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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71화 (71/650)

71화 제일 힘든 것 몇 개만 정리하자

성현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미 이야기를 꺼낸 데다 죽어도 한진영이 자기와 같은 위치에 서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대는 고집스러운 성현수의 표정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 말 한번 잘했네. 그럼 자네 생각에 누가 회사의 얼굴이 될만한 사람 같나?”

“아무렴 한진영보다는 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풋. 자네가?”

김정대의 웃음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몇몇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현수는 자기를 향해 웃음을 흘리는 사람들을 돌아본 뒤 말했다.

“한진영은 사원입니다. 그에 비해 저는 팀장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래서 한진영을 팀장으로 만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성현수는 김정대의 말속에서 자기를 한진영의 비교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성현수는 멈추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한진영이 팀장 자리에 앉는 것만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었다.

“제가 우리 회사의 얼굴이 되지 못한다면 부문장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나?”

“그렇습니다. 이런 큰 건에는 부문장님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가? 다들 나하고 비슷한 생각 하지 않아? 말들 좀 해봐.”

이번에는 성현수의 말이 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성현수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던 사람들도 이번에는 성현수의 말에 동조하는 빛을 보인 것이었다.

성현수는 분위기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용기 내 계속 이야기했다.

“FICC 사업부가 설립된 이래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건입니다. 이런 일에 어떻게 사원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부문장님이 앞에 나서야지요.”

“그래?”

김정대가 흥미를 보인다는 생각에 성현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물론 한진영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의 공을 인정해줘야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업부의 구성원이자 채권팀의 팀원으로서 인정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 이상을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현수의 말에 자리에 있던 팀장들은 성현수의 말이 타당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수는 다른 팀장들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놨다. 정말 한진영이 팀장이 되는 줄 알았네.’

이대로 그냥 회의가 진행됐다면 당연히 한진영이 TF팀의 팀장으로 낙점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채권팀의 팀원 자리에서도 나온다는 것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밑에 있어야만 언제가 되었건 자기 손으로 그를 쫓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성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김정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부문장님. 그리고 부문장님을 뒤에서 서포트하는 일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자네에게 서포트를 맡겨달라?”

“네. 전면에 부문장님께서 나서시고 뒤에서 제가 일을 진행한다면 그 어떤 조직보다 팀워크가 맞을 거로 생각합니다. 물론 한진영을 빼놓을 수 없으니 한진영이도 채권팀의 팀원으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진영도 군소리하지 못할 겁니다.”

성현수의 말에 팀장들은 그게 맞는다는 눈빛을 보였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이게 가장 맞는 구성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현수는 김정대가 자기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된다면 실무는 자기가 보지 않겠냐는 기대도 하게 됐다.

김정대 부문장은 얼굴마담의 형태로 움직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성과도 내 몫이 가장 클 수도 있어.’

한진영을 끌어내는 것 외에 자기가 이번 일의 가장 큰 주축이 되어 움직일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성현수였다.

그리고 일을 잘 처리한다면 팀장 자리를 넘어 차기 사업부 부문장 자리까지 노릴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현수가 기분 좋은 미래를 꿈꾸며 미소 짓고 있을 때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던 김정대가 입을 열었다.

“성 팀장의 말이 타당하기는 해. 한두 푼짜리 일도 아니고 이런 일에 한진영이 같은 초짜를 내세운다는 게 사실 말이 되지 않지.”

“맞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 사업이라면 내가 나서는 게 맞기도 하고.”

“바로 그겁니다.”

성현수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이번 사업을 잘 진행하여 공로패를 받는 자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성현수의 상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소리를 김정대가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나? 대한정유의 윤 회장님은 나도 만나 뵐 수 없는 분이니 말이야.”

“네?”

“나뿐인가? 내 생각에는 우리 신성증권의 사장님이 가시더라도 약속을 잡으려면 족히 두세 달 전에 넣어야 가능한 일일 텐데…… 내가 한진영을 밀어내고 전면에 나서겠다고 하면 윤 회장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그게 무슨…… 부문장님.”

“왜? 내 말이 거짓말 같나? 대한정유야 대한정유. 아니. 대한그룹이라고 불러야 맞겠지. 대한그룹의 윤길영 회장님. 그분을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 같은가?”

성현수는 김정대의 말에 장밋빛 미래가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한진영은 만났어. 만났다 뿐이야? 만나고 그분께 제안까지 했어. 그리고 그걸 회장님께서는 받아들이려고 하시고…… 상품을 설계해서 가지고 와보란 말. 이 말을 한진영이 듣고 왔는데 듣고 온 사람은 뒤로 밀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앞에 나서라고? 그것도 나보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자네는 그런 제안을 하는 건가?”

“부문장님…… 저는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

“됐어. 듣기 싫어.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어.”

김정대는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팀장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사원이라는 직위는 바뀌지 않아. 그것까지 손대기에는 나도 보고해야 할 게 많고 따져야 할 게 많으니까 시간이 없어. 대신 팀원에서 팀장으로 직책만 바꾸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에 걸맞게 새로운 팀을 하나 만드는 것이고…… 이건 내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누구의 간섭 없이 만들 수 있어. 그런데도 내가 그냥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네들을 자리에 불러 모은 건 내 결정을 막으라는 뜻이 아니야.”

김정대는 말을 하고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는 성현수를 슬쩍 돌아봤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김정대가 지금의 말을 성현수를 향해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날이 어두운 진창길로 변했음도 함께 알게 됐다.

김정대는 성현수를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진영이 이제 팀을 나누며 팀원들을 뽑아 갈 거야. 거기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라는 뜻에서 이렇게 모아놓은 뒤 이야기한 거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김정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성현수처럼 모가지를 걸고 다른 의견을 내세울 만큼 한진영에 대한 미움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문장님.”

