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피부로 와닿게 숫자로 이야기하겠다
윤길영은 돌린 몸을 세우고는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뭐가…… 떠오른다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의 파산 이야기가 시장을 강타 할 겁니다.”
“그리스? 이탈리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두바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이야기한 저입니다. 그런 제 입에서 그리스 파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예식장 안에 아무도 없다고 자신합니다. 어떠십니까? 이제 이야기를 앉아서 할 수 있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은 뒷걸음질로 의자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손을 흔들었다.
“3분. 시작해보게.”
한진영은 윤길영의 말에 씩하고 웃고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그리스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새로 그리스 정부를 차지한 곳에서는 지난 정권에서 재정 적자를 은폐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그리스의 재정 적자 규모는 GDP의 4% 수준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13%에 가깝다는 것이 새롭게 정권을 취득한 곳의 주장입니다.”
윤길영은 가만히 한진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뒤 의문점을 한진영에게 던졌다.
“어느 곳에서나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나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 아닌가? 과거 정권을 욕보이고 새롭게 정권교체를 한 곳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말이야. 난 그 정도 수준으로밖에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데?”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시작?”
“그리스 부채는 그리스 총생산의 110%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정도 부채가 문제가 된다는 건가?”
“다른 곳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그리스라면 문제가 됩니다.”
“그리스라면 문제가 된다?”
“네. 그리스는 이런 재정 적자를 메울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니까요.”
한진영은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는 윤길영을 향해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스는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의 최대 단점은 외부의 충격을 회피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에 나라의 근간이 흔들렸다는 이야기죠.”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진작에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제가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도 없겠지요.”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진영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흥미 이상의 관심을 쏟을 만큼의 매력을 아직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약속됐던 3분의 시간이 어느새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우는 초침이 계속 원을 그리는 시계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시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앞에 앉아있는 윤길영의 마음만 흔들 수 있다면 3분이 30분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가 본론입니다.”
“그래. 본론 어서 꺼내 보게.”
“현재 유가는 90불 초반대입니다. 이를 통해 대한정유는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부터 시작한 유럽발 충격으로 유가는 50불까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이게 무슨…….”
윤길영의 곁에 서 있던 수행비서가 한진영을 향해 나서려 했다.
윤길영은 그런 수행비서를 멈춰 세우고는 말했다.
“조금 더 흥미를 끌어올려 보게.”
“그리스부터 시작된 찬바람은 유럽 전체를 강타하여 유럽의 경제를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할 겁니다. 그로 인해 무역 거래는 급감할 것이며, 그 중심에는 석유화학이 자리를 잡게 될 겁니다.”
“좋아. 2분. 2분을 더 주지.”
애초에 5분을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정병선이 함께 자리하지 않는다고 하여 2분을 깎아 3분을 이야기한 윤길영이었다.
그리고 그조차도 아깝다며 서서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런 윤길영이 앉아 3분 동안 이야기를 들은 뒤 다시 2분을 늘렸다.
이성우는 놀란 눈으로 시계에서 윤길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윤길영은 눈을 가만히 감은 채 한진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스발 충격은 우리나라에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우리와 무역 거래를 하는 주요 국가가 아니니까요. 물론 유럽 전체를 보자면 타격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옆 동네에 불이 난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고…… 회장님이 자리한 대한정유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막연하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거라는 말은 피부로 와닿지 않아.”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한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기실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부로 와닿게 해줄 친구가 도착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김준하가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대기실로 들어왔다.
김준하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한진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곁에 앉히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 여기 와서 회장님께 숫자로 알려드리도록 하자. 할 수 있지?”
한진영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윤길영이 눈을 뜨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숫자로 알려주겠다고?”
“말로 하니 피부로 못 느끼시겠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래서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숫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은 김준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짓을 하자 김준하가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의 모습에 엷게 미소 짓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대한정유의 영업이익은?”
“1조 3천 800억.”
“작년 평균 유가는?”
“89불.”
“좋아. 그럼 올해 예상되는 영업이익은?”
“현재 평균 유가 92불을 계산했을 때 1조 5천억 대의 영업이익을 기대할 수 있어요.”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떠냐는 눈으로 윤길영을 쳐다봤다.
윤길영은 간단하게 오가는 한진영과 김준하의 대화에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 준비를 하고 온 걸 보고 나에게 피부로 느끼게 해주겠다는 건가? 시간 다 됐네.”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윤길영을 봤다.
금방이라도 대기실을 나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을 잡기보다 김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가 10불이 하락할 때마다 예상되는 영업이익 하락치는?”
“현재 대한정유의 정유사업 의존비를 생각했을 때 유가 10불 하락당 약 4천억의 영업이익 하락이 예상돼요.”
“그럼 대충 60불대 이상을 유지해야 손해는 안 본다는 이야기네?”
“그것도 최상의 상태일 때나 가능해요. 유가 하락 시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예상되는 석유화학 분야를 생각한다면 60불대 중반은 돼야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거예요.”
한진영은 김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윤길영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60불대 중반이 마지노선이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리스발 위기는 유가를 50불까지 끌어내릴 겁니다. 거기에 더해 유럽으로의 수출길도 한동안 막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적자가 조 단위로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어떻습니까? 이러면 좀 피부로 느껴지십니까?”
윤길영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근거는?”
“근거는 여기 있는 이 친구입니다.”
“성우?”
