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짐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없었다.
옷과 가구 그리고 전자제품까지 보통의 집보다 오히려 적은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커다란 이삿짐 박스 세 개 정도가 전부였으며, 소파나 티비와 같은 것들이 이삿짐 전부였다.
“뭐 하러 왔어?”
한진영은 이삿날 찾아와 도와주는 최석영과 멍하게 구경하는 이성우에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이성우는 음료수를 받아 들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너 진짜 나가?”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말없이 손에 들려 있는 음료수 뚜껑을 땄다.
그리고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조금 뉘앙스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뭐…… 나가는 건 나가는 거니까. 그래. 자리 옮기는 건 맞아.”
“아~~~ 왜에~~~”
“뭐야? 왜 이래? 왜 앙탈 부리고 난리야?”
“너 나가면 나 심심하게 뭐 하라고?”
“심심해? 심심하면 일을 해. 그럼 안 심심할 거야.”
“야! 한진영.”
한진영은 자기를 부르는 이성우의 음료수 뚜껑을 직접 따준 뒤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차피 너도 곧 회사로 돌아가야지.”
“회사로? 돌아간다고?”
“너 그럼 계속 신성증권에 주저앉을 생각이었어? 네 아버지 회사 이대로 그냥 배다른 여동생이 날름 먹어 치우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그건…… 아니지만…….”
“내가 그랬지? 널 기풍철강의 꼭대기에 앉혀주겠다고 말이야.”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뒷머리를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넌 나만 믿으면 된다. 그러니 내 꽁무니만 잘 따라와.”
“네가 이렇게 다른 곳으로 가는데 내가 어떻게 네 꽁무니를 따라가.”
“내가 너 몰래 이사를 하기를 했냐? 아니면 전화번호를 몰래 바꾸기를 했냐? 일하는 곳만 바뀔 뿐 너하고의 관계에 바뀌는 건 없잖아. 그리고 내가 자리를 옮기는 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니까 아쉬워하지 마.”
“그러니까 날 기풍철강의 꼭대기에 앉혀주기 위해서 자리를 옮기는 거라고?”
“하하하. 너 이렇게 순진해서 일할 수 있겠냐? 내가 왜 널 그 자리에 앉혀주기 위해 자리를 옮기겠어.”
한진영은 다시 한번 크게 웃은 후 물건 하나를 옮기고 돌아온 최석영에게 물었다.
“과장님. 제 목표가 뭐라고 그랬죠?”
최석영은 땀이 송골송골 솟아난 이마를 훔치며 대답했다.
“네 목표? 텐 빌리언?”
한진영은 이성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들었지? 내 목표는 텐 빌리언이야.”
“텐 빌리언? 그게 뭔데?”
“연봉 텐 빌리언 달러.”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텐 빌리언 달러가 얼마를 말하는 것인지 머릿속으로 계산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사고가 멈춘듯했던 이성우가 크게 놀란 말투로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텐 빌리언 달러라면…… 12조? 12조를 연봉으로 받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어려울 것 같아? 불가능은 아니야. 내 이름을 건 펀드를 조성해서 운용한다면 가능한 일이니까.”
“조지 소로스처럼?”
“그래. 그 사람처럼 내가 설립한 회사에 내 이름을 건 펀드. 그리고 그걸로 전 세계 주식시장과 환시장 그리고 채권시장까지 장악한다면…… 그 정도 연봉은 받을 수 있지 않겠어?”
“너…… 신성증권에서 끝을 내려는 게 아니구나.”
최석영은 처음 한진영에게 이야기 들었을 때의 자기 모습이 이성우 같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너무나 큰 충격에 바보 같아 보이기까지 한 모습.
지금 이성우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최석영은 이성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게 도와주고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자리 옮기는 건 확정된 거야?”
“네. 조만간 FICC 사업부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에요.”
“FICC? 거기는…… 여기하고 다르잖아.”
채권과 환율 거래 등을 중개하거나 직접 매매 하는 FICC(Fixed Income Currency Commodity)의 경우에는 지점 영업과는 확연히 업무에 차이가 있었다.
