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나는 더 큰 고객을 알고 있다
한진영의 말을 들은 이후 최석영은 일부러 박기수에게 다가갔다.
“차장님.”
“최 과장님이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차장님하고 이야기나 나누려고 찾아왔지요.”
“나하고? 자네하고 짬짜미 먹은 친구들은 저쪽에 있잖아.”
박기수가 턱짓으로 한진영과 이성우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최석영은 박기수의 턱짓에도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차장님. 짬짜미라니요? 그냥 서로 공생하는 사이지요.”
“공생? 자네가?”
박기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장님.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기는? 집에 가야지. 난 누구처럼 고객도 많지 않아서 장 끝난 뒤에 회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
“차장님.”
최석영이 급히 나가려는 박기수를 쫓아갔다.
“그러지 마시고 오랜만에 술 한잔 어떠세요? 소주나 한잔하시죠?”
“자꾸 귀찮게 왜 이래? 내가 자네하고 술을 왜 마셔?”
박기수가 귀찮다는 듯이 최석영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빠르게 사무실을 나가며 최석영이 쫓아오지 못하게 했다.
최석영은 멀어지는 박기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함께하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그 정도가 아니야. 나를 뭐 아주 벌레 보듯 취급한다.”
최석영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꼭 친해져야 하냐? 저 사람 볼 것도 없어. 다른 곳하고 다르게 주식판에서는 오래 남아있다고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능력 되는 사람들은 IMF와 지난 서브프라임 때 한몫 단단히 챙겨서 떠났다고요.”
“그래. 그땐 완전 노다지였다고 하더라.”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시절이었겠지만 다른 사람 특히 주식판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IMF와 서브프라임 같은 사건이 기회로 다가오고는 했다.
거대한 풍랑 속에서 살아만 남는다면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 차장은 그 힘든 시기를 모두 겪고도 아직도 회사에 남아있는 것이 커다란 수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듯했다.
그저 생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수익과는 별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 박기수 차장이었다.
“살아남는 것도 능력 중의 하나지요. 할 수 없어요. 과장님. 내일도 부탁드려요.”
“내일도?”
“제가 직접 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저하고 차장하고는 직급 차이가 상당하잖아요. 제가 박 차장에게 다가가면 과장님보다 더 이상한 의심을 받을걸요.”
“꼭 해야 하는 거지?”
“네. 꼭 해야 해요.”
최석영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결심한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할 수 없지 뭐.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최석영은 무언가를 찾아낸 듯이 보였다.
한진영이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여 최석영에게 물었다.
“방법이 있어요?”
“방법? 하나 있어. 있는데…….”
최석영은 덥석 한진영의 손을 잡았다.
“네가 꼭 와이프한테 이야기 잘해줘야 해.”
“네?”
“나는 가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네가 시켜서 간 거라고 말이야.”
“표정이 전혀 가고 싶지 않은 사람 같지가 않은데요?”
말은 가고 싶지 않다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건지 눈이 웃고 있었다.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 게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좋아서 웃음이라도 터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급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가고 싶다니. 나는…… 그런데 가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이게 다 네가 시켜서 가는 거야. 어. 쩔. 수. 없. 이. 박기수 차장을 꼬이기 위해 하는 숭고한 희생? 뭐 그쯤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말을 듣고 최석영이 무얼 할 꿍꿍인지 알게 됐다.
소주는 싫다고 하지만 아가씨가 나오는 술집을 좋아하는 박기수.
최석영은 그곳에서 박기수에게 술을 사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쪽 분야의 고수를 잘 알고 있었다.
한진영의 손짓에 자리에 온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왜 불렀어?”
한진영은 이성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최석영에게 말했다.
“이 친구 데리고 가세요. 그쪽으로는 이 친구가 전문이니까요.”
“어? 뭐가? 뭐가 전문인데?”
이성우는 한진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최석영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
한진영이 이성우와 최석영에게 부탁했던 것은 박기수와 좋은 곳에 가서 술을 찐하게 마시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면 박기수와 친해질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박기수가 이성우와 최석영을 자기가 하려는 일에 참여시킬 거라는 것이 한진영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성우는 박기수를 자기의 단골 술집으로 초대하게 됐다.
박기수는 이름만 듣던 멤버십으로 이루어진 고급 술집 앞에 서서 이성우를 향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여기는…… 비싼 곳 같은데?”