외환팀의 팀장이 김정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저기…… 도대체 한 팀장이 무슨 상품을 대한정유 측에 팔기로 한 겁니까?”

“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먼. 이 자리를 통해 설명할 테니 잘 듣게.”

김정대는 한진영과 의견을 나눠 설계하려는 상품의 초안을 정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리에 있던 팀장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리스 이야기는 빼놓았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이 알면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 많은 것을…… 섞어서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고요?”

이야기를 들은 외환팀 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정대를 바라봤다.

김정대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것 이해해. 그리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아. 그 이유는 내가 자네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기 때문이야.”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말해주기 어려워. 대신 그것 때문에 회장님이 우리의 상품에 관심이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 정도라면……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인가 봅니다.”

“그래. 엄청 중요해. 그러니 자네들은 거기까지만 알아.”

자리에 있던 팀장들은 고개를 돌려 성현수를 슬쩍 바라봤다.

애초에 씨알도 안 먹힐 일을 성현수가 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성현수는 김정대의 말을 듣고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진작에 그런 말을 해줬으면 한진영이 팀장 자리에 앉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대한정유 회장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를 하고 계약을 따내 왔다는데 바보가 아닌 한 그걸 반대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팀장들은 불쌍한 듯 성현수를 쳐다봤고, 김정대는 그러기에 왜 그랬냐는 눈으로 성현수를 바라봤다.

***

김정대 FICC 사업부 부문장과 각 팀장 간의 대화가 끝이 난 후 FICC 전체가 들썩였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사람이 각 팀에서 뽑혀 나갈 거라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팀은 TF팀에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TF팀은 이 시간부터 단독으로 일을 진행할 거라는 발표도 뒤를 이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TF팀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사업부가 들썩이는 것과 달리 한진영은 차분하기만 했다.

한진영은 가만히 김준하의 책상 옆에 앉아 김준하의 계좌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한결 깔끔해진 계좌 상태였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있는지 한진영은 김준하의 계좌를 계속 노려보는 중이었다.

김준하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지금 사업부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주인공이 한가롭게 남의 자리에 앉아 남의 계좌만 바라보고 있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러고 계셔도 돼요?”

“나도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어. 그런데 그러지 않을 수가 없잖아.”

한진영은 계좌의 주인인 김준하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짜증 냈다.

“넌 도대체 뭔 계좌를 이렇게 작살을 내놔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 지금 이게 뭐냐? 아무리 정리하고 정리해도 깔끔하지가 않아.”

“지금 제 계좌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봐요. 김준하 씨. 당신 계좌가 제일 문제예요. 너 이번 달 낼 돈은 다 해결했어?”

“해결…… 했어요.”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보고 혀를 찼다.

“그래. 뭐 이자 내는 거야 어떻게든 해결했겠지. 그래서 생활비는?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건데?”

“생활비는…… 그래서 집을…….”

김준하가 슬쩍 눈을 떠 한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의 행동에 어이없어했다.

“야. 이미 저축은행에 잡혀있는 그 집을 뭐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나가면 2천만 원은…….”

“2천만 원은 살릴 수 있다? 그럼 어디서 살려고?”

“그게…….”

김준하가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향해 손을 저었다.

“나 쳐다보지 말아라. 나는 너 재워줄 생각 없다. 네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기는 한데 같이 살 만큼 너에 대한 애정도가 높지가 않아요. 내가.”

“제가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도 하고 설거지에 분리수거까지 다하겠다고?”

“네.”

김준하가 한진영의 말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밝게 웃고 있는 김준하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돼요. 이 사람아. 나는 누구와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에요.”

“제가 다 하겠다는 데도요? 방만 하나 내주세요. 그리고…… 그럼 제가 방값도 낼게요.”

“방값 낼 수 있으면 그 돈으로 생활비를 하세요. 네?”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그 돈이 있다면 생활비로 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흐음…….”

한진영은 가만히 계좌를 지켜봤다.

수십 개의 종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 약 세 개의 종목으로 압축시켜 놓은 상태였다.

앞으로 가장 오르기 좋은 종목이었고 안정적인 종목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이거지…….”

한진영이 돈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식쟁이들의 글러 먹은 마인드를 고치기 위해서는 돈을 지원하는 방법이 가장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 줘봐.”

한진영은 김준하 책상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A4용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김준하는 한진영이 가리킨 종이를 불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건 또 왜요?”

“이리 줘봐. 다시 한번 지금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해보려고 그러니까.”

김준하는 A4용지를 집어 한진영에게 내밀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은 종이를 받아 들고 김준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렇게 외면하지 마. 이게 다 네가 그동안 해 먹은 것에 대한 결과니까.”

종이에는 김준하의 빚 내역이 적혀 있었다.

어디에서 얼마를 빚졌고 남은 금액이 얼마인지 상세히 적혀져 있는 종이였다.

한진영은 김준하에게 건네받은 빚 내역을 받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종이에 적혀 있는 것들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제일 금리가 높은 게…… 보자…… 카드론. 이게 22%지? 거기다 원금까지 같이 갚는 거라 가장 부담되고…….”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뭘 그런 표정을 지어? 네가 해 먹은 거야.”

“알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담담히 받아들여.”

한진영은 김준하를 한번 나무라고는 다시 종이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이율 높은 것들 몇 개만 정리해도 살만하겠지? 지금은 월급을 빚 갚는데 다 꼬라박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잖아. 그렇다고 나 따라 프로젝트 진행한 뒤에 받는 성과급을 기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고…… 그치?”

“방법이…… 있어요?”

“없어도 만들어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네가 상품을 설계하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게 먼저일 것 같으니까.”

한진영은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11월 초.

대형 사고가 조만간 터질 시기가 다가왔음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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