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잘못 본 게 아니라 못 본 거다
이정훈은 한진영의 인사를 받으며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왔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거냐? 계속 그렇게 앉아만 있을 생각이야?”
이정훈의 말에 이성우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어요?”
이정훈은 자기가 말하고 나서야 움직이는 이성우를 보고 인상을 쓰고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더 낫다는 말이 진심인가? 친구라서 괜히 하는 말이 아니고?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모자란 놈처럼 보이는데…….”
“곁에 제가 있는 것만으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긴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렇게 들리는구먼.”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빙그레 웃고는 자기 옆에 서 있는 딸을 소개했다.
“둘이 인사하지. 이쪽은 내 딸. 그리고 여기는 나하고 지난번에 함께 일을 했던 네 오라비의 친구다.”
한진영은 이정훈의 말에 이성우의 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유정이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피며 살가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유정이라고 해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계속 나누기를 바라는 이유정과 달리 한진영은 인사를 마친 후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정훈을 향해 물었다.
“오늘 같은 날 제게 오실 시간이 있으십니까? 만나실 분이 많을 텐데요.”
“많지. 오늘 같은 날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축제와도 같은 날이니까. 기획재정부 장관을 약속시간 잡지 않고 만나는 날이 흔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저에게 오셨다는 건…… 들으셨군요.”
“들었지. 들었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이야.”
한진영은 이정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의 이름을 좀 써먹었습니다.”
“처음 윤 회장에게 이야기 듣고 좀 당황했어. 내 기억에는 분명 자네가 나에게 협상을 걸어온 거라고 기억해서 말이야. 그런데 윤 회장에게 잘도 날 팔아먹었더군. 내가 자네에게 마치 부탁을 한 것처럼 말이야.”
“요긴하게 잘 써먹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면 잘 됐어. 나는 내 이름을 팔아먹겠다고 해서 어디다 팔아먹을까 궁금했었거든. 혹시 은행에서 대출 같은 거 받을 때 내 이름을 대고 이자라도 깎으려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네.”
“하하하. 은행 이자라니요. 그거야말로 좋은 생각이었는데 아쉽습니다. 저는 그쪽으로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기회가 온다면 한 번 그렇게 써먹어 보게나.”
“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또 기회가 온다면 말입니다.”
이정훈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궁금증을 담아 한진영에게 말했다.
“윤 회장이 자네에게 관심이 많아진 것 같아. 자네에 관해 물어보는 것을 보니 말이야.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이정훈은 시선을 돌려 윤길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는 찾은 손님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동선으로 보아 한진영이 있는 곳이 가장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았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우연히 만들어진 동선 같겠지만, 윤길영과 대화를 나눈 이정훈의 눈에는 이런 동선이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윤길영이 한진영을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짠 동선처럼 느껴졌다.
이정훈은 다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자식의 결혼식에서 딴생각을 하게 만든 이유. 나도 그 이유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이정훈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의 대답을 하는 한진영을 보고 더욱 궁금증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급히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지금 내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돈이 50억이던가?”
“네. 50억이 회장님의 이름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 내가 50억을 더 밀어 넣어 100억을 만들어주지. 어떤가? 이 정도면 나에게도 좀 알려줄 수 있겠나?”
한진영은 이정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50억이 아니라 500억을 내어주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 이거 섭섭한데.”
조금 전까지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던 이정훈은 한진영의 단호한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의 표정에 찔끔하여 한진영에게 나서려 했다.
하지만 이성우보다 한진영의 손이 먼저였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나서지 못하도록 막아 세운 후 이정훈에게 말했다.
“이번은 회장님 차례가 아닙니다.”
“이번은…… 아니라고?”
“네. 이번 차례는 윤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 차례가 오면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내 차례가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먼.”
“설마 차례가 없을 것 같아 오늘 이렇게 절 찾아오신 겁니까? 다른 중요한 사람을 만날 기회도 저버리고요? 그렇다면 오히려 제가 섭섭합니다. 저는 회장님과 앞으로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로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이거 참 재미있는 친구야.”
