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조용히 만들 필요가 있다
채권팀의 팀장인 성현수는 문익현을 불러세웠다.
“이봐 문 과장.”
문익현은 채권 팀을 떠나려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이게 뭐야?”
성현수는 손가락으로 한진영을 가리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도 없이 이대로 가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뜻이었다.
문익현은 성현수의 뜻을 알아듣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김 부문장님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김 부문장님이 꽂아 넣은 친구니까요.”
“김 부문장님이? 왜?”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도 오늘 안 거예요.”
성현수는 슬쩍 한진영을 돌아보고 화가 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문 과장이 알게 됐을 때 나에게 먼저 슬쩍 이야기라도 해주던가.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데리고 오면 어떡해.”
“저라고 뭐 여기에 올 줄 알았나요.”
“여기 오기 전에 사람이 올 줄 알았다며?”
“사람이 우리 사업부에 온다는 것만 알았지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문익현은 비어 있는 자리에 천연덕스럽게 다가가 자리에 앉는 한진영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여기에 오는 건 저 친구가 정한 거니까요. 저도 몰랐어요.”
“어? 저 친구가 우리 팀을 정한 거라고? 부문장님이 정한 게 아니라?”
“그렇다니까요. 도대체 무슨 빽인지…… 팀장님도 조심하세요. 부문장님 오늘 점심은 저 친구랑 드신답니다. 새롭게 이곳으로 온 축하로요. 우선 어디 빽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문장님 빽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성현수는 떠나는 문익현을 잡지 못했다.
지금 정신없어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 시간을 보낸 게 오늘로 이틀째였다.
갑작스럽게 터진 두바이 이야기로 채권 가격이 요동치다 보니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짐짝과 같은 신입사원이 팀에 던져진 것에 성현수는 불편하기만 했다.
“어이. 이봐.”
성현수는 태연히 자리에 앉아 주변을 정리하는 한진영을 불렀다.
“네. 성 팀장님.”
“어? 내가 내 소개를 했던가?”
성현수는 자기의 성과 직급을 정확히 부르는 한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급히 정신을 차리고 한진영을 향해 손짓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일어나.”
“일어나라니요?”
“지금 자네가 여기 앉을 이유가 없어. 딴 데 가.”
“딴 데 가라고요?”
“그래. 여기 오는 것도 자네가 정한 거라면서? 자네하고 부문장님하고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신입사원이 들어오는 때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력직이 오는 것도 아닌 지금 시기에 자네를 받아줄 만큼 지금 여유가 없어.”
“그래서 다른 팀에 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다른 데 가. 괜히 여기서 정신 사납게 그러지 말고…….”
성현수와 한진영의 실랑이에 채권팀 사람들은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한 듯한 표정의 사람들이었다.
성현수는 그런 시선을 느끼고 급히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딴 데다 신경 쓸 겨를 있어? 어서 확인해봐. 두바이 쪽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다행히 부문장님이 먼저 정보를 얻어와서 다행이지. 어떤지 다른 곳들 봐.”
호통을 친 성현수는 슬쩍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를 향해 빨리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손짓한 뒤 몸을 돌렸다.
성현수가 자리를 떠나자 한진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런 모습을 곁에 지켜보던 옆자리의 조수아가 한진영을 향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성 팀장님의 말씀대로 하세요. 성 팀장님이 여전히 여기 계시는 거 보면 또 화내실 거예요.”
한진영은 걱정하는 조수아를 보고 웃어 보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를 쫓아내지 못할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진영 씨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조수아가 답답한 듯이 한진영에게 뭐라고 하려 할 때 다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아직도 안 갔어?”
자리로 돌아가던 성현수는 한진영이 떠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진영을 확인하고 크게 소리쳤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인데…….”
“채권팀에 들어갔다고?”
성현수는 한진영에게 다가가다 말고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문익현과 함께 채권팀의 자리로 찾아오는 김정대가 있었다.
“부문장님.”
“성 팀장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김정대는 성현수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그대로 지나쳐 한진영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때? 자리가 마음에 드나?”
“괜찮습니다.”
“난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채권팀은 너무 뻔하지 않나?”
“뻔한 곳에서 시작해야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성과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하긴 자리를 잡는 게 더 중요하기는 하지.”
김정대는 살짝 몸을 숙여 손가락으로 성 팀장을 가리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 잔뜩 나 있는 거 보니까 쉽지 않겠어.”
“그건 제가 풀어낼 문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잘할 거야. 자네가 채권팀으로 정했다고 해서 자네 자리가 어디쯤인가 싶어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따 보세나. 회사 앞에 있는 한식집 예약했으니까 밥이나 한 끼 먹으면서 아까 못다 한 이야기 마저 하자고.”
김정대는 한진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하나 아는 척을 한 뒤 성현수를 지나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성현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쟤 건드리지 마. 네가 건드릴만한 친구가 아니야.”
성현수는 김정대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김정대는 성현수의 어깨도 두어 번 두드리고는 자기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현수는 멀어지는 김정대의 뒷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뭐라고 직접 찾아와서 건드리지 말라고까지 해.’
김정대의 말에 오히려 성현수의 마음속에서는 알지 못하는 오기가 솟아올랐다.
성현수는 반발심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품고 한진영에게 다가갔다.
“부문장님께서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내쫓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자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겠지?”
성현수는 곁에 앉아 있는 조수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아 씨가 가르쳐줘.”
“제가요? 저도 할 일이 많아요.”
“어쩔 수 없어. 이 친구가 여기 앉았으니 별수 있어? 똥 밟았다고 생각해. 나도 똥 밟은 기분이니까.”
한진영을 앞에 놓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성현수였다.
성현수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알려주기 위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 한 것이었다.
