇게 잘된다며?”
오자마자 안양 지점장은 시흥지점을 둘러봤다.
빼곡히 사람들이 앉아있는 창구부터 시작해서 상황판 앞에 놓인 의자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 객장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흥지점이었다.
그는 부러운 눈을 숨기지 않은 채 최준호를 향해 말했다.
“실적도 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어.”
“그냥. 소소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150억 정도 했지요.”
“뭐? 얼마를 했다고?”
안양 지점장은 최준호의 손을 잡은 채 크게 놀란 눈으로 최준호를 바라봤다.
최준호는 그런 안양 지점장의 시선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십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냥 소소하게 한 거예요.”
“소소? 150억을 했다며? 최근에 그 정도를 한 지점이 우리 회사에 어디 있나 싶을 정도인데? 150억이면 신성증권을 떠나 전국 톱 아니야?”
“그냥 뭐…… 하하하.”
최준호는 즐거운 듯이 크게 웃고는 한진영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했다.
한진영 곁에 서 있던 최석영에게도 한진영과 함께 자기에게 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안양 지점장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가자. 오늘은 지점장님 기분 좀 맞춰드려.”
“그래야죠. 이럴 거 같아서 불편해서 나가려고 했던 건데…….”
한진영이 최준호에게 다가가자 최준호가 한진영과 최석영을 양손으로 껴안으며 안양 지점장에게 소개했다.
“이 친구 아시죠? 요새 바쁘게 방송에 나오는…….”
“알지. 최석영 과장 아닌가? 만나보고 싶었어요.”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양 지점장님이 호인이시라는 이야기를요.”
“하하하. 호인은 무슨…….”
안양 지점장은 기분 좋게 최석영과 인사를 하고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친구를 왜 최준호가 끌어안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최준호는 그런 안양 지점장에게 일부러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진영을 꽉 끌어안고 소개했다.
“이 친구가 우리 지점의 보배입니다.”
“그래? 누구인가?”
“지난달에 저희 지점이 해낸 150억의 실적 중에 이 친구 혼자 100억을 했습니다.”
“아~ 이 친구가 그 유명한 친구야?”
한진영을 소개받은 안양 지점장은 구애의 눈빛을 한진영을 향해 노골적으로 쏘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