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59화 (59/650)

59화 내가 기회를 주는 거다

성현수는 한진영을 가만히 들여다본 뒤 말했다.

“자네가 올해 실적 왕이라는 거 알고 있어. 지점 영업에서 좀 날고 기었다며?”

“그 말씀은 조금 전에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성현수는 말없이 한진영을 쳐다본 뒤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좋아. 그렇게 하자.”

성현수는 근처에 있던 직원을 불렀다.

“이번에 우리 쪽에 의뢰 들어온 아랍 쪽 채권 리스트 좀 뽑아와.”

성현수는 지시를 내리고 한진영을 향해 웃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니 믿고 맡겨 줘야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말은 너무 식상하겠죠?”

“식상해. 식상하니까 그런 말 할 필요 없고…… 우리가 뭘 뒤에서 도와줘야 할까? 수수료 할인?”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벌 텐데 굳이 우리가 수수료 할인을 해줄 필요까지는 없죠.”

“돈을 많이 벌어? 누가?”

“채권을 사는 사람이요.”

성현수는 한진영의 말에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그래?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우리가 두바이 폭탄을 왜 피한 겁니까?”

“그거야 부문장님이 남들보다 빨리 정보를 얻어와서 두바이 폭탄을 피할 수 있었던 거지.”

“저는 어떻게 이곳에 온 겁니까?”

“그거야 부문장님이…….”

성현수는 말을 하다 말고 한진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설마 지금 자네가 부문장님에게 그 정보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맞다면 이제 믿고 맡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성현수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조금 전 성현수가 지시 내렸던 직원이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팀장님. 여기…….”

성현수는 한진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서류에 적힌 리스트를 확인했다.

각 나라의 채권 종류와 이율 그리고 만기 날짜 등이 가격과 함께 쓰여 있었다.

성현수는 확인을 마친 뒤 한진영에게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우리에게 의뢰가 들어온 아랍 쪽 채권 리스트야.”

한진영은 성현수에게 서류를 받아 든 뒤 확인했다.

성현수는 보면 아냐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지금 그런 것을 따져봐야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훑어보는 것을 마치고 서류를 들어 올렸다.

“정리해서 곧 결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마. 그러지 않아도 이해할 테니까.”

비웃음이 섞인 말투였다.

도대체 네가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듯한 말투였다.

한진영은 그런 그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럼 외근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뭐 네가 그렇게 하겠다니 말리지 않을 테니까.”

“그럼…….”

한진영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자 한진영의 뒤통수를 향해 성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피하게 빈손으로 돌아오지는 않겠지? 나는 자네가 처리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나가는 순간 사업부에 다 퍼트릴 생각이야. 자네의 호기로운 모습에 내가 큰 감명을 받았거든.”

한진영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성현수는 한진영의 얼굴을 보자 환한 얼굴로 말했다.

“지점 영업 실적 1등의 실력 좀 보자고 여기 있는 모든 직원에게 말할 텐데…… 어떤가? 자신 있나?”

“이까짓 게 뭐라고 정리를 못 하고 계셨던 겁니까? 보여드리죠. 이까짓 것들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한진영은 리스트가 적혀있는 서류철을 들어 올리고 허공에 흔들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한진영은 김영철을 확인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김 비서님. 여기까지 뭐하러 나오셨습니까?”

“회장님께서 나가서 맞이하라고 하셔서요. 그럼 가시지요.”

로비까지 나온 김영철은 한진영에게 인사하고는 한진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로비를 지나는 프라임리츠의 직원을 비롯하여 안내데스크의 직원 그리고 보안요원들까지 한진영의 얼굴을 살피느라 바쁘게 눈을 굴렸다.

“사람들이 제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하네요. 이게 다 김 비서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오실 때 조금 더 편하시겠네요. 사람들이 알아볼 테니 이제 막지 않을 테니까요.”

“또 오라는 말씀이세요?”

“회장님께서는 한진영 씨를 뵈면 좋은 일이 있다고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니 한진영 씨가 우리 회사에 자주 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한진영은 김영철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흔들고 열린 문을 통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프라임리츠는 부동산 회사답게 강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동산 회사가 꼭 강남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규모가 있다고 자부하는 곳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 만큼 프라임리츠도 강남에 뿌리를 내리고 사업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커다란 빌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짜 자리에 터를 잡은 프라임리츠의 본사 건물 12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내리시지요.”

김영철의 안내에 따라 카펫이 깔린 복도에 발을 내려놓은 한진영은 주변을 살폈다.

“신경 많이 쓰셨네요.”

고풍스러워 보이는 그림과 도자기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과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내리자 서서 찾아온 사람을 맞이하는 직원들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찾아오는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아무래도 저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니까요.”

“하긴 그렇지요. 대한민국에서 땅이 차지하는 위치가…… 이해합니다.”

한진영은 김영철의 말에 살며시 웃고는 김영철을 따라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복도 끝에 위치한 회장실로 보이는 문 앞에 선 김영철이 문을 열어줬다.

그러자 안에서 정병선이 친히 문 앞까지 나와 한진영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연락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우리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자, 갑시다.”

“네?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제가 회사를 소개해 드리죠. 처음 오셨으면 회사 투어부터 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급히 양손을 저으며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회사를 소개받을 정도로 프라임리츠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정병선은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김영철을 향해 차를 내올 것을 지시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갑자기 한진영 씨의 연락을 받고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이유가 떠오르지 않더군요.”

한진영을 응접용 소파로 안내한 정병선은 자리에 앉으며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김영철의 말대로 한진영이 찾아오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정병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좋은 일인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 정병선은 한진영이 자기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기만 했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을 향해 이곳에 오기 전 성현수에게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돈을 벌 기회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돈을 벌 기회요?”