억지로 내보내지 못하니 ‘나는 이 녀석이 싫다’라고 선언해 스스로 나가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성현수의 시선을 피했다.
괜히 이런 때에 성현수와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괜한 트집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이 성현수의 기분을 계속 건드렸다.
***
한진영이 새로운 팀에 자리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말을 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 영업실적 1등을 달성한 직원이라는 말에 몇몇 직원들이 찾아와 얼굴을 확인하기만 했을 뿐, 함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려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곁에 앉아 있던 조수아만이 귀찮은 듯이 한진영을 대할 뿐이었다.
“아셨죠? 인턴은 무조건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자료들을 정리해야 해요. 그날 있었던 해외 이슈들을 알아보기 쉽게 헤드라인 위주로 정리해서 모든 부서 사람들에게 메일로 보내야 해요. 그리고 주요 이슈라 판단되는 것들은 간략한 내용과 다른 증권사들의 뷰까지 첨부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마세요.”
한진영을 인턴 취급하듯이 이야기하는 조수아였다.
한진영은 이런 조수아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한진영은 굴러 온 돌이 맞았기 때문이다.
‘친목을 도모하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이러는 편이 서로에게 편하지.’
어차피 이곳에서 친해질 만한 사람은 없었다.
능력이 어느 정도이고 성격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미 지난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들과 친해진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좋을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사람들뿐이었다.
여기에서 친해질 만한 사람은 김준하뿐이었다.
“이봐요. 한진영 씨.”
조수아의 말을 들으며 김준하 쪽을 힐끔거렸던 한진영이었다.
조수아는 자기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저도 아까운 시간 쪼개서 가르쳐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좀 성의껏 이야기 들으실 수는 없어요?”
왜 자기가 한진영을 맡아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조수아였다.
괜히 자기 옆에 앉았다는 이유로 귀찮은 일을 떠안은 것 같아 조수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귀찮은 짐짝이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난 것이었다.
“제가 한 말 다 들었어요?”
한진영은 조수아의 시비 가득한 말투에 고개를 돌려 조수아를 바라봤다.
‘아무리 친해져 봤자 소용없다지만 좀 조용히 만들 필요는 있겠네.’
조수아와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짜증이 가득한 조수아의 말투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았다.
그냥 놔두는 것은 괜찮지만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을 자리에 그대로 앉혀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유럽과 미국 쪽의 헤드라인들을 뽑아서 정리한 뒤 메일로 보내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중에는 중국과 홍콩 그리고 일본의 환율시장과 채권시장에 대한 특이점 발생을 주의해서 지켜봐야 하고요. 장 마감 뒤에는 오늘 있었던 이슈들을 정리해서 또 한 번 모든 팀원에게 공유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달 금통위 회의가 진행되기 일주일 전부터 금리 전망에 대한 리포트들도 모두 정리해 놓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요. 제 말이 맞나요?”
“어…… 맞아요.”
조수아는 자기가 알려주지 않은 것들까지 미리 알고 있는 한진영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한진영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지난 시절 지겹도록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에게는 새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조수아보다 먼저 할 말을 다 해버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두바이 문제로 바쁜 것 같네요.”
“네? 네. 뭐 그렇죠.”
공식적으로 두바이 정부에서 채무유예를 선언한 이후 시장은 요동쳤다.
각국 정부는 두바이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된다면 노출되는 리스크에 대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은행들과 증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 수요는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모두 두바이 사태가 어떻게 끝날지 숨죽이며 지켜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채권을 팔아먹을 곳이 여의치가 않나 보네요.”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걸 왜…… 궁금해하죠? 지금 한진영 씨가 신경 쓸 부분은 그게 아니라…….”
조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성현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한창 전화를 돌리던 성현수는 자기에게 다가온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뭐야?”
“지금 우리가 처리해야 할 아랍 쪽 채권이 얼마나 됩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정리해야 할 것 있지 않습니까? 매도자들에게서 의뢰받은 것들 말입니다.”
“그게 도대체 왜 궁금한데?”
아직은 내부에서 채권을 사거나 팔기에는 사업부의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부분 중개업무를 주로 했다는 것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중개를 통해 수수료를 받는 것이 지금 채권팀의 주요 사업 행위였다.
“그걸 네가 왜 물어봐? 아직 OJT도 끝나지 않았을 것 아냐?”
“주십시오. 제가 처리해 드리죠.”
성현수는 인상을 쓰고 한진영을 쳐다봤다.
“지금 자네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알고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지금 그렇게 고집부릴 시기가 아닐 텐데요.”
한진영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전화를 돌리고 있는 다른 팀원들을 가리키고 말했다.
“제가 보니 채권을 매도하겠다는 사람들은 태반인데 사겠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더군요. 이렇게 되면 우리 회사의 명성에 크나큰 오점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엄청나게 많은데 이까짓 일에 발목 잡혀서야 되겠습니까?”
“해야 할 일?”
“기업들이 발행하는 채권도 처리해야 하고 각국이 발행하는 채권도 중개해야 하고…… 그런데 지금처럼 매도자들의 요구도 처리해주지 못하면 앞으로 채권을 거래하는 사람들이 우리 증권사를 이용하려 하겠습니까?”
“그걸 지금 자네가 해결해주겠다고?”
“제 실적이 어느 정도인지 보셔서 아실 텐데요?”
“풋.”
성현수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코 묻은 돈 좀 풀어봤다고 그러나 본데 여기는 규모가 달라. 너희가 1억 예치금을 받고 기뻐서 춤출 때 우리는 100억 단위를 처리해야 한다고. 알겠어?”
“처리해 드리죠. 100억?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웃음을 터트리던 성현수는 한진영을 가만히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