“비싸 봤자죠. 괜찮습니다. 제가 다 이야기해놨으니 우리는 들어가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들어가시죠.”
이성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최석영이 괜찮다며 박기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기수는 입구부터 지키고 서 있는 커다란 덩치의 가드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화려해 보이는 장식들과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또 한 번 주눅 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휘둥그레 돌아갈 정도로 예쁜 여자가 찾아와 일행을 반길 때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했다.
여자는 부끄러워하는 박기수의 팔을 어루만지면서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왜 이렇게 오랜만이세요?”
이성우가 잘 아는 곳이었는지 마담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성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성우는 자연스럽게 슬쩍 마담의 허리를 감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 좋은 곳으로 준비해 놨지?”
“그럼요. 누구 분부인데요. 어서 오세요. 제가 안내할게요.”
마담의 안내를 받은 셋은 가드들의 호위를 받으며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박기수는 입이 벌어졌다.
겉에서 볼 때와 또 다른 분위기에 박기수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기 때문이다.
평소 듣기만 할 뿐 와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내 돈을 내고 온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박기수였다.
그런 곳에 지금 최석영과 이성우의 초대를 받아 오게 된 것이었다.
박기수는 민망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이성우와 한진영에게 말했다.
“아. 내가 그래도 명색이 차장인데…… 얻어먹으면 좀 그런데…….”
박기수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안면몰수하고 얻어먹기에는 부담이 되는 곳이라서 괜한 말을 꺼낸 것이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세요. 차장님. 한턱내려면 제대로 내야 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여기 단골이라 그렇게 부담되는 곳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성우도 박기수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너스레를 떨며 박기수를 편하게 만들어주려 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더는 어색해하지 말아요. 이런 곳에서는 차장이고 과장이고 다 없지 않습니까? 모두 형, 동생뿐이니 편하게 대해주세요.”
“아니. 그래도…… 내가 이렇게 얻어먹어도 되나? 싶어서 그런 거지.”
“거참. 형님! 형! 자꾸 그럴 거야? 나 섭섭하게?”
이성우가 웃으며 애교 섞인 말을 건넸다.
그러자 박기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음에도 분위기에 취하는 느낌을 받았다.
“에이. 좋다. 동생. 오늘은 그럼 내가 얻어 마실게. 다음에는 내가 살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
“거참. 아우가 형님에게 대접하겠다는데 섭섭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자자 앉아요.”
이성우가 넉살 좋게 이야기하고는 문 옆에 서 있는 새끼 마담을 향해 말했다.
“아가씨 들어오라고 해. 오늘 괜찮은 애들 좀 있나?”
“수진이 들어오라고 할까요?”
“수진이 있어? 있으면 불러야지. 그리고 바로 세팅 해. 밴드도 우리부터 넣어주는 거 잊지 말고…… 뭐 알아서 다할 테니까 믿을게. 나 잘 아니까. 내 취향에 맞게 알아서…… 어?”
“알죠. 제가 오빠 취향은 누구보다 더 잘 알잖아요.”
너스레에 너스레로 답한 여자는 조심스럽게 멤버 구성을 보고 이성우에게 말했다.
이성우가 평소 자주 함께 찾던 돈 많은 집 자제들과는 다른 모습의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술은 항상 마시던 거로 할까요?”
“잠깐만.”
이성우는 박기수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술을 사는 것은 자기지만 주인공은 박기수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형님. 로얄살루트로 시작해도 될까요?”
“어? 로얄살루트? 몇 년산으로?”
“에이. 형님. 로얄살루트에 몇 년산이 어디 있어요? 21년 산이죠. 설마 여기서 로얄살루트 38년산이나 50년산을 먹자고 그러는 건 아니시죠? 그건 아무리 저라도 사드릴 수가 없어요.”
“어. 어. 그냥. 알아서 시켜.”
사소해 보이는 것이었지만 이런 행동만으로도 박기수는 자기가 지금 자리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대로 행동하자 얼굴이 환하게 바뀐 박기수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하나하나 박기수에게 의견을 묻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박기수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물어보자 나중에는 거침없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자존감이 높아졌을 때 아가씨가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준비된 이런 모습에 박기수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높아진 박기수의 자존감에 마지막으로 이성우가 불을 댕겼다.