정병선은 서류를 받아 들고 안에 들어가 있는 리스트를 확인했다.

“이게 뭡니까?”

“조만간 휴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 채권들입니다.”

“이걸…… 왜?”

정병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리스트를 들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의 눈을 바라보고 씩하고 웃었다.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게 맞습니다.”

“저보고 이걸 사라고 가지고 오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정병선은 리스트를 다시 확인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면 휴지로 변할지도 모르는 채권들이었다.

한진영이 모라토리엄은 없다고 말했지만, 두바이 정부에서 지급유예를 채권단에 요청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가능성은 매우 높은 상태로 변해 있었다.

“솔직히 한진영 씨가 모라토리엄을 없다고 말해주기는 하셨지만…… 지금은 저도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진짜로 그렇게 될까 봐 걱정되시는 겁니까?”

“그렇지요. 사실 거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채권단에게 유예를 요청했다고까지 발표된 마당에 채권단에서 수락하게 되면 결국 모라토리엄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니까요. 채권단이 지금 두바이 정부의 제안을 거절할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금리 재조정과 최악의 경우 채권 조정을 해서라도 나머지 돈을 살려야 하니까요.”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는 정병선과 달리 한진영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겁니까?”

“있지요. 그리고 그걸 논의하느라고 아직 발표가 나오고 있지 않은 겁니다.”

“그걸 알고 계시고요?”

“알고 있지요. 알고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러 온 거니까요. 어떠십니까? 이제 좀 안심이 되십니까?”

정병선은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보다 리스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 채권들이 휴지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휴지가 되지 않고 오히려 결제될 겁니다.”

“결제가 된다. 결제가…….”

정병선은 혼잣말하고 가만히 리스트를 살폈다.

어딜 봐도 리스트 속의 채권들이 결제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정병선의 말대로 채권단이 지급유예를 받아들여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이 오히려 나은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병선은 리스트를 내려놓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사실 정병선은 며칠 전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한진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었다.

모라토리엄이 안 된다는 말을 믿고 벌인 일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진영은 모라토리엄은 없다며 채권을 들이밀고 있었다.

최상의 결과가 모라토리엄처럼 보이는 지금 상황에 이런 배짱을 부리는 것이 신기한 정병선이었다.

“제가 한진영 씨의 말을 믿고 두바이 쪽 리조트를 몇 개 사들였습니다. 말이 좋아 몇 개지 가격으로 보면 꽤 무게가 있는 것들입니다.”

“헐값에 사들이셨겠군요.”

“그렇지요. 아무래도 건설사들이 위험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싼 가격에 매물을 내놓았으니까요.”

“그래서 회장님도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걱정이 없다면 그게 사람이겠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사실 흔들리기는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영철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차를 자리에 내려놓은 김영철은 어김없이 정병선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정병선은 손을 들어 뒤에 선 김영철을 향해 한진영이 건넨 리스트를 전달했다.

“우리 쪽에 여유자금으로 저 채권들을 매입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

“회장님!”

김영철은 깜짝 놀란 얼굴로 정병선을 바라봤다.

지금 회사의 자금 사정이 위험한 수준인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위험하다고 해서 회사가 무너지기 직전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잘못되더라도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션으로 삼았던 여유자금으로 채권을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김영철은 급히 정병선을 말렸다.

“회장님. 여유자금은 말 그대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준비해 놓은 것 아닙니까?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려 하십니까?”

“아무래도…… 이번에도 내 감이 한진영 씨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중에 아쉬워할 것 같아서 말이야.”

“회장님. 차라리 벌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잘못됐을 때는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까 확인해 보라는 거지. 만약 여유가 없다면…….”

정병선은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저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병선의 말에 한진영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찻물을 마셨다.

그리고 잠시 찻물을 음미하고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회장님. 무언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해요?”

“네. 오해요.”

“제가 뭘 오해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병선은 한진영을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을 향해 몸을 살짝 굽혔다.

“회장님께서 저를 도와주시는 게 아닙니다. 제가 기회를 드리는 거지요.”

한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병선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병선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굳어 있는 김영철에게 다가갔다.

“기회는 잡는 자에게만 기회가 되는 법이지요. 눈을 뜨고 놓치려는 사람을 일부러 잡아 주머니에 기회를 넣어줄 만큼 제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진영은 김영철의 손에서 리스트를 뺏어 들었다.

김영철은 허무하게 뺏겨버린 손을 내려다봤다.

“누가 도와주는 사람인지 누가 기회를 잡는 사람인지 확실하게 파악이 안 되는 분과는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없지요.”

한진영이 고개를 살짝 숙여 정병선을 향해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뵐 날이 찾아오면 그때 뵙겠습니다.”

“잠깐.”

금방이라도 나가려는 한진영을 정병선이 불러 세웠다.

“나는 두바이가 모라터리엄을 직전에 둔 상황임에도 한진영 씨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진영 씨가 제 눈앞에 앉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진영 씨도 먼저 저에게 믿음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김 비서같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제가 설득할 수 있는 키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키를 달라? 그렇군요. 하긴 무작정 믿으라고 하는 것도 참 못 할 짓이지요. 좋습니다. 제가 방법이 하나 더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병선은 마른 침을 삼키고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그걸 알려드리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추가 대출입니다.”

정병선과 김영철은 한진영이 말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말했다.

“채권단은 두바이에 추가 대출을 해줄 겁니다. 단, 지금 만기가 도래하는 채권을 우선 해결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과 김영철은 놀라기보다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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