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너희는 날 믿고 따르기만 하라
윤길영의 비서가 차를 내오자 윤길영은 한진영 등에게 차를 권했다.
“마셔봐. 내가 좋은 친구들에게만 내어주는 차니까.”
“저를 친구로 여겨주신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아직 친구까지는 아니지만 친구가 될 가능성이 크지. 자네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말이야.”
“그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을 한 것 같은데요?”
“하하하. 맞아 장족의 발전이야.”
윤길영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내뱉고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진영도 그런 윤길영의 웃음에 마주 웃어 보이고는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한동안 그렇게 차 맛을 음미하던 윤길영이 먼저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제 말해보게. 나에게 어떻게 돈을 벌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윤길영의 말에 한진영은 차를 입에 잠시 머금은 뒤 찻잔을 내려놓은 후 대답했다.
“제가 어디 소속인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성증권? 나에게 주식이라도 사라고 하려고?”
“글쎄요. 그건 회장님 개인의 이익을 위하는 길이겠지요. 저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마치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
말을 하던 윤길영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혹시 대한정유에 이익이 될 길을 찾아 왔다는 건가?”
“그렇지요. 바로 저는 대한정유의 이익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의자에 올라가 있던 윤길영의 팔이 테이블 위로 자리를 옮겼다.
윤길영은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리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어떻게 대한정유에 이익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경청할 준비가 된 윤길영을 향해 한진영은 자기가 준비해온 것들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충격파가 터지면 제일 먼저 외환시장이 꿈틀거릴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IMF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곳은 그 충격이 작지가 않겠지요. 지난 서브프라임 때도 보셨지요? 당시 정부가 삽질한 것도 있었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환율시장이 요동치던 것을 말입니다.”
“봤지. 덕분에 우리도 손해가 만만치가 않았어. 원유를 들여와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환율의 변동은 달가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충격에 대비한 선도환 거래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선도환 거래란 미래의 일정 기간 내에 일정 금액을 일정 종류의 외환으로 거래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환율 변동에 대한 리스크를 상쇄하기 위한 장외시장의 파생상품으로 헤지의 개념으로 많이 사용되고는 했다.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선도환 거래는 우리 같은 기업들에는 필수나 마찬가지인 상품이네. 그래서 우리도 자주 사용하고는 하는데…… 자네의 이야기는 전혀 특별하지가 않아.”
“성격이 급하시군요.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좋아. 그럼 어디 해보게. 이제부터 조용히 있을 테니까.”
“그럼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선도환 거래에서 기간을 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운더리를 좁혀 드리면 그에 따른 수익은 상상 이상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통화스와프(CCS)도 중개하여 걸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화스와프까지 도대체 자네는…… 달러가 얼마까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건가? 웬만한 변동으로는 수수료로 모든 걸 다 까먹게 보이는데?”
“지금 환율이 1,200원 언더지요? 1,100원대 중후반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원달러 환율이 최소 1,500원까지 오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뭐?”
윤길영은 고개를 꺾어 한진영을 바라봤다.
환율 변동이 30% 이상 나온다는 이야기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환율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또 있다고?”
“정말 중요한 게 있지요. 원유 선물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래. 그것도 있었지. 환율에 정신이 팔려 나도 정말 중요한 걸 생각하지 못했구먼. 이야기해보게.”
“식장 대기실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50불까지 보고 있습니다. 선물 매도와 풋옵션 매수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윤길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을 매도한다면 헤지의 형태로 콜옵션을 매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매매의 형태였다.
그래야 위험을 회피할 수 있으며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진영은 헤지가 없는 네이키드 포지션을 제안하고 있었다.
아무리 큰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야 할 네이키드 포지션을 제안하는 한진영의 태도에 윤길영은 웃고 말았다.
“계속해보게.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하니까 말이야.”
“마지막으로 유럽 채권 매수를 권하는 바입니다.”
“유럽 채권을 매수하라고? 지금 우리가 그리스가 파산하니 마니 하는 문제로 여기 모여있는 것 아니었나?”
“맞습니다. 하지만…… 뭐 결과만 말씀드리면 이번도 두바이 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두바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파산은 없습니다.”
한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윤길영은 이런 한진영의 태도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 미치겠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린 윤길영은 손가락을 들어 한진영을 가리키고 말했다.
“외환 상품에 원자재 선물 그리고 채권까지…… 나한테 이 모든 것을 팔아먹을 생각으로 내 앞에 앉아있는 거였나?”
“네. 속이지 않겠습니다. 그게 제 진심입니다.”
“내가 얻는 건 그 상품들을 매입해서 돈을 버는 것이고?”
“정확히 이야기하면 대한정유가 돈을 버는 것이겠죠. 뭐 대한정유가 곧 회장님이니 회장님이 돈을 번다고 볼 수도 있고요.”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복잡해. 만약에 한다고 한다면 그중에 하나만 할 생각이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중개할 건 세 가지지만 회장님이 사시는 건 하나의 상품이 될 테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한진영이 곁에 앉아 있는 김준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친구가 세 가지 상품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세 가지를 하나로 만든다고?”
“일종의 맞춤상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타겟은 바로 그리스 사태가 벌어질 때입니다. 시기는 내년 봄이며 각 상품의 타겟 가격들까지 다 나와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목표가 확실한 때는 일하기가 편하지요. 저희가 그 타겟에 맞는 상품들을 모아 하나의 상품으로 설계하여 회장님 앞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회장님은 그걸 사시면 되고요.”
“이거 참…… 흐흐흐…….”
윤길영은 한진영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자네…… 내가 듣기로는 신성증권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친구라고 하던데. 그게 맞나?”
