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단점을 덮을만한 능력
정병선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추가 대출…… 그러니까 또 돈을 빌려줄 거라는 말씀입니까? 채권단이요?”
“역시 회장님은 정확히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각국의 채권단은 조만간 두바이에 추가 대출을 해줄 겁니다.”
“왜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영철이 참지 못하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도저히 한진영의 이야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못 갚겠다고 배짱을 부리는 두바이였다.
그런 두바이에 오히려 돈을 더 빌려주겠다는 것은 떠올리기 쉽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갚을 능력이 되니까 빌려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진영은 가볍게 말하고 리스트를 든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좀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자세히요? 흐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김 비서.”
정병선이 김영철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김영철은 오랫동안 정병선을 모셔서 그런지 단박에 정병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저에게 주십시오.”
김영철이 한진영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한진영은 리스트를 들어 올리고 정병선에게 물었다.
“왜 다시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무엇이 됐건 받아 두고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받아 두고 이야기를 듣는다? 결정하셨습니까?”
“결정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한진영은 들고 있던 리스트를 김영철에게 건넸다.
그리고 정병선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바이가 최근 어려움에 부닥친 이유는 과도한 건설사업 때문이었습니다. 모래뿐인 곳에 호수를 만들고 건물을 올리며 녹지를 만들다 보니 무리를 하게 된 것이죠. 뭐 그 덕분에 리조트와 같은 건물이 들어올 정도로 삭막했던 두바이가 푸르게 변하기는 했지만요.”
정병선이 인수했다는 리조트들이 두바이의 개발사업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두바이는 모래밖에 없는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물로 리조트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리조트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도시.
아름다운 호수와 나무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공원들까지 모두 자연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두바이 정부가 철저히 계획하에 만들어 낸 인공적인 것들이었다.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태에 이르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채권단이 왜 그렇게 무리를 한 두바이 정부에 추가 대출을 해준다는 겁니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기름이 나니까요.”
정병선은 한진영의 대답에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너무나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됐다.
“오히려 지금 채권단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억지로 빚을 더 지울 수 있게 됐으니까요. 어차피 빚은 두바이가 미친 짓을 더 이상 하지만 않는다면 무리 없이 다 받아낼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그리고 미국 정부도 이런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을 겁니다. 미국 정부가 중재하여 일을 해결해줌으로써 아랍에미리트에 영향력을 더 끼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이거네요.”
“결과가 모두 나온 뒤에는 그렇게 느껴지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걸 모르니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이고…….”
정병선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김영철을 바라봤다.
“어때? 대답이 된 것 같나?”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투자자도 끌어모을까요?”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일부 투자자들에게만 은밀히 알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으로…… 그래야 지금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퍼지지 않을 테니까. 많은 사람이 알면…… 할인율이 더 떨어질지도 모를 테니까. 맞지요?”
정병선이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은 당장 휴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본래 가격에 30%에 거래가 되고 있지만 이게 결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돌면 가격이 오를 게 분명하니까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매번 주시니 제 눈에 한진영 씨가 구원자처럼 느껴집니다. 프라임리츠를 구원해주러 오신 분으로 말입니다.”
정병선의 말에 한진영은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필요에 의해 회장님을 찾은 거니까요. 그리고…… 저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시면 됩니다.”
“합당한 게 뭐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저에게 아주 좋은 것을 건네실 수 있으십니다.”
“좋은 것이요?”
“대한정유와 다리를 놓아주십시오.”
“대한정유와요?”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저희가 대한정유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진행하려는 사업이 참 많지요?”
“그걸…….”
한진영이 사무실에 찾아온 이후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은 정병선이었다.
“그렇게 놀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프라임리츠와 대한정유의 관계를 아는 것이 두바이 사태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알고 오셨으니 다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이상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 이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제가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요.”
“가지고 계시다고요?”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과거로 오기 전, 프라임리츠와 대한정유가 함께 손을 잡고 이라크 정유공장 사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함께 한 파트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것이었고 마련한 자리에서 쓸 카드는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기풍철강 회장님의 이름을 이제 써먹을 수 있겠구나.’
한진영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내년에는 두바이의 모라토리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빅 이벤트가 펼쳐지게 될 것이었다.
비록 석유가 나오기는 하지만 두바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년에 위기가 터질 곳은 유럽. 그중에서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나라가 가지는 이름의 무게에서 두바이보다 더 컸으며 엮인 나라들도 두바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한진영은 이곳에서 터질 커다란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 대한정유와 접점을 만들려 했다.
***
한진영이 출근하여 성현수에게 보고했을 때 성현수의 표정을 사람들은 잊지 못했다.
채권 한두 개도 아니라 리스트 안의 모든 채권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성현수는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어진 한진영의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 말에 성현수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며칠이 걸린 것도 아니라 단 하루만에 모든 채권을 해결해 버린 한진영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대단한 숙제라도 내어준 것처럼 행동한 성현수에게 한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한진영의 능력이 부각되면 부각될수록 반대인 성현수의 위치가 낮아지고 만 것이었다.
“그게 정말일까?”
성현수가 김정대에게 보고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이니까 보고하러 들어간 거지.”