굳었던 이정훈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리고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한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모습이 윤길영의 눈에도 들어온 듯했다.
윤길영은 잠시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윤길영의 시선을 모르는 척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정훈을 향해 말했다.
“성우가 저와 함께 있는 한 회장님과의 관계는 계속될 겁니다.”
“성우가 함께하는 한?”
“네.”
이정훈의 눈이 이성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정훈의 곁에 있는 이유정도 이성우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이성우에게 꽂혀 들었지만, 시선의 온도 차는 극명했다.
흥미롭다는 눈빛의 이정훈과 달리 이유정의 눈빛은 날카롭기만 했다.
이정훈은 마땅치 않은 이성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만약 내가 성우를 내치면?”
“그럼 저와의 인연도 여기까지겠죠.”
“오호. 나와의 인연이 그것밖에 안 된다?”
“그럴 리가요. 다만 그것보다는 성우와의 관계가 더 끈끈하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성우는?”
“완전히 끌어당겨야죠. 다시 돌아갈 집이 사라졌으니 거칠 것이 없을 테니까요. 제 옆에 완전히 가져다 놓을 생각입니다.”
이정훈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자네에게 이성우가 그 정도인가?”
“네. 그 정도입니다.”
“흐음…… 그래? 그럼 내가 그동안 잘못 본 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못 본 것이겠지요. 이성우란 존재를 말입니다. 장담합니다. 저쪽에 있는 저 젊은이들보다는 여기 있는 성우가 더 낫습니다.”
단호한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이 미소 지었다.
“좋아.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내가 못 본 게 무엇인지 잘 살펴봐야겠구먼.”
이정훈은 이성우를 위아래로 살폈다.
이성운은 그런 이정훈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몸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지금 자리에서까지 이정훈의 시선을 피했다가는 두 번째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렇게 이성우를 살피던 이정훈은 다시 고개를 돌라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네. 윤 회장하고 이야기 잘하고…… 내 차례를 기다리도록 하지.”
“반드시 회장님에게도 차례가 갈 겁니다. 그건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좋아. 그날을 기다리겠네. 가자.”
이정훈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이유정은 한진영을 향해 떠나기 전에 말을 건넸다.
“조만간 따로 봬요.”
“기회가 되고 시간이 된다면 뵙도록 하죠.”
“기회와 시간을 어떻게든 만들 테니 꼭 뵈었으면 좋겠네요.”
한진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정은 찬바람이 나게 몸을 돌리고는 이정훈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휴우~ 누구예요? 아주 찬 바람이 쌩쌩 부네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김준하가 이유정이 떠나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우는 김준하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내 동생.”
“무슨 동생이 저래요?”
“그러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진영아.”
이성우는 한진영을 끌어안았다.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지 몰랐다. 고마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하자.”
한진영이 자기를 끌어안은 이성우를 슬며시 밀어냈다.
그리고 옷이 구겨지지 않았는지 살피며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너를 기풍철강의 꼭대기 자리에 앉혀주겠다고…….”
“믿었지. 믿고 있지. 네 덕분에 나를 아버지가 다시 살피겠다고도 하셨고…… 하여튼 나는 너만 믿어.”
“알았으니까 앉자. 사람들이 쳐다본다.”
한진영은 이성우를 잡아 앉히고는 다시 먹던 것을 마저 먹으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준하가 한진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성우 씨를 기풍철강의 총수로 만들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어. 맞아.”
“그게…… 가능해요?”
“쉽지야 않겠지. 그런데 못 할 것도 없어.”
김준하는 한진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알면 알수록 대단하게 보이는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럼 제가 설계한 상품을 대한정유 회장님에게 팔아먹겠다고 말하신 것도 농담이 아니겠네요.”
“내가 주말 황금 같은 시간에 여기에 와서 이러는 게 농담을 하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여?”
“그건 아니지만…….”
