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산타도 믿는 사람에게만 선물을 준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김정대는 대답 없이 웃고만 있는 한진영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와서 더 배우도록 해. 그럼 자네는 분명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다시 한번 웃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는 먼저 말을 하겠다는 한진영이 웃기만 하자 김정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싫은 건가? 그래서 내가 말하기 전에 싫다는 거절을 하고 싶었던 거였어?”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싫기는요. 제가 부문장님의 제안을 어찌 싫다고 거절하겠습니까? 저에게는 과분한 제안이기만 한데요.”
“과분하기만 하다? 내 귀에는 왜 그래서 싫다는 말처럼 들리지?”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싫지 않습니다.”
“그럼 좋다고 받아들여도 되겠나?”
김정대가 아예 확답을 받겠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그런 김정대를 향해 한진영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최준호가 먼저 나섰다.
“잠시만요. 진영아 잠깐만.”
최준호는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까지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최준호였다.
두 사람에게 최대한 잘 보이려고 억지로라도 웃는 낯을 보였던 최준호였다.
그런 최준호의 얼굴에 지금은 미소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준호는 손을 들어 올린 채 김정대를 향해 말했다.
“진영이는 저희 지점 소속입니다.”
“제가 모르고 있을 것 같아 지점장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은 아닐 테고…… 저에게 그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 밑에 있는 친구입니다. 아무리 부문장님이라고 하더라도 진영이를 이렇게 마음대로 데려가실 수는 없습니다.”
“최 지점장님이 아직 우리 신성증권의 시스템을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제가 시스템을 모른다고요?”
“본부장쯤 되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김정대의 말을 이번에는 장근수가 막아섰다.
“시스템을 잘 모르는 건 최 지점장님이 아니라 김 부문장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나. 본부장쯤 되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그런데 자네는 본부장이 아니지 않나? 그에 반해서 나는 본부장이고…… 내가 막아서면 자네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친구를 데리고 가지 못해.”
얄미운 김정대를 막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장근수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장근수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리고…… 이 친구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가 않고 말이야. 그렇지 않나?”
“아닙니다.”
“어? 뭐라고?”
“저는 김 부문장님 밑으로 가고 싶습니다.”
뜻밖의 한진영 대답에 곁에 있던 최준호가 화들짝 놀랐다.
“진영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자리를 옮기고 싶어?”
“네. 옮기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거 보라고. 저 친구는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친구야.”
“지금 우리 쪽이 작은 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무렴. 우리보다야 작은 물이지. 가지고 노는 돈의 사이즈가 다르지 않나.”
“그렇게 사이즈가 큰 사람들이 아직 사업부밖에 되지 못해?”
“이게…….”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와 장근수가 다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최준호가 한진영을 다시 설득했다.
“진영아. 잘 생각해봐. 너는 이제 시작이야. 오늘 받은 네 상을 생각해봐라. 그 상이 너의 앞길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줄 텐데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려고 하는 거야?”
최준호는 여전히 다투는 김정대와 장근수를 슬쩍 돌아본 후 계속 이야기했다.
“앞으로 네 인생은 탄탄대로야. 오늘 받은 그 상이 증거이고…… 이제 밖에 돌아다닐 필요도 없어.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사람들이 돈을 싸 들고 찾아올 거야. 그렇게 되면 네가 받는 돈도 지금보다 훨씬 많을 테니까 두고 봐. 내 말이 맞나 틀리나.”
“두고 볼 필요도 없이 지점장님의 말씀이 맞을 겁니다.”
“그걸 알고 있는 놈이 왜? 왜 나가려고 해. 탄탄대로로 닦여있는 앞길을 왜 스스로 벗어나려 하는 거냐고?”
“잘 닦여진 아스팔트를 벗어났다고 해도 제가 가려는 곳이 비포장도로는 아니니까요. 왕복 4차선 도로를 벗어나 8차선 도로로 가려고 하는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다투던 김정대가 큰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렇지. 말 한번 잘했다. 지금 있는 곳보다 나와 함께하는 게 더 뻥 뚫린 고속도로란 말이지. 거기 있으면 막혀서 얼마 가지도 못해. 이리 넘어와.”
