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계획이 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김정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 장근수였다.
화를 내더라도 소리를 치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게 김정대였다.
그러나 지금 김정대의 모습은 손에 잡히는 곳에 뭐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한진영의 얼굴에 집어 던졌을 것처럼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김 부문장…… 저기…… 잠시…… 진정하고…….”
장근수가 곁에서 김정대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 한진영을 슬쩍 돌아봤다.
이제라도 한진영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면 이 정도 수준에서 끝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김정대의 화를 부르는 이야기를 계속 내뱉었다.
“사업부 전체가 달라붙어도 하지 못 할 만한 일입니다.”
“뭐?”
“하지만 김준하 하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준하에게 맡겼던 겁니다.”
“네가 뭔데 그런 결정을 내려?”
“부문장님께서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고 계신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일을 진행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김정대의 말을 받아치는 한진영이었다.
김정대를 말리던 장근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상무와 사원의 대화로 생각하지 못할 거야.”
“직위로 찍어 누르시기에는 이번 건이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진영이 장근수를 보며 웃었다.
“작지 않지. 작지 않은데 그럴 정도로 큰 것도…….”
“제가 대한정유 측에 제시할 상품의 규모는 대략 2천억쯤으로 계산이 됐습니다.”
“뭐?”
장근수는 한진영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은 장근수와 김정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설명했다.
“상품이 네 가지입니다. 그러니 규모가 커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리고 평소 중개 수수료인 5%를 적용했을 때 우리가 얻을 이익은 100억. 이 정도면 직위로 찍어 누르기에는 규모가 작지 않다는 제 말이 이해가 가시겠지요?”
“100억…… 하하. 100억. 어이. 김 부문장. 반년치 실적을 한방에 올리게 생겼네? 이거 이 친구 말대로 자네가 마냥 뭐 하는 짓이냐고 다그치기에는 너무 큰 수준 아니야?”
FICC 사업부를 새로 신설하며 세웠던 한해 목표가 200억 실적 달성이었다.
그런 목표의 절반을 한방에 올리게 생겼으니 장근수의 입에서 웃음이 터진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김정대는 한진영의 말을 듣고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도 마냥 화를 내기에는 지금 한진영이 가져온 일감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다급히 움직이고 부문장님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준하 혼자에게 일을 맡긴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이런 큰 규모의 일을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없어서입니다.”
차분히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김정대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한진영은 2,000억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태도가 바뀐 김정대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웃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붙어 일을 진행하다가는 실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부문장님께서도 그게 걱정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게 가장 큰 걱정이야. 복잡한 만큼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실수 한 방에 회사가 넘어갈지도 모르는 손해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맞습니다. 100억 실적이 1,000억의 손실로 둔갑하여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소수의 인원이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준하를 생각한 것이고요.”
“네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이제 이해가 된다지만…… 김준하는…….”
“부문장님. 그 친구가 계산한 것들을 자세히 본적이 있으십니까?”
“자세히?”
김정대는 한진영의 질문에 가만히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김정대의 기억 속에 김준하에 대한 것이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조차도 지금 정확하게 떠올리라면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있는 존재였다.
“제대로 본 적이 없으시죠?”
김정대의 표정으로 그럴 줄 알았다는 한진영이 먼저 이야기했다.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난달에 정운산업에서 발행한 채권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5년 만기 30억 채권 발행을 우리에게 맡긴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 채권의 이율을 김준하가 계산했습니다.”
“그걸…… 김준하가 계산했다고?”
“네. 확인해보십시오.”
김정대는 가만히 지난 정운산업의 일을 떠올렸다.
정운산업이 채권발행을 결정했을 때와 채권이 발행됐을 때의 기업평가가 바뀌며 일이 꼬여버린 사건이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채권발행을 연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요자 예측과 흥행을 위해서 이율 조정이 필요했고, 거기에 맞는 계산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일정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운산업 입장에서는 시간이 촉박하여 일정 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신규 채권을 발행하여 기존 채권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정상으로 도저히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했다가는 터무니없는 이율로 흥행에 실패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골치 아픈 상황에서 김정대는 주관사의 지위를 포기하려는 결정을 하려고도 했다.
