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쉽게 실적을 쌓을 길이 열렸다
마우스를 잡은 이성우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화면만 응시하던 이성우는 결국 마우스를 클릭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성우는 모니터에서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이성우를 바라보고 있던 한진영은 이성우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성우를 안심시키려 했다.
이성우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들었던 한진영의 말을 떠올렸다.
[박기수의 지시를 따르는 게 중요해. 지금은 박기수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미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그런 한진영이 알아서 다 한다고 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모두 그대로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성우의 부담감은 상상 이상으로 그의 행동을 제한했다.
이성우는 마우스를 잡은 채 이번에는 박기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과 달리 박기수는 이성우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이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연신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이 이성우가 하려는 것을 이미 박기수는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성우는 며칠 전 한진영이 지점장실로 들어간 사이 박기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박기수는 이성우와 최석영을 향해 몇 개의 계좌 번호를 앞에 놓고 열변을 토했다.
“어차피 주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계좌야. 이 계좌의 주인은 10년째 삼선전자와 용심 그리고 케이유은행 주식을 매수한 채 거래를 한 번도 하지 않았어. 그래서 10년 동안 쌓인 배당금만 10억이야. 10억. 통장에 배당으로 들어온 돈 10억이 그대로 잠자고 있다는 뜻이야.”
박기수는 새로운 계좌 번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에 삼선전자를 매수했는지도 몰라. 그냥 돈에 맞춰 매수해달라고 해놓고 몇 년째 그대로 방치해놓고 있어. 이 사람은…….”
하나하나 모두 돈을 집어넣은 채 무관심한 사람들의 계좌였다.
박기수는 그런 계좌들을 모아 이성우와 최석영 앞에 펼쳐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 계좌들을 나눠 가지자.”
“가지자고요? 돈을 빼서…….”
이성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박기수에게 말했다.
박기수는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순수하네. 최 과장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었지?”
“차장님. 설마 이 계좌들을 주인 몰래 돌리자는 말씀이세요?”
“그래. 최 과장은 척 알아듣네. 역시 그래도 회사 짬밥은 무시할 게 못 되나 봐.”
최석영은 뚫어질 듯이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박기수를 바라봤다.
한진영이 놀라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기에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최석영이었다.
그러나 이건 놀라고 말고를 논하기에는 까마득히 먼 이야기였다.
최석영의 눈에는 온통 불안이 담겨 있었다.
“차장님. 이건 걸리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그건 자네들과 내가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돼. 셋만 입 다물면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최석영과 이성우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미 셋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람이 다섯 혹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될지 모르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한진영이 진작 알고 있었고 최준호에게 보고하기 위해 지금 지점장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최준호가 자기만 알고 있지는 않을 테니 이미 이 이야기는 소수만 알고 있는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불안해하는 이성우와 최석영을 보고 박기수는 두 사람을 달랬다.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삼선전자만 매매하면 돼.”
“삼선전자만 매매한다고요?”
“그래. 삼선전자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거래대금도 많고 움직임도 무거운 종목 아니냐? 그걸 하루에 한두 번씩만 샀다 팔았다 하면 되는 거야. 살 때나 팔 때나 호가가 흔들리는 일이 잘 없으니 이상한 일이 벌어질 리가 없어. 깊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약정 기준만 넘기는 것이 목표니까. 이 계좌들을 매매해서 우리의 약정 기준만 넘기면 되는 거야.”
“수수료는요? 계속 계좌에서 수수료가 나갈 텐데…….”
“그러니까 기술이 필요하지. 샀던 가격에 한 호가? 아니다. 한 두세 호가 정도만 먹고 빠지면 돼. 그럼 수수료도 다 충당되고 남을 테니까.”
“그게 말처럼…….”
수수료인 0.5%만 먹고 빠지자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된다면 계좌에 손실 금액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수익까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는 의미였다.
이성우는 앞에 놓인 찬물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말이 좋아 호가 몇 개만 먹자는 거지 하루에 0.5%씩 매일 먹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기수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해 보는 날도 있고 수익 보는 날도 있을 거야. 그런데 그런 걸 무서워하면 이 바닥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그리고…….”
박기수는 이성우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말했다.
박기수의 눈에 지금 하려는 일을 망친다면 최석영이 아니라 이성우가 망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계좌를 구한 나를 만난 것만으로 너희들은 운이 좋은 거야. 백날 티비에 나와서 떠들어봤자 여기 있는 20억짜리 계좌 하나만 해? 이성우 너는 10억 단위의 예치금이 담겨있는 계좌 본 적이나 있냐? 다 내 덕인 줄 알아.”
말을 하며 점점 박기수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그리고 너희들이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최석영이 이상한 느낌을 받아 다급히 박기수에게 물었다.
“이미 여기 있는 계좌 담당 직원들 자네들로 바꿨어.”
이성우와 최석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박기수가 괜히 담당 직원을 옮겼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박기수의 다음 말로 전해졌다.
“그리고 너희들이 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너희 담당 계좌를 돌릴 거야. 뭐 내 담당이 아니니 신경 써서 하지는 못하겠지만 대충 하루에 한 번 사고파는 일쯤은 할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이 하기 싫다고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거야. 나중에 잘못되면 담당 직원인 너희들도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하고 너희가 만난다는 사실도 다른 직원들도 알고 있어. 내가 너희들하고 어제 술을 마시고 오늘 이야기하는 걸 내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했거든. 일이 잘못되면 그들이 아마 친절히 증언해 줄 거다.”
“차장님!”
