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네 상황이 확신을 만든다
거래가 안 되는 종목이지만 알토란 같은 돈은 빼먹어야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매도주문을 넣고 있었다.
민국은행이 하루 5% 이상 하락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에서 나온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거래량은 점점 많아져 갔다.
시간이 곧 돈인 순간에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휴지가 될 가능성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풋옵션 100원에 나오는 물량 싹 긁어모으고 여차하면 200원에도 물량 받아. 단, 명심해야 할 건 절대 만 주 이상을 사면 안 된다는 거야.”
“이건 휴지나 마찬가지잖아요. 그걸 100만 원어치나 사면 어떡해요?”
“의문을 가지지 마. 너는 지금 너의 매매를 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지시한 내용에 따라 클릭만 하는 것뿐이니까.”
“그럼 직접 하세요.”
“아니. 네가 해야 해. 네 손으로 직접…….”
“왜요?”
“그래야 지금까지 네가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내렸는지 직접 느낄 수 있으니까. 이번처럼 말이야.”
김준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36,000원 풋이 결제가 되기 위해서는 5% 이상의 하락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제 종가로 따졌을 때 5% 이상 하락이었다.
지금 38,000원에서 1% 이상 상승하는 상황에서는 6%가 넘는 하락이 나와야 겨우 결제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어서 뭐해? 걸어놔. 200원하고 100원에다가…….”
“하나만 여쭤볼게요.”
“어. 물어봐.”
“그럼 이게 결제가 된다고 치고…….”
“치는 게 아니라 결제가 돼.”
김준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물었다.
“그래요. 결제가 된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를 예상하고 계시는 거예요? 200원짜리도 잡으라고 하는 것 보니 250원? 300원? 300원은 좀 많나요?”
“조금 전 뭘 들었어. 35,000원 언더. 35,000원 풋까지 살아나는 거로 마무리될 테니 약 1,000원 좀 넘는 가격으로 결제가 될 거다.”
“1,000원이요?”
“그래. 그러니 100원이나 200원이 얼마나 싼 거냐? 나오면 다 받아먹어야지. 그런데 명심해라.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 사면 안 돼. 나중에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사고 빠져야 해. 대신 다른 종목들을 사면 되니까 아쉬워할 필요 없어. 37,000원짜리 풋과 38,000원짜리 풋 그리고 39,000원짜리 풋 등 여러 가지 풋을 섞어 사면 돼. 그럼 수익률이야 36,000원 풋에 몰빵하는 것보다는 좋지 못하겠지만 여러 가지를 섞어 사는 만큼 다른 사람들 이목을 속이기는 쉬울 거야. 우리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도 있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도 중요하니까.”
김준하는 한진영이 장난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자기를 놀리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호가창을 바라보는 한진영을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한진영의 표정은 진심이 묻어 나와 김준하가 어서 주문 넣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준하는 잠시 한진영을 올려다보다 지시대로 움직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우선은 한진영의 말을 믿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미 자기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었다.
이런 자기를 복구시켜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행동하는 건데 자기가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김준하는 마우스 클릭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컴퓨터가 놓여 있는 방 정도만 있어도 사는 데는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되면 이곳에 들어올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고 못 하겠지. 그리고 나도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테고…….’
김준하는 믿을만한 구석이 생겨서 그런 것인지 클릭이 과감하게 변했다.
“야야. 숫자 쪼개서 집어넣어. 귀찮다고 한방에 만 주 다 밀어 넣지 말고…… 잊지 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중요해. 어휴. 내가 옆에서 봤으니 망정이지. 그냥 너한테 시키고 알아서 하라고 했으면 어쩔 뻔했냐. 뭐해? 37,000원 풋에 물량이 또 나온다. 받아.”
한진영은 옆에 서서 쉼 없이 김준하의 행동에 지시했다.
김준하는 그런 한진영의 지시에 군소리 없이 따라 풋을 매집해 나갔다.
민국은행이 39,000원을 터치하려 하자 37,000원 풋까지 휴지가 확정됐다고 생각한 거래자들이 마구 풋에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걸 놓치지 않고 받아먹으라고 지시한 거였다.
“네. 알았어요.”
김준하는 한진영의 지시를 받아 나오는 물량들을 5만 원, 10만 원씩 쪼개 받아 갔다.
그렇게 점심 무렵까지 물량을 받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드디어 대충 그날 결제 금액의 윤곽이 드러난다는 1시쯤이 되었다.
“얼마나 매수했지? 총 매수금액 말이야.”
“천만 원어치요.”
“천만 원…… 됐어. 이제 그만해도 돼.”
김준하는 계속해서 오르는 민국은행의 주가를 확인하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민국은행의 주가는 조금 전보다 상승 폭을 더 키우며 39,000원을 돌파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김준하가 매수한 풋옵션 천만 원어치의 평가금액은 20% 이상 하락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모두 휴지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김준하는 생각했다.
“커피?”
“네?”
“커피 마시겠냐고. 아침에 오자마자 작업해서 우리 한숨도 돌리지 못했잖아. 이제 얼추 목표금액 맞췄으니 우리도 좀 쉬자.”
“네. 저도 커피요. 그거면 될 것 같아요.”
한진영의 말대로 약 네 시간 동안 여러 가지의 풋옵션을 매수하느라 쉬지 못했던 김준하였다.
그는 한진영에게 대답한 후 멍하게 조금씩 평가금액이 줄어드는 자기 계좌를 가만히 바라봤다.
천만 원을 다 잃는다고 해도 아직 남은 돈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복구의 길은 멀고 험하게 변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복구를 하기 위해서는 까마득하기만 한 데 이것까지 모두 날리게 되면 어찌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든 김준하였다.