30억짜리 채권에 너무 신경 써야 할 게 많아 한동안 김정대는 정운산업의 일을 보고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난 뒤 정운산업의 일이 잘 마무리됐다는 보고를 받고 김정대는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일정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일정에 맞춰 채권이 발행됐고, 흥행 또한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마무리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이 좋았거나 아니면 정운산업이 채권 발행하는 시점이 우연히 좋은 시기여서 일이 잘 마무리 된 줄로만 알았다.
“그걸 정말 김준하가 혼자 했다는 건가?”
“부문장님께서도 골치 아파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보고도 받지 않고 놔두셨고요. 그러니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일거리를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고 하더군요. 잘못되더라도 크게 혼나지 않을만한 작업이라고요. 그렇게 준하에게까지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걸 김준하가 처리해서 마무리했고?”
“네.”
장근수는 가만히 이야기 듣다가 김정대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이번 건도 혼자 할만하다는 이야기냐?”
김정대는 장근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근수는 김정대의 확인을 듣고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럼 됐네. 진영이가 처리 잘한 거구만. 너 없는 사이에 큰 건 물어왔고 처리도 잘했으니 잘한 거네. 이제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우선 시작은 김준하 혼자 했습니다. 틀을 잡고 나면 다른 직원들이 투입돼도 괜찮을 겁니다. 그러니 부문장님께서도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직원들은 하지 못한다는 주장에서 한걸음 물러선 한진영이었다.
김정대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휴우~ 그래. 내가 놓친 걸 네가 정확하게 찾아냈구나.”
한숨 뒤에 잠시 뜸을 들이던 김정대는 한진영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번 건. TF팀을 네가 꾸려서 진행해라.”
“뭐?”
곁에서 이야기 듣던 장근수가 크게 놀랐다.
“TF팀을 꾸리라니? 그리고 그걸 진영이에게 꾸리라고 말하는 거면…… 진영이보고 팀장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네가 왜 그렇게 놀라? 정작 당사자인 한진영이는 저렇게 담담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데.”
김정대의 이야기에 장근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한진영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차분한 모습으로 김정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장근수는 한진영의 표정을 확인한 뒤 김정대에게 말했다.
“내가 왜 놀랐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이제 겨우 2년 차에 접어든 새파란 아이를 팀장 자리에 앉혔다고 그러는 거야?”
“그거야 너희 사업부 일이니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 알 바 아니야.”
“그게 아니면 왜 놀랐는데?”
장근수가 한진영을 향해 손을 펴서 가리켰다.
“얘 잠깐만 데리고 있으라고 했지? 내가 데리고 갈 거라고…… 그런데 왜 팀장 자리에 앉혀? 내놓지 않겠다는 생각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시끄러워. 너 이제 그만 가라.”
“야!”
김정대는 자기 품에 들어온 한진영을 데리고 가겠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장근수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진영을 바라본 후 말했다.
“김준하에 대한 판단은 잘했다. 그래. 맞는 일이라면 나한테 욕을 먹을 줄 알면서도 그렇게 밀어붙여야지. 그리고 네가 맞다는 것을 나에게 설득하는 과정도 좋았다. 그러니 네가 팀장 맡아서 진행해. 넌 그럴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TF팀을 꾸려 FICC 사업부를 본부 나아가서는 센터로 만드는 초석을 다지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는 눈을 반짝였고 장근수는 크게 놀랐다.
“얀마. 너 여기서 뼈 묻을 생각이야? 너는 우리 본부로 나와 함께 가야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러십니까?”
“당연하지. 센터까지 가려면 규모가…….”
“걱정 마십시오. 장 본부장님과도 함께 일할 날이 있을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무엇으로 FICC까지 오게 됐는지 말입니다.”
“내 말이…… 너는 주식도…….”