거래하는 종류 등도 원자재를 포함하여 온갖 것들이 될 것이며, 거래 주체들도 기업과 국가 그리고 개인부터 기관까지 온갖 사람들과 부딪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식과 같이 가격이 정확하게 고시되어 있지 못한 것투성이라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파생상품을 섞고 더하다 보면 가격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는 것들을 만질 가능성도 높았다.
이런 것들을 좋게 봐서 포장이요, 나쁘게 보면 사기를 쳐서 상대방에게 팔아야 하는 것이었다.
최석영과 이성우의 눈에 보기에는 한진영이 자기들이 서 있는 주식판 보다 더 위험한 곳에 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진영은 이런 걱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개인들을 상대로 주식만 운용하는 지점 영업과는 다르죠. 상대하는 대상도 기업이 될 테고, 종류도 채권이나 환율 그리고 파생상품 등이 될 테니까요.”
“굳이 거기로 자리를 옮겨야 할 이유가 있어? 지금 여기서도 잘하고 있는데?”
한진영과 최석영이 대화하는 사이 어느 정도 진정한 이성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올해 우리 신성증권에서 가장 잘한 사람으로 뽑혔을 정도인데 여길 버리고 왜 거기로 가려고? 완전 생뚱맞은 곳인데…….”
“너 놓고 간다고 서운해하더니 이제는 내가 가는 곳이 생뚱맞은 곳이라고 걱정하는 거야?”
“걱정되지. 완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새로 시작해야지.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겠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최석영도 이성우와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한진영이 이뤄놓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영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지난 시절 해내지 못했던 일.
바로 전 세계 시장에 자기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이곳에 오게 했던 놈들에게 자기가 받은 모든 것을 되돌려 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돈이지만 사람이 필요했다.
한진영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혼자서 일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에 자기의 팔과 다리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모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진영은 그들을 얻기 위해 FICC로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한진영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최석영과 이성우의 눈에는 한진영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거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언제 가는 거야? 가는 날짜는 정해졌어? 이렇게 이사를 하는 걸 보면 조만간 가려는 것 같은데…….”
“연락이 올 겁니다.”
“연락이…… 온다고? 확정됐다며?”
“네.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지요. 저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 차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한진영은 이제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지 앞에 놓인 박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로 짐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
오늘 본사에서는 이상한 지침이 각 지점에 내려졌다.
“이거 뭐야? 이러면 뭘 추천하라는 거야?”
이제 막 지점장 회의실을 나온 직원들은 지점 문이 열리기 전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준호 지점장에게 받은 지시가 아무래도 이상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다른 곳도 아니라 은행주를 추천하지 말라니…… 도대체 위에서는 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잖아.”
“무조건 하지 말라는 말과 같죠. 조금 전에 지점장님 말씀 못 들었어요?”
[한동안 은행주에 대한 추천은 피하는 거로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은행주를 추천한 뒤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직원 각자가 책임지게 될 겁니다]
최준호의 지시에 직원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추천한 뒤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는다는 말이 이상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영 씨. 지점장님이 잠시 보자고 하시네요.”
모든 직원이 회의실을 나간 뒤 김미진이 찾아와 한진영을 불렀다.
한진영은 회의실을 나온 직원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보며 최준호가 있는 지점장실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최준호는 한진영이 지점장실로 들어오자마자 한진영을 잡아끌었다.
쾅!
그리고 문을 세차게 닫았다.
한진영은 급해 보이는 최준호의 행동에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연락이 왔습니까?”
“연락? 그 두바이?”
“예.”
“그거 진짜로 벌어지기는 하는 일이야?”
최준호의 반응에 한진영은 아직 두바이 쪽에서 이야기가 흘러들어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한진영은 먼저 응접용 소파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최준호도 한진영의 뒤를 이어 소파에 앉으며 한진영을 부른 이유를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뭐가 말씀입니까?”
“김정대 밑에 가겠다는 이야기 말이야. 내가 조금 전에 장근수 본부장님에게 확답을 받았어. 자네가 장근수 본부장님 밑에 계속 있겠다면 자네를 특별대우해주겠다고 말이야. 다른 직원들보다…….”