이성우가 박기수에게 소리쳤다.
박기수는 그런 이성우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나와 함께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해라. 마침 나도 혼자 하기에는 찜찜해서 다른 사람이 필요했는데…… 너희도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실적을 채울 길이 열린 거에 좋아하라 이 말이야. 알았어?”
박기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성우와 최석영을 돌아보고 웃었다.
생각을 마친 이성우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에는 소름 돋게 느껴지던 박기수의 미소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성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된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을 믿고 마우스로 매수 버튼을 눌렀다.
삼선전자 75만 원 1,300주 매수 완료.
이성우는 방금 매수했던 삼선전자를 75만 5천 원 호가에 1,300주 모두 매도를 걸은 뒤 기도하는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띠링.
한진영의 핸드폰이 문자가 왔다는 벨을 울렸다.
한진영은 이성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에 온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본사 감사실에서 확인 완료]
한진영은 핸드폰을 들고 지점장실을 바라봤다.
핸드폰의 문자를 보낸 것은 최준호 지점장이었다.
그는 감사실에서 연락받자마자 한진영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한진영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착착 잘 되고 있네.”
한진영은 박기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이성우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을 한 지 벌써 사흘째가 되었다.
“성우 씨. 도대체 누구를 접대하길래 매일같이 술에 쩔어서 출근해? 이러다 몸 축나는 거 아니야?”
이성우 곁을 지나는 사람마다 이성우를 향해 한마디씩 건넸다.
그때마다 이성우는 웃으며 고갯짓만 할 뿐 대답을 회피하고는 했다.
그런 이성우의 눈에 한진영이 들어왔다.
“야. 야.”
마침 최석영에 의해 끌려가던 한진영을 발견한 이성우는 급히 한진영과 최석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최석영은 이성우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여기서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
이성우는 최석영의 말에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석영의 반대편에 서서 한진영의 팔을 끌어안았다.
한진영은 좌우에서 자기를 끌어안은 최석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웃었다.
“나 도망 안 가. 그러니까 놔도 돼.”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이야기해.”
이성우는 범인을 호송하기라도 하듯이 한진영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사무실을 나섰다.
셋은 회사에서 나눌만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건물 밖으로까지 이동했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음료수까지 산 셋은 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외진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까지 해야 해? 벌써 사흘째야. 사흘. 나 이거 더는 못하겠어.”
“진영아. 나도 마찬가지다.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냐? 내가 맡은 계좌 손실만 벌써 오백이야. 오백. 수수료에 매매 손실에…….”
최석영은 말을 할수록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는지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셔댔다.
이성우의 모습도 최석영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도 답답했는지 담배만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한진영은 왼손과 오른손을 들어 두 사람의 등을 다독였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설득했다.
“손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손실분은 회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두 사람이 본 손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천만 원이 넘어도?”
“네. 천만 원이건 일억이건 신경 쓸 건 없어요.”
최석영의 말에 한진영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이성우가 나섰다.
“그럼. 그럼…… 돈을 다 잃어도?”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다 잃어도 돼. 괜찮아.”
“어떻게 그게 괜찮아. 손실을 메워 준다는 회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손실을 메워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갸웃하며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한진영이었다.
다 잃어도 된다는 말에 그래도 회사에서 손실을 메워준다고 생각한 이성우는 한진영의 반응에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우리가 손실을 크게 봐도 회사에서 그 손실을 메워준다는 소리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손실을 왜 회사에서 메워줘? 회사가 그렇게 하는 거 본 적 있어?”
“본 적 없어. 본 적은 없는데…… 그럼 회사에서 돈을 메워준다는 게 아니야?”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런 이성우를 대신해 이번에는 최석영이 한진영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럼 네가 한 말이 무슨 말이야? 다 잃어도 된다는 말. 그 말이 회사에서 돈을 메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 아니었어?
한진영은 소매를 꼭 잡고 있던 최석영의 손을 가만히 밀어냈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차분히 설명했다.
“회사에서는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을 때 손실을 메워주는 일은 없지요.”
“그럼 다 잃어도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그 계좌들은 실계좌가 아니니 다 잃어도 된다는 뜻이었어요.”
“어?”
“뭐라고?”
이성우와 최석영은 서로를 바라봤다.
분명 계좌를 박기수에게서 넘겨받았을 때 실계좌임을 확인했었다.
그런데 실계좌가 아니라는 한진영의 말에 뭐가 맞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되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한진영은 여전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박기수에게서 계좌를 건네받았을 때는 실계좌가 맞았어요.”
자기가 확인한 것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한 최석영이 급히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렇지? 내가 확인 해 봤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네.”
“왜?”
“건네받은 계좌를 저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계좌를 지점장님에게 건넸고, 지점장님이 받아 본사에 보고했습니다. 그 뒤…….”
“본사에서 바꿔 치기 한 거야?”
“네. 그래야 사고가 터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성우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운이 쏙 빠진 얼굴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진작 말해줬어야지.”
“진작 말해줬으면 지금처럼 생생한 반응이 나오지 않지.”
“나 심장 쫄려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매일 같이 박기수가 술 마시자고 끌고 가는 바람에 간도 지금 썩어가는 느낌이고…… 이번 일로 내 수명 10년은 깎여나간 기분이야.”
최석영도 이성우와 같이 긴장이 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석영은 이성우 곁에 주저앉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이제 그만 해도 되는 거야?”
“아니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중요하다니. 또 우리한테 뭘 시키려고…… 나 심장 안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느껴져.”
이성우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얇게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