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바뀐 규정
안양 지점장은 덥석 한진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뜨거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보고 싶었어요. 한진영 씨. 혹시 우리 지점에 올 생각은 없어요? 우리 지점으로 온다면 내가 좋~은 자리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한진영은 다짜고짜 영입 제안을 해오는 안양 지점장의 모습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진영의 미소가 다 지워지기 전에 뒤에서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강 지점장님. 그러시면 안 되죠. 한진영 씨는 우리 지점으로 데리고 갈 겁니다.”
“무슨 소리. 우리 지점에서는 이미 한진영 씨가 앉을 의자까지 특별히 주문 제작 넣어놨어. 한진영 씨. 오늘 회의가 끝나면 나와 함께 갑시다.”
시흥지점으로 막 들어오는 경기지역 지점장들이 서로 한마디씩을 건네왔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하나 인사했다.
오늘 회의 주제를 사람들은 잊은 듯 보였다.
마치 자기네 지점으로 한진영을 데리고 가는 것이 오늘 시흥지점에 온 이유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
지점장들은 한진영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진영은 도와달라는 뜻으로 최준호를 바라봤다.
이런 일을 예상하여 이곳을 나가려 했던 한진영이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한 달에 100억을 해낸 직원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의 기대와 달리 최준호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런 광경을 즐기는 듯이 한 걸음 떨어져 한진영을 향한 지점장들의 구애를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최준호 드디어 나섰다.
“여기서 이러지들 마시고 나머지 이야기는 들어가서 마저 하도록 합시다. 자자. 들어갑시다.”
최준호가 한진영의 손목을 붙잡고 지점장 회의가 진행될 회의실로 향하자 사람들이 한진영의 꼬리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마치 어미를 따르는 아기 새들처럼 일렬로 움직이는 모습이 웃음을 안겨 줄 정도였다.
회의실에 최준호를 따라 들어온 한진영은 이제 나가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최준호는 회의실에 들어와서도 한진영을 놔주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가려고 인사를 하려는 한진영을 막아 세운 최준호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미진을 향해 눈짓했다.
“미진 씨. 지금 하자.”
“네.”
한진영은 무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 최준호를 돌아봤다.
뭘 하자는 거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김미진이 한진영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최준호의 지시를 받은 김미진은 상패를 들고 최준호를 찾아온 것이었다.
한진영은 상패를 보고 나서야 최준호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이리 와.”
최준호가 한진영을 자기 곁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자기 앞에 한진영을 세운 후 김미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진영은 그제야 머리 위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축 100억 예치금 달성]
“귀하의 열정적인 영업으로 예치금을 100억을 달성했기에 감사패를 드립니다. 신성증권 시흥지점 최준호 지점장.”
최준호는 상패를 들어 웃는 얼굴로 한진영에게 내밀었다.
한진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패를 받자 플래시 세례가 연신 터졌다.
“웃어. 웃어. 웃어야 사진 잘 나와.”
최준호는 한진영에게 웃을 것을 말한 후 앞을 보고 하얀 이가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아직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지점장들을 불렀다.
“와서 뒤에들 서세요. 다들 같이 한 장 박자고요.”
지점장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김미진이 그들을 최준호와 한진영의 뒤에 세웠다.
“자 다들 웃으세요.”
김미진이 카메라 옆에서 웃으라며 자기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김미진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김미진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는 얼굴을 보였고, 그때 사진기 플래시가 다시 한번 터졌다.
“아이고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미진 씨도 고생했어. 그리고 우리 한진영 씨는…….”
최준호는 양복 가슴 깊은 곳에 들어 있는 봉투를 몇 개를 꺼냈다.
“이건 회사에서 주는 격려금이고…… 이건 내가 주는 금일봉…… 그리고 이건 우리 지점에서 주는 식사권…… 내가 확인해보니까 회사에서 격려금이 생각보다 조금 나왔어. 그래서 내 돈도 조금 보태서 넣었으니까. 너무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하하하.”
한진영은 최준호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며 헛웃음을 흘렸다.
“감사패는 지점장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고요?”
“그럼. 알잖아. 우리 회사가 좀 쪼잔하지 않냐? 그래서 감사패도 내가 직접 만들었지. 그리고 이런 자리를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사진을 찍은 거니까 사진 나오면 보라고. 다들 사진 나오면 확인하러 한번 오세요. 여기 계신 분들 얼굴 모두 나오게 뽑을 생각이니까요.”