“지금도 다른 직원보다 나은 계약으로 성과급을 받고 있는데 더 나은 게 뭐가 있습니까? 설마 계약직으로 전환해서 아예 다른 계약을 체결하자는 건 아니시죠? 그렇게 되면 제가 아예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최준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진영의 말대로 그렇게 된다면 한진영이 날아가 버렸을 때 잡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한진영을 신성증권 직원으로 묶어놔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안할 수 있는 조건에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내놓을 제안이 없지 않냐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최준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한진영이 최준호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지점장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어떻게?”
어두워졌던 최준호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지금 지점장님의 가장 큰 걱정은 제가 빠져나가면서 실적도 함께 빠져나갈까 봐 그게 걱정 아니십니까?”
“휴우~ 그래. 사실 그게 내 걱정이기는 하다. 너 나가면 우리 지점 실적…… 어떡하냐?”
최준호가 솔직하게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서 너 잡으려고 하는 거야. 내가 괜히 너 앞길 막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 생각해놨지요.”
“생각해 놨다고?”
“설마 이대로 제가 보유하고 있는 고객들을 다 터트린 뒤에 자리를 옮기려고 할 줄 아셨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최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지? 그럴 건 아니었지?”
“제 기존 고객들을 저와 친한 최석영 과장과 이성우에게 나누어줄 생각입니다. 물론 이 회장님의 계좌와 프라임리츠의 계좌는 그러지 못하는 것 아시죠?”
“그럼 알고 있지. 그것까지 어떻게 바라겠나?”
두 계좌만 합쳐서 100억이었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이상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까지 욕심내다가 다른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준호는 한진영의 결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그래도 나가면서 생각이 있었구나. 사실 나도 너에게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신경 써주니. 고맙다.”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그리고…….”
한진영은 최준호를 향해 짙은 미소를 보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시흥지점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 잊지 않을 거지?”
“그럼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아무리 본사로 가더라도 지점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걸 시흥지점과 함께할 생각이니 지점장님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최준호는 그제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덩이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최준호의 웃는 얼굴을 확인한 한진영은 최준호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제가 지점장실에 들어오기 전에 보니까 본사에서 지침이 내려온 것 같더군요.”
“아~ 그래. 자네는 여기 들어오느라 전달사항을 알지 못할 거야. 본사에서 어제 저녁때 각 지점에 일괄적으로 지침을 내렸어. 은행주를 추천하지 말라고…….”
“아직 이야기 들린 것은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지침을 내렸다고요?”
“그래. 그게 나도 조금 의아하기는 해. 두바이가 됐건 아랍에미리트가 됐건 하다못해 아랍 쪽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데 왜 그런 지침을 내렸는지…….”
한진영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던 최준호도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을 발견하고 나서 지침을 내려도 늦지 않을 거로 생각한 최준호였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징후도 찾을 수 없는 일에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최준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지침에 그도 왜 본사에서 이런 지침이 내려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장 본부장이 꽤 유능한 사람인가 봅니다.”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지침은 장 본부장의 결정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장 본부장이 꽤 유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유능하지. 유능하니까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 아니겠어? 신성증권 지점영업의 가장 정점에 앉아있는 사람인데…….”
“그렇겠죠.”
한진영은 최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생각보다 유능하다는 뜻은 최준호가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이었다.
‘그때는 그냥 평범한 줄 알았는데…….”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장근수는 그냥저냥 자리를 유지하는 정도의 사람쯤으로 인식했던 한진영이었다.
커다란 이벤트 이후 변화되는 시장에서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던 정도의 사람 정도가 한진영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장근수의 이미지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빨리 반응했을 줄은 한진영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먼저 반응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김정대는 조용하기만 했다.
한진영과 최준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지점장실 문을 열고 김미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지점장님.”
“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용히 둘만 이야기 나누고 싶어 김미진에게 지시했던 최준호였다.
그런데 지시를 들은 김미진이 평소와 달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에 최준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지점장님. 그게…….”
“뭔데 그래?”
김미진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재차 최준호가 김미진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으려 할 때 김미진의 어깨를 잡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비키게.”
손의 주인은 김미진의 어깨를 잡아당기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부문장님…….”
조용하기만 하던 김정대가 직접 시흥지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