“최 지점장님. 직원을 어떻게 교육하셨길래 까마득한 상관이 있는 곳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거참. 쓸데없는 거로 꼬투리 잡는다. 내가 보기엔 옳은 말만 했구먼 뭘 그렇게 날카롭게 받아들여.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우리 쪽으로 넘어올 테니까 여기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돼.”
만족해하는 김정대는 날카롭게 반응하는 장근수를 보고 혀를 찼다.
그 뒤 한진영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웃었다.
한진영은 이런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로따로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리에 모두 있을 때 지금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진영은 김정대와 장근수 그리고 최준호를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그렇지. 그래. 잘 생각했다. 너는 더 남아 있어야 해.”
한진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최준호였다.
한진영의 말을 넘어가지 않겠다고 알아들은 최준호는 한진영을 향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김정대는 최준호와 다른 식으로 한진영의 말을 받아들였다.
“잠깐. 최 지점장님. 잠시만 가만히 계셔보십시오.”
김정대는 최준호를 진정시키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냥 넘어올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이지?”
한진영은 한 번에 자기의 말을 알아듣는 김정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냥 넘어가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지요. 그래도 명색이 신성증권 실적 1등을 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우리 FICC는 세일즈와 매매 파트를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 신설된 곳이라는 것 자네도 알지 않나? 실적 1등이 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
“저도 제가 넘어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계시는 최 지점장님과 오늘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은 느낌을 받고 계시는 장 본부장님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괜찮지만 두 분이 저를 그냥 놓치는 것은 보기가 좋지 않으니까요.”
“뭘 그런 것까지 자네가 걱정하나?”
“한 식구 아닙니까? 제가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것이라면 이런 걱정도 하지 않지요. 하지만 내부에서 자리를 옮기는 건데 당연히 걱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FICC로 자리를 그냥 옮기는 것보다 선물을 들고 가는 게 자리를 옮긴 후에 보기에도 좋고요.”
“선물?”
“네.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선물을 하나 할 생각입니다.”
한진영은 가만히 김정대와의 대화를 듣고 있는 장근수와 최준호를 향해 돌아봤다.
“이대로 제가 그냥 자리를 옮긴다면 저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할 겁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묻을 커다란 선물을 하려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묻혀 조용히 자리를 옮기고요. 그렇게 된다면 제가 자리를 옮기는 것에 다른 사람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겁니다.”
“자네가 자리를 움직여도 사람들이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내겠다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요.”
한진영은 장근수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 후 이번에는 김정대에게 말했다.
“FICC 입장에서도 제가 그냥 간다면 낙하산이 들어왔다고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공을 쌓고 들어가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김정대는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도대체 자네는 종잡을 수 없는 친구구먼. 그래. 자네 말대로 같은 회사 내에서 자리를 이렇게 옮기는 건 보기가 안 좋기는 해. 그리고 그냥 우리 사업부에 온다면 기존 직원들이 탐탁지 않아 할 거라는 말도 맞아. 그런데 그걸 무마할 선물을 자네가 하겠다고? 이거 참…….”
김정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장근수에게도 나왔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는 해. 그런데 자네는 그게 좀 심해. 적당히 해야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한진영은 김정대와 장근수의 반응에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준호를 향해 물었다.
“지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준호는 지금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와 장근수에게 말했다.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저는 이 친구와 함께하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두 분도 저를 믿고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김정대와 장근수는 최준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던 두 사람 중에 먼저 김정대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긴. 한진영 씨의 능력을 나도 보기는 했지. 그래서 꼭 데리고 오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고…….”
“네가 저 친구의 능력을 봤다고? 능력이라는 게 단순히 실적을 잘 올리고 그러는 게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본건 저 친구가 단순히 실적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었어. 저 친구가 우리 사업부 재편을 먼저 예상하는 데서 내 마음이 완전히 넘어갔지.”