“네. 여기 있는 이성우가 근거입니다.”
윤길영은 선 채로 인상을 쓰며 한진영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제대로 이야기해 보게.”
한진영은 윤길영의 말에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기풍철강의 이정훈 회장님이 어떻게 철광석 위기를 한 발 앞서 회피하실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시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정 회장님이 어떻게 두바이 사태에 그렇게 과감한 배팅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양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오늘 같은 자리에 이 친구는 저와 함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님도 참석하는 이곳에 저와 함께…… 이정훈 회장님이 왜 저와 함께 이 친구가 이곳에 오도록 했을까요?”
“이 회장님이 의도한 거란 이야기인가?”
“아들이 좋은 친구와 함께 지내기를 바라는 건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풍철강의 이야기와 프라임리츠의 이야기 모두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풍철강은 운이 좋았고, 프라임리츠는 과감했다며 가볍게 여겼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하지만 두 사건의 배후에 한진영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윤길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내에 계신 귀빈 여러분은 조금 뒤 예식이 진행될 예정이니 자리로 오셔서 신랑신부를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예식이 시작되려는지 장내방송이 나왔다.
“회장님.”
곁에 있던 수행비서가 윤길영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예식의 주인공 중 하나인 혼주가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신경이 쓰인 모습이었다.
벌써 약속했던 3분은 지난 지 오래였으며, 5분의 시간도 훌쩍 지나 있었다.
윤길영은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후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끝난 뒤 남아있게. 결론을 내야지.”
“저도 아직 꺼내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좋아. 기대하지.”
윤길영이 처음으로 한진영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기실 문을 향해 걸어가다 한진영을 돌아봤다.
“지금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이곳에 나밖에 없다는 것. 확실하지?”
“저는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 그거참 마음에 드는구먼.”
윤길영은 만족한 표정을 짓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대기실에 남아있던 이성우는 이제야 숨을 쉬겠다는 표정을 지은 후 한진영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진짜 나랑 여기에 같이 가라고 했어? 그리고 너하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도 들은 기억이 없는데…… 뭐 그런 말씀을 하실 것 같기는 하다만은…… 난 전혀 들은 기억이 없어.”
이성우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이성우의 등을 두드려줬다.
“이해가 빠르지 않지만, 눈치는 빠르다니까. 조금 전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던 거 칭찬한다.”
“그래. 좀 이상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어.”
“잘했어. 내가 너와 함께 네 아버지인 회장님을 만났을 때 기억하냐?”
“어. 기억하지.”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냐? 네 아버지 이름 한번 팔아먹겠다고…….”
“그럼 지금 윤 회장님한테 네 생각을 아버지가 한 것처럼 포장해서 이야기한 거야? 그래도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도 그랬잖아. 회장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뭐 화가 난다면 할 수 없는 거고…….”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 후 김준하를 돌아봤다.
“너도 잘했어. 유가 가격에 따른 적자 규모가 윤 회장님이 알고 있는 것과 맞아서 더 효과가 컸어. 수고했다.”
“이런 정도는 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대충 흐름만 봐도 계산이 가능한 거니까요.”
“그럼 좀 일찍 오지 왜 간당간당하게 온 거야?”
“볼일도 보고 그러느라…….”
한진영은 김준하의 말에 크게 웃었다.
“이거 화장실 보내 놨더니 진짜로 볼일 본 거냐?”
“변기에 앉아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잘했어. 잘했어. 뭐 어쨌든 반쯤 넘겼으니 예식이 끝난 뒤에 제대로 한판 업어치기를 하면 돼. 우리도 어서 가자. 예식장에 왔으니 예식은 봐야지.”
한진영은 진행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자 대기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성우와 김준하는 그런 한진영의 뒤를 따르며 급히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
결혼식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원형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배정받아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예식이 펼쳐지는 1부에서는 박수를 쳐주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신랑과 신부를 축하해줬다.
그리고 이어진 2부에서는 식사와 함께 사교의 장이 펼쳐졌다.
이렇게 공인된 자리에서 기업 총수를 비롯하여 정관계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써야 하는 사람들은 이런 자리가 반가울 따름이었다.
“신부 예쁘더라.”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한진영 일행은 식사하며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래?”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너하고 친했다며?”
“그거야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고…….”
“그러고 보니 너하고 결혼했을 수도 있었네?”
“어휴~ 윤 회장님이 잘도 나한테 딸을 주시겠다. 턱도 없는 이야기야.”
“네가 왜? 뭐 이 정도면 생긴 것도 멀쩡하고 기풍철강의 후계자에 뭐 저런 놈들보다야 훨씬 낫지 않냐?”
한진영이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로 한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곳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껄렁해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가 좋은지 낄낄대면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가리킨 쪽을 슬쩍 보고는 웃었다.
“너나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해주지 다른 사람들은 쟤들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거야.”
“기죽지 마. 천하에 이성우가 왜 저런 녀석들에게 기를 죽고 그래. 걱정 마. 저 중에 제대로 이름 날리는 놈 하나도 없을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인데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준하가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몰라. 그리고 내가 모르면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야.”
지난 시절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각 기업의 주요 인사들을 머릿속에 다 집어넣고 다녔던 한진영이었다.
그런 한진영의 머릿속에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내 아들이 저기 있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는 이야기인가?”
한진영의 등 뒤에서 이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진영은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한진영이 이정훈을 향해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