“자. 형님. 우선 제일 큰 형님부터 받으시고…… 다음은 우리 둘째 형님. 둘째 형님도 받으시고…….”
특유의 도자기 모양을 한 술병을 직접 들어 박기수와 최석영에게 이성우가 한 잔씩 건넸다.
그리고 술잔을 높이 들어 보이며 크게 소리쳤다.
“많이 모자라지만 형님들이 저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 내가 자네를 책임질 테니까. 내가 있는 한 신성증권 시흥지점에서 자네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말을 마친 셋은 술을 들이마셨다.
곁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안주를 들고 기다린 뒤 술을 다 마신 파트너의 입에 안주를 넣어줬다.
박기수는 여자가 집어 준 안주가 그렇게도 맛이 있었던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성우는 그런 박기수의 표정을 확인하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밴드 들어오라고 해.”
밴드가 들어오자 본격적인 음주가무가 시작됐다.
박기수 혼자 연달아 다섯 곡을 불러 젖힐 정도로 지금의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술을 마시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여자들이 계속 건네주는 술잔을 박기수는 호기롭게 파트너를 낀 채 마셔댔다.
이성우는 박기수이 술을 모두 다 마시면 박기수의 파트너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자기 파트너에게도 박기수에게 달라붙어 술을 건네라는 신호를 주었다.
오늘 이 자리는 박기수를 취하게 만들기 위한 자리였기에 노는 것보다 박기수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느라 이성우와 최석영은 신경을 바짝 세웠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 취기가 오른 박기수는 소파에 반쯤 누웠다.
이미 정신이 먼 곳을 향해 나아간 것 같아 보였다.
이성우와 최석영은 본격적으로 한진영이 시킨 일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성우는 술을 들고 박기수의 파트너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한 뒤 박기수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술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형님. 한잔 더 드세요.”
“어? 술? 그래. 좋지. 좋아. 자네도 먹어.”
박기수도 이성우의 잔에 술을 따라주려는 듯 술병을 찾았다.
술병을 든 박기수의 손이 흔들리는 것이 제대로 술을 따르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최석영이 박기수 곁으로 가 편히 술병을 들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제 박기수의 곁에는 아가씨들이 아니라 이성우와 최석영이 양쪽에 자리하게 됐다.
“형님. 드시죠.”
“어. 그래. 마시자. 마셔.”
박기수는 술을 한잔 쭉 들이켰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은 뒤 양쪽에 앉은 이성우와 최석영을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은 나만 믿어. 내가 이래 봬도 우리 지점의 실세야. 실세. 지점장님도 시흥지점에서 있는 햇수로는 나에게는 안돼.”
“알고 있죠. 형님이야말로 시흥지점의 진정한 기둥 아닙니까?”
“그래그래. 역시 최 과장은 나하고 함께 한 게 오래돼서 잘 알고 있네. 야. 이성우.”
박기수는 반쯤 혀가 꼬인 상태로 술잔과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너 인마. 지금은 네가 그 누구냐…….”
“한진영이요?”
“그래. 한 어쩌고저쩌고. 그 녀석에게 붙어서 성과급 좀 받아서 이렇게 술도 사고 그러는 것 같은데…… 너 인마.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 내가 그 녀석보다 더 잘나갈 날이 머지않았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줄 잘 서.”
“줄이요? 그럼 제가 형님에게 줄을 서면 형님이 저를 당겨 준다는 이야기인가요?”
“당연하지. 내가 널 당겨주마.”
이성우는 박기수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진영이는 강연회나 방송으로 고객을 모아 저희에게 넘겨주기도 했는데…… 형님은 어떤 방법으로 저희를 도와준다는 건가요?”
이성우의 말에 박기수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이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소리쳤다.
“그까짓 고객? 나는 더 큰 고객들을 알고 있어.”
“정말이요?”
“거짓말 같아? 내일 당장 내 자리로 와. 그럼 내가 더 큰 고객을 너희에게 건네줄 테니까. 이게 까불고 있어.”
박기수의 말에 이성우와 최석영이 서로 시선을 마주한 뒤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형님. 내일 찾아갈 테니 모른척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 성과급을 지금보다 3배는 더 많이 받게 해 줄 테니까. 나만 믿어. 그러니까 오늘은 잔뜩 마셔보자고.”
박기수는 큰소리로 외치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