“뭐? 사업부 재편을 예상했다고? 회사 내에 연줄이 있는 건가?”
“있다면 우리보다 윗줄에 연줄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면…… 사장님과?”
한진영을 바라보는 장근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업부 재편과 같은 이야기는 본부장인 자기들도 초기에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물론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모를 수가 없지만, 초기에 아느냐 아니느냐로 차후에 움직임이 달라질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FICC 사업부에 들어간 게 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들어간 거란 말이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김정대는 장근수의 말에 대답하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좋아. 그럼 이야기해보게. 자네가 풀어놓겠다는 선물이 무언가? 모든 사람이 신경을 쓰고 우리 사업부에 이득이 될만한 선물. 그게 도대체 뭔가?”
한진영은 김정대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최근에 아랍 쪽 국가들의 CDS 프리미엄을 확인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CDS(Credit Default Swap)는 대출이나 채권이 파산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으로 거래되는 파생상품이었다.
즉 CDS 프리미엄이 높아진다는 말은 파산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진영은 산유국들로 가득한 아랍 쪽의 파산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뜻밖의 말에 김정대가 눈을 크게 뜨고 반응했다.
“아랍?”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랍에미리트 쪽 그중에서도 두바이의 CDS 프리미엄 말입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김정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을 확인해 본 적은 없네.”
“확인해 보십시오.”
“확인하라니? 도대체 두바이 CDS 프리미엄을 확인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건가?”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잠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을 천천히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
“아랍에미리트 중 두바이의 국영기업인 두바이월드가 채무에 대한 상환유예를 요청할 겁니다.”
“풉!”
장근수는 마시던 물을 그대로 입 밖으로 뿜어냈다.
김정대는 그런 장근수를 슬쩍 바라보고는 한진영에게 다급히 물었다.
“지금 뭐라고 그런 건가? 두바이 국영기업이 파산한다는 이야기인가?”
“물론 파산까지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까지 몰리기는 할 겁니다.”
장근수는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김정대에게 물었다.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어? 그쪽은 네 담당이니까 네가 들은 게 있을 거 아냐?”
김정대는 한진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야.”
김정대는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다시 물었다.
“어디서 들었나?”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영업 비밀?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 야 김정대. 빨리 알아봐.”
얼마나 놀랐는지 장근수는 이제 김정대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야기에 온 신경이 쏠렸다는 뜻이었다.
장근수가 이야기하기 전부터 전화를 든 김정대는 급히 어딘가로 전화했다.
그리고 한진영이 말한 두바이의 국채 CDS 프리미엄과 두바이 월드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잠시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김정대의 전화기 반대편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는지 기다리기 위한 침묵이었다.
그러나 한진영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이야기하느라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 맛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며 김정대와 장근수 그리고 최준호는 모두 혀를 내둘렀다.
“그래? 알았어.”
김정대는 전화를 끊은 뒤 전화기를 탁자 위에 올렸다.
그리고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이상이 없다는군.”
한진영은 물잔을 들어 입을 헹궜다.
그리고 앞에 놓인 천으로 입가를 닦으며 김정대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정말 제대로 두 분께 선물이 되겠는데요.”
“이상이 없다는 데 제대로 된 선물이라고?”
“남들이 모두 아는 일은 선물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남들이 몰라야 선물이 되지요.”
이야기를 듣던 장근수가 나섰다.
“자네 참 어이가 없는 친구구먼. 뭘 믿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본부장님. 생각해보십시오.”
한진영은 탁자를 팔꿈치로 받치고 장근수를 향해 말했다.
“입사한 지 이제 1년 차인 신입이 100억이 넘는 자금을 유치했습니다. 거기에 약정은 또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무리하게 약정을 쳐서 고객들의 계좌에 손해를 입히기를 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건 본부장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연출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믿는 게 있어서 이렇게 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믿으십시오. 산타도 믿는 사람에게만 선물을 주는 법이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