사람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직접 준비한 시상을 단번에 해치운 최준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한진영은 이제서야 놓아주는 최준호의 손을 떠나 회의실을 나왔다.
회의실 앞에서는 김미진이 나오는 한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미진 씨께서 더 고생하셨겠네요. 지점장님 장단 맞춰주시느라고요.”
“지점장님께서 얼마나 기대하고 계셨는지 몰라요. 다른 지점장님들 앞에서 상패하고 격려금 주는 상황을 연출하시겠다고 어제부터 저하고 사진 찍는 분하고 구도 잡고 그러셨다니까요.”
“어지간히도 다른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으셨나 봐요.”
“그러신 것 같아요. 그러니 사진 액자도 1미터 이상 짜리로 뽑으라고 하셨죠.”
“네? 얼마라고요?”
김미진은 손을 펼쳐 사진 뽑을 액자 크기를 한진영에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벽면을 다 채우라고 하셨어요. 그걸 그나마 줄인 게 1미터예요.”
한진영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저었다.
***
지점 영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약정을 얼마나 치느냐였다.
여기서 말하는 약정이란 매수 매도 거래금액의 합을 이야기한다.
1억의 예치금이 들어있는 계좌에서 1억 치 주식을 사고판다면 2억의 약정을 한 것이었다.
만약 이런 거래를 오프라인 고객이 했다면 수수료 0.5%의 적용을 받아 증권사는 수익 100만원을 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약정을 얼마를 쳤냐가 회사는 물론이고 직원의 실적에 직결되는 것으로 회사에서는 약정에 관한 압박을 심하게 가하고는 했다.
“이번에 강연회에서 고객들 모으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나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번에 고객 모으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냐?”
“과장님은 약정 얼마나 하신 거예요?”
“나? 나 이번 달에 50억 했어. 너는 얼마나 했어?”
“저는 이번 달이 신기록이에요. 30억이요.”
“너나 나나 엄청 많이 했구나. 이게 다 강연회 때 덕분이기는 하다. 이런 상황을 비껴갈 수 있었으니 말이야.”
“강연회 때 고객 모으지 못했으면 저는 진짜 바뀐 규정에 목이 날아갈 뻔했어요.”
이성우는 목을 만지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물었다.
“네가 왜 걱정하냐?”
“왜? 성우는 어디 믿을 곳이라도 있어?”
한진영의 말에 최석영이 음료수를 마시던 빨대를 문 채 물었다.
이성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제가 어디 믿을 곳이 있겠어요? 그냥 이 녀석이 괜한 말한 거예요. 야! 과장님 오해하시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해.”
“왜 이래? 너무 그러니까 이상하다. 이야기해봐. 믿을만한 곳이 어딘데? 혹시 집이 부자야? 그냥 이야기해도 돼. 다 같은 입장에서 내가 자네 집을 내 고객으로 만들겠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성우가 최석영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진영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한진영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화제를 다시 조금 전의 이야기로 돌렸다.
“그래서 바뀐 규정이 뭐야?”
“어? 그래.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급히 반응한 뒤 조금 전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약정 수익 기준을 기본급의 4배로 올리겠다는 거야.”
“4배? 미쳤네. 기존 배수가 3.3배였는데 그걸 4배로 올린다고? 아니 뭔 올린다고 하면 다 실력이 늘어서 올릴 수 있는 줄 아나. 어휴…….”
최석영이 이성우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기존의 3.3배도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줄이지는 못할망정 더 늘려 버리고 만 것이었다.
“작년 거래대금이 늘었다는 게 핑계예요. 아니. 나 참. 작년에 거래대금이 는 건 폭락장 속에서 나온 거래대금 증가 아니야? 그런데 그걸 왜 늘었다고 기준을 높여. 그것도 3.5배도 아니라 어떻게 한 번에 4배로 올리냐?”
모여있는 사람 중에 최석영이 가장 불만이 많은 듯 보였다.
그만큼 회사를 오래 다녀 회사에 쌓인 분노가 많았기 때문이다.
“4배면 약정을 얼마를 쳐야 한다는 소리야?”