“믿어. 믿고 따라와.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니까.”
한진영은 웃으며 김준하 앞에 놓인 접시를 나이프로 가리켰다.
“그리고 어서 먹어둬. 이따가 또 한바탕해야 하니까 든든히 먹어둬야 해. 성우야. 너도 먹어라.”
“그래. 알았어. 많이 먹어야지.”
한진영 일행은 서로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직하게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2부까지 마친 예식은 이제 점점 빈자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쁜 사람들 위주로 자리가 비기 시작해서 이제는 절반 이상이 주인을 잃은 채 남아 있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랑신부가 호텔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슬슬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던 한진영 일행에게로 조금 전 대기실에서 봤던 윤길영 회장의 비서가 찾아왔다.
“자 그럼 예식 2부는 끝이 났지만, 우리만의 2부를 시작해볼까? 가자.”
한진영이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진영의 뒤를 이성우와 김준하가 따랐다.
삼각편대를 이룬듯한 셋은 조금 전과는 다른 곳으로 수행비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빈관 지하에 이어진 통로를 통해 버스톤호텔 내부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리고 버스톤호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셋을 가장 꼭대기 층에 준비된 스위트룸으로 윤길영의 비서가 안내했다.
“이거 내가 신혼부부가 된 기분이네. 내 신부는 누구냐? 성우냐? 아니면 준하냐?”
잔뜩 긴장해있는 이성우, 김준하와는 달리 한진영은 여유롭기만 했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방 문 앞에 도착한 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비서는 한진영 일행이 도착했음을 윤길영에게 알렸다.
“그래. 안으로 모셔.”
윤길영의 지시에 비서는 한진영을 스위트룸에 자리한 회의실로 안내했다.
기다란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던 윤길영은 들어오는 한진영을 확인하고 자기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지. 앉아.”
“이번에는 저에게 몇 분을 할애하실 생각입니까?”
“와이프가 쏘아내는 레이저 같은 눈빛을 맞으면서 이곳에 왔으니 몇 분으로는 끝나지 않겠지. 시간제한이 없으니까 어디 하고 싶은 말 다 해보게.”
“다행이군요. 그럼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서에게 차를 내올 것을 지시했다.
풀어헤쳐 진 넥타이와 벗어버린 재킷 그리고 손목까지 풀어낸 것이 이제 더는 자식의 결혼식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한 윤길영의 태도였다.
아무래도 조금 전 이정훈이 찾아온 것이 윤길영을 자극한 듯한 모습이었다.
윤길영은 곁에 자리한 의자 머리 부분에 팔을 얹은 채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의 따가운 시선을 맞으며 이야기했다.
“저는 협상 자리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마치 시장에서 천 원을 깎기 위해 상인과 실랑이하는 재미를 협상 자리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 자리에서는 그런 신경전은 벌이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군. 나하고는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아. 나는 나와 머리 싸움하려는 사람을 질색하거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겠다는 말에 추임새를 넣는 윤길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한진영이 말했다.
“제가 그리스 이야기를 회장님에게 이야기한 것은 회장님께 위험을 회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회피하는 게 아니다? 그럼? 돈이라도 벌라는 이야기인가?”
“맞습니다. 돈을 벌 기회를 드리려 합니다.”
“기회를 준다?”
윤길영은 흥미를 느꼈는지 왼손을 들어 다음을 이야기하라는 뜻을 전했다.
한진영은 윤길영이 자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장이 혼란해지면 기회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기회를 잡고 싶어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지요. 그게 다 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입니다.”
“만나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바로 들으셨습니다. 시장이 혼란한 시기에 저를 만나는 것은 돈을 벌 기회를 잡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 회장 때처럼?”
“그렇지요. 정 회장님도 두바이라는 혼란 속에서 저를 만나 한몫 단단히 잡으셨지요. 이제는 회장님 차례입니다. 어떠십니까? 제가 드린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딸의 결혼식 때도 굳어있기만 하던 윤길영의 표정에 웃음기가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