장근수는 한진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 한진영의 미소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 자식. 너 다 계획이 있구나?”
“FICC의 초석을 다지고 가겠습니다. 제 자리를 비워놓고 계실 거죠?”
“너 인마. 너…… 너……!”
장근수는 한진영의 대답을 들어서 그런 건지 기쁨에 찬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김정대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잘 데리고 있어. 내 거 상처 나지 않게.”
“네 거 되거든 그때 이야기해. 아직은 내 거야.”
김정대 앞에서 후일을 이야기하는 장근수와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김정대는 그런 그들의 대화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센터까지 가는 길을 닦아 놓겠다는 이야기가 계속 김정대의 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진영. 네가 지금 여기서 한 말 명심해. 분명 여기 FICC 사업부를 센터까지 올린다고 그랬어.”
“걱정 마십시오. 센터장의 자리에 앉는 날 술 사주시며 오늘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셔야 합니다.”
“나 기억력이 좋지 못해. 특히 나이 먹으면서 점점 기억력 감퇴가 빨라졌어. 나이 더 먹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무 나이 먹지 않기 전에 나에게 축하주 얻어 마셔야 할 거야.”
“아이들 학자금 걱정을 끝마치기 전에 얻어 마실 테니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하하하. 말은…….”
김정대의 아이들은 한창 고등학생의 나이였다.
대학을 마치기 전이라고 이야기하니 4~5년 이내에 축하주를 얻어 마시겠다는 말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김정대가 좋아하는 만큼 장근수도 흐뭇해했다.
4~5년 이내에 FICC가 센터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는 한진영이 넘어오는 날도 그 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간단한 몇 마디 말로 김정대와 장근수를 만족시킨 한진영은 가만히 둘을 바라봤다.
그리고 FICC가 사업부에서 센터까지 성장했던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은 초기 단계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FICC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중요도가 높아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가만히 있어도 달성될 일에 가속도를 붙여주는 역할을 하려 했다.
속도가 빨라진다면 자기의 성장 또한 같이 속도가 빨라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생색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루어질 일이더라도 먼저 말을 해버리면 그 일은 말한 사람의 성과가 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은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기가 FICC를 센터로 키우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제 FICC가 센터로까지 성장하게 된다면 그건 모두 한진영의 성과가 되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만족해하는 그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
FICC 사업부는 요동쳤다.
한진영을 중심으로 한 TF팀 신설 이야기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부문장님!”
가장 극렬히 반응한 것은 역시 예상대로 성현수 채권팀 팀장이었다.
“부문장님. 이제 갓 입사한 한진영이를 팀장으로 앉힌다니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
“네. 지금까지 우리 신성증권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성현수가 머리를 책상에 박을 듯이 숙이고 김정대에게 부탁했다.
김정대는 그런 성현수를 앉은 채 바라보며 말했다.
“한진영이가 이번에 따온 계약 들어봤나?”
“이야기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계약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겁니다. 아무것도 드러난 게 없지 않습니까? 계약서에 사인도 하지 않은 거고…… 계약서조차 작성되지 않은 일을 어떻게 따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TF팀을 구성한다고 하는 거 아닌가?”
“부문장님.”
김정대는 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팀장들을 둘러보고 회의실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자그마치 2천억짜리 계약이 될지 모르는 일이야. 이걸 성공시키면 우리가 받을 수수료만 100억이야. 100억. 이런 대형 계약을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온 사람이 있어? 있으면 어디 말해봐.”
김정대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2천억은 고사하고 200억짜리 계약도 따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말했다.
“이번 계약만 이뤄진다면 FICC 사업부의 위상이 달라질 거야.”
“부문장님.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내세워야 합니다.”
“제대로 된?”
“네. 최소한 회사의 얼굴이 될만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성현수가 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팀장들을 돌아봤다.
자기의 말에 맞장구를 쳐 달라는 뜻이었는데 다른 팀장들은 그런 성현수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런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회사생활을 통해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