“맞습니다. 이제 막 2년 차에 접어들려 하고 있습니다.”
“신성증권. 신성증권…….”
윤길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했다.
“네 아버지가 신성증권을 인수하려고 했던 건 알고 있냐?”
“네 알고 있습니다.”
“한때 신성증권이 매물로 나와 나도 관심을 두기는 했어. 하지만 나와 네 아버지가 손을 놓았을 정도로 회사 상태가 좋지 못해. 규모도 우리나라 메이저라고 부르기 좀 아쉬운 게 현실이고…… 그래서 평소라면 신성증권 사장이 찾아와도 만나봐 줄까 말까 할 텐데…… 지금은 자네 같은 애송이를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참…….”
윤길영은 고개를 다시 한번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성우는 윤길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가만히 앉아 있는 한진영을 확인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윤길영은 앉아있는 한진영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세 개를 가지고 오든 하나를 가지고 오던 한번 가지고 와봐. 검토해보지.”
“만족스러운 상품을 만들어 가지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흐흐흐. 이거 참…….”
윤길영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갔다.
“휴우~”
윤길영이 나가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이성우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의자에 기댄 채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오늘 네가 하는 이야기 진짜냐? 그리스 이야기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허튼소리 한 적 봤냐?”
“그럼…….”
“걱정하지 마. 너하고 최 과장님에게 다 때가 되면 알려줄 테니까. 주식 쪽은 지금 움직일 타이밍이 아니야.”
“그럼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대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 정도는 나도 알지. 나 입 무거운 건 너도 알잖아.”
“그걸 알아서 너를 데리고 자리에 온거야.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니까 너도 내가 알려줄 때까지 입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
“그래. 알았어.”
한진영은 이성우를 단속하고는 여전히 굳어있는 김준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넌 또 왜 그래?”
“제가…… 그걸 다 설계해야 하는 건가요?”
“뭘 새삼스럽게 몰랐다는 듯이 그래?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알려줬잖아. 네가 설계해야 한다고.”
“저는 그래도 단순한 몇 가지 상품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선도환에 원자재 그리고 국가 채권까지 합친 상품을…… 제가 어떻게 만들어요?”
“왜? 못할 거 같아 그래?”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이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듯이 김준하도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도 제대로 된 일을 해본 적이 드문 김준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며 매번 주눅 든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깔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건넨 일이라고는 보잘 것 없는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김준하에게 한진영은 상품을 설계하라고 했다.
김준하는 벌써 심장이 뛰어 터질 것만 같은 압박감을 받기 시작했다.
“저는…….”
“네가 하지 않으면 안돼. 내가 지금까지 떠든 건 네가 한다는 전제로 떠든 거야. 네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니까 너는 절대 못 한다는 말 하지 말아.”
“그래도…….”
“여기서 그래도는 말하면 안 돼. 무조건 알았다는 이야기만 해야 해. 자 해봐.”
“네? 뭘요?”
“할 수 있다고 대답하라고.”
김준하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성우는 한진영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성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 손가락을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든 후 김준하를 쏘아봤다.
한진영의 말대로 김준하가 상품을 설계한다는 계산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여기서 김준하가 못한다고 뒤로 드러누워 버린다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한진영은 예상하고 있었다.
김준하의 성격상 갑작스럽게 다가온 부담감을 견디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자리에 끌고 온 것은 직접 부담감을 눈으로 보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봤을 때 극복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너에게 동아줄은 나밖에 없어. 이대로 그냥 줄을 놓아 버릴래?”
“내가 할 수가…….”
“할 수 있어. 할 수 있으니까 너를 데리고 왔지. 자 어서 대답해봐.”
“저는…….”
한참을 머뭇거리던 김준하가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담겨 있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으며 귀도 얼굴과 마찬가지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준하가 느끼는 부담감이 얼굴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한진영은 됐다는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김준하에게 대답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했다.
결국 김준하는 한진영이 원하는 대답을 입에서 내뱉었다.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그래. 됐다.”
한진영은 밝은 얼굴로 김준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너에게 하라고 말한 거야. 잊지 마. 내가 말한 건 다 이루어졌으니까.”
“그럼 정말로 그리스…….”
“나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도 그렇고 그리스도 그렇고…… 모든 게 이루어지게 될 테니 너희는 날 믿고 따르기만 하면 돼.”
한진영은 큰 소리로 웃은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
출장을 다녀온 김정대는 팀장들을 불러모은 뒤 자리에 없던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리고 별일이 없었는지 사무실을 둘러보며 직접 두 눈으로 살폈다.
“잘 되고 있지?”
“네. 별일 없습니다.”
“모니터링은 멈추면 안 돼. 아무리 채권 거래의 대부분이 유선상으로 이루어진다지만 갑자기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한진영은 왜 보이지 않나?”
한참을 둘러보던 김정대는 한진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성현수에게 물었다.
성현수는 김정대의 말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는데 겨우 기회라 찾아온 것이었다.
성현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아까보다 조금 더 높은 톤으로 김정대에게 한진영의 태도를 이르기 시작했다.
“저도 이런 말씀까지 드리지는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부문장님께서 직접 보셨으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무슨 이야기인데?”
김정대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현수 팀장을 쳐다봤다.
성현수는 최대한 자기가 지을 수 있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지 평소 일하는 시간에도 자리를 비우기 일쑤입니다.”
“자네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네. 보고했으면 어디를 가는지 알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저한테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비웁니다. 그래서 정작 필요할 때 사람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김정대의 반응에 성현수는 이번에야말로 한진영을 제대로 쓰러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