말을 마친 사람은 슬그머니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주변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점 영업 실적 1등이었다며? 역시 1등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어떻게 그 악성 채권들을 다 팔아 먹었다냐. 나는 죽어도 못 팔겠던데…….”
“사실대로 말하고 팔았겠죠?”
“사실? 어떤 사실?”
“당장 내일이라도 두바이가 손들거나 채권단이 두바이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채권은 휴짓조각이 돼 버린다는 거요.”
“그걸 고지 안 했으면 이제 사기가 되는 거지.”
“그럼 고지했는데도…… 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렇지 않았겠어?”
“채권을 산 사람이나 팔아먹은 사람이나 모두 제정신이 아니네요.”
“뭐가 됐건 간에 난 놈은 난 놈이다. 그걸 어떻게 팔아먹었다냐.”
사람들은 한진영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한진영은 느긋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지금 채권팀에서 가장 크게 생각하는 일을 처리했으니 이 정도 여유를 가진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일 받으셨죠? 분명 7시 전에 메일로 헤드라인 다 정리해서 보냈습니다.”
곁에 앉아 힐끔거리는 조수아를 향해 한진영이 말했다.
“알아요. 그래서 쳐다본 거 아니에요.”
“아시면 다행입니다. 혹시 받은 메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바꿀 테니까요.”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없어요. 오히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메일 보낸 건지 물어보고 싶었으니까요.”
“배우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는 일은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 밥 먹으러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진영을 조수아는 잡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던 조수아였다.
한진영은 몸을 돌리려던 것을 멈추고 조수아를 바라봤다.
“왜 부르셨죠?”
“점심 저하고 같이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이 근처에 쌀국수집이…….”
“아니요. 저는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서요.”
“오늘도 부문장님하고 같이 드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이 없으셨으니 오늘은 아니겠죠?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한진영은 이제는 완전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런 한진영의 뒷모습을 조수아는 아쉬운 듯이 바라봤다.
자리를 떠난 한진영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식권을 내고 배식받은 밥을 들고 한진영은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한진영 씨. 여기.”
지나가는 한진영을 하나둘 직원들이 붙잡았다.
조수아와 마찬가지로 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채권을 판 건지 그리고 채권을 산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사람들을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서 홀로 앉아 밥을 먹는 김준하에게로 다가갔다.
“같이 먹어도 될까요?”
밥에 얼굴을 묻고 식사를 하던 김준하는 앞자리에 앉는 한진영을 슬쩍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최근에 일을 좀 처리하느라 이제서야 이야기를 나누네요.”
이번에도 김준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치 라디오를 듣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속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릴 뿐이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집니다. 이런 날은 집에 있으면 딱인데…… 집에서 뜨끈한 고구마 먹으면서 책 보면 시간 잘 갈 텐데요. 그렇죠?”
김준하는 먹던 숟가락을 소리가 나게 식판에 내려놓았다.
“저 아세요?”
“으음…… 저는 알지요.”
“절 아신다고요?”
“네. 김준하 씨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모르는데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천천히 알아가면 되지요.”
“천천히?”
김준하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쓴 미소를 지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차차 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선 제 이름은 아시죠?”
“궁금하지 않아요.”
“저는 한진영이라고 하고…… 지금은 채권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는 곳은 요기 여의도 넘어 마포에서 살고 있고요. 그리고 또 뭘 알려드려야 하나.”
한진영이 숟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기자 김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영은 아직 남아있는 밥과 반찬들을 쳐다보고 물었다.
“벌써 다 드셨어요?”
“더는 먹고 싶지 않아서요.”
김준하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한진영은 찬바람이 나는 것 같은 김준하의 뒷모습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쉽지 않은 성격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음산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성격의 김준하였다.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기 할 일 외에는 다른 사람의 일에는 절대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내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람이 없었다.
오직 자리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김준하가 온종일 하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래도 능력만큼은 뛰어나지.’
모든 단점을 다 뒤덮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와 친해지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중이었다.
다음 날도 혼자 밥을 먹는 김준하의 자리에 한진영이 다가왔다.
“오늘도 혼자 드시나 봅니다. 같이 먹어도 괜찮지요?”
“한진영 씨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저한테 오시는 겁니까?”
“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신 겁니까? 이거 참 기분이 새로운데요.”
“귀찮아서요. 귀찮아서 기억하는 거예요.”
“뭐가 됐건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거면 된 겁니다.”
한진영은 김준하의 맞은편에 앉아 식판에 담아온 밥을 먹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해되지 않네요. 오늘 부문장님께 칭찬을 받는 것도 모자라 모든 사업부 직원 앞에서 박수까지 받으신 분이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무도 처리하지 못했던 것을 처리했다고 사업부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데요.”
“그런 것에 감탄할 만큼 사람들 눈높이가 낮은 거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김준하 씨도 다른 직원들을 보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식판으로 시선을 옮긴 후 숟가락만 열심히 놀릴 뿐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함께 밥을 먹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름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모습을 보인 한진영이었다.
김준하의 성격상 다그치면 놀라 도망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김준하가 사표를 내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한진영은 완벽히 김준하를 손에 넣을 때까지 무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