“250을 받는 사람이라면 오프라인 수수료 0.5% 기준으로 20억은 쳐야 천만 원이 나오네요.”
“미친. 그게 기준이라는 거 아냐? 20억 이상을 쳐야 한다는 거잖아.”
“그렇죠. 그 이상을 쳐야 회사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죠.”
“돌겠네. 성과급 기준은?”
“8배를 넘기는 수준에서 수수료 30%요.”
“40억? 250을 받는 자네 같은 친구들도 40억을 넘겨야 성과급이 나온다고? 와~ 이런 날도둑놈들.”
최석영은 이성우의 말이 믿을 수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슬며시 한진영을 돌아봤다.
“진영아. 너는 괜찮냐?”
“맞다. 이렇게 되면 너 성과급 장난 아니게 깎일 텐데…….”
이성우도 한진영이 떠올랐는지 한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너 이번에 약정 얼마나 했어?”
이성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진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실적을 묻는 것이 실례인 줄 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해 물어본 것이었다.
“나 이번 달에 130억 정도? 그쯤 되는 것 같다.”
“뭐? 130억? 와~”
이성우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한진영의 실적을 말하고 말았다.
최석영은 급히 이성우를 향해 눈치를 줬다.
아직 회사에 있는 만큼 다른 사람이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이성우가 자기가 실수한 것을 깨닫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럼 네가 보는 손해는 얼마나 되는 거야?”
“제 기본급이 200만 원쯤 되니까. 8배수면 1,600만 원. 오프라인 고객 수수료율 0.5% 기준으로 따지면 32억이 성과급 라인쯤 되겠네요.”
“130억을 했으니까 초과는 대략 100억을 했다고 치고…… 성과급은 100억의 수수료 5,000만 원의 30%인 1,500만 원? 그럼 그 전 규정으로는?”
“그전 규정이 성과급 라인이 6배였죠? 성과급 라인도 24억으로 훅 낮아지는 데다 성과급도 수수료의 50%까지 나왔었으니 2,600만 원쯤 나왔겠네요.”
“얼마가 빠지는 거야? 기존 성과급에서 40%가 훅 날아가 버렸다는 거 아냐? 그것도 한 달에만 1,000만 원이 넘는 돈이 날아가고 분기로 따지면 3,000만 원이 넘게 날아갔다는 거야? 와~ 너 열받겠다.”
자기 이야기가 아닌데도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이성우였다.
3,000만 원이라면 웬만한 직원의 연봉이 날아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분기에 3,000만 원이었다.
1년으로 따지면 1억이 넘는 돈이 규정이 바뀌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거였다.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된 것처럼 화가 나 있는 이성우에 비해 한진영은 크게 화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고, 이후의 회사 대처 또한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에게 지금의 일이 오히려 좋은 일로 다가올 게 분명했다.
회사가 오히려 한진영 같은 사람을 더욱 우대해준다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기억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있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았냐? 돈도 돈이지만 우리 같은 직원들에게 치명적인 이야기 있잖아.”
“아~아. 있어. 있어.
한진영의 반응을 기다리던 이성우는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쳤다.
최석영은 이성우의 반응에 놀란 눈으로 물었다.
“뭐가 또 있어?”
“있어요. 정말 중요한 거요.”
“중요한 거 뭐?”
“기준을 3달 연속 넘기지 못하면 퇴사해야 한다는 거예요.”
“하아~”
최석영은 이성우의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우의 말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다 빨아먹어 빈 공기음만 들리는 빨대를 물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리고 한진영의 얼굴을 바라본 채 말했다.
“다시 한번 느낀 거지만 내가 정말 진영이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저도요.”
“너는 믿을 구석이 있다며?”
“그거 얘가 그냥 농담처럼 한 말이에요. 제가 믿을 구석이 있다면 어디 있겠어요?”
최석영은 이성우의 허술해 보이는 변명이 눈을 찌푸리고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이성우는 괜히 다른 곳을 보며 최석영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들어가시죠.”
다 마신 음료수를 쓰레기통에 버린 한진영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지점 안에서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바뀐 규정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김미진이 직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지점장님께서 회의실로 다들 모이시래요.”
김미진의 말에 직원들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최준호 지점장이 직원들을 모으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