“여기.”
김준하가 생각하는 사이 커피를 타온 한진영이 김준하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김준하는 커피를 받아 들고 앉은 채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여기서 멈추는 거예요?”
“어. 됐어. 천만 원 정도 매수했으면 됐어. 그 정도면 약 4천만 원이 되어 돌아올 테니 그거로 급한 것부터 정리해.”
“네?”
“여러 가지 풋을 섞어 사서 평균적으로 300% 수익을 보게 내가 미리 계산해둔 거야. 그러니 얼추 비슷하게 금액이 맞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300%의 수익이요?”
한진영은 커피를 홀짝이며 믿기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준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컴퓨터 책상에 걸터앉은 채 말했다.
“오늘 좀 불편한 일이 발생할 거야. 그 일로 민국은행은 폭락을 할 테고 네가 매수했던 풋옵션이 죄다 결제에 들어가게 될 거다.”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커피에 뭐가 잘못 타져 있는 건 아니죠?”
“왜? 내가 커피에 약이라도 타서 정신이 이상하게 됐을까 봐? 이봐. 김준하 씨.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으면 내가 왜 너에게 풋옵션을 사라고 지시했겠어?”
“미리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래.”
김준하는 그제야 한진영이 민국은행의 풋옵션을 매수하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아까 36,000원에 나온 풋을 다 매수하지 그러셨어요? 그건 10배가 된다면서요?”
“이봐. 이봐.”
한진영은 김준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말 안 한 거다.”
“이럴 줄 알고요?”
“그래. 마음가짐이 달라질 테니까. 아까는 어땠어? 내가 이유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매수를 하라니 마음이 복잡했지? 내 말을 듣는 것도 께름칙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매수를 하라는 말에 오히려 매수하면 잘못되지 않겠냐는 생각까지 들었고 말이야. 그런 이유로 매수량을 늘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어때? 내가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하니까 그때 매수량을 더 늘리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지? 분명 너는 내가 미리 알려줬다면 실수인 척하고 만 주만 매수하라고 한 36,000원 풋을 2만 주 혹은 3만 주 한 방에 매수했을 거야.”
“설마 제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 넌 그랬어. 그랬으니까 네가 지금 오늘 여기 앉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 앉아 있다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한진영은 커피를 홀짝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듣기 별로 좋지 못한 말이지? 그런데 그게 현실이야.”
“제가 그렇게까지 몰지각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니. 너는 그래.”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너를 확신하는 게 아니라 네 상황을 확신해서 하는 말이야.”
“네?”
한진영은 말을 하며 슬쩍 모니터를 확인했다.
민국은행은 39,000원을 결제 자리로 결정했다는 듯이 39,000원을 중심으로 안정기에 돌입했다.
풋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프리미엄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특히 극외가는 물론이고 외가 풋까지 모두 녹아버려 김준하의 계좌 평가금액은 어느새 500만 원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한진영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즐기며 조금 전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 상황이 너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정말 모르겠어?”
“제 상황이라면…….”
“그래. 빚. 빚이 남은 상태에서는 차가운 결정? 냉철한 판단? 이런 거 못 해. 빚을 한 방에 깔 수 있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 어떻게든 날려버리려고 눈 질끈 감고 질러버리겠지.”
“저도…… 그랬을까요?”
“너도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래. 그래서 빚내서 주식 하지 말라는 거고…….”
한진영은 커피를 마시며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어 가는 민국은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잘 봐. 이 시장이 얼마나 무서운 시장인지 이제 네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돌아가 있는 김준하의 몸을 다시 모니터 앞에 똑바로 앉혔다.
그리고 뒤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옵션만기를 준비했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만기 때의 모습은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는 중이었다.
요동치는 것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며 누구나 다 예상 가능한 지수대에서 마무리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민국은행도 마찬가지였다.
39,000원의 결제 금액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이라는 듯이 위아래로 호가가 쌓이며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었다.
김준하는 슬쩍 한진영을 돌아봤다.
35,000원 언더라는 말이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은 뒤에서 선 채로 김준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집중해. 이제부터 주식시장이 어떤 곳인지 잘 보여주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시계가 2시를 넘기자 민국은행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39,000원에 마무리를 지을 것 같던 민국은행에 대량의 매도물량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격은 38,000원대 중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만큼 가격을 잡아 놓으려는 매수물량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김준하는 이 정도쯤의 흔들림은 만기 때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냐는 말을 하려 했다.
개별종목의 1~2% 움직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준하의 말은 입을 통해 나오지 못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38,000원까지 순식간에 가격이 흘러내려 왔기 때문이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1시까지 밀어 올려서 겨우 1,000원의 상승을 보였던 민국은행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버티고 서 있었던 39,000원이라는 가격이 2시를 넘어 10분도 되지 않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다는 듯이 오늘 처음으로 파란 불을 띄우기 시작했다.
“어…… 어…… 물량이…… 너무 많이 나오는데요?”
“계속 지켜봐. 내가 말한 35,000원 언더라는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김준하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한진영의 말을 들으며 민국은행의 호가창을 계속 관찰했다.
호가창 속의 매도 대기 물량은 2시 30분을 기점으로 점점 씨가 말라가기 시작했다.
매도물량이 바로 시장가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38,000원을 깨고 파란불을 보였던 민국은행은 결국 37,000원까지 빠져 내려오고 말았다.
“39,000원짜리 풋이…… 수익권에 들어왔어요.”
39,000원짜리 풋도 휴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쪼그라들었던 가격이 결제 가능성이 점차 커지자 꿈틀거리며 상승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38,000원짜리 풋도 내가에 들어가자 상승 폭을 점차 키우기 시작했다.
천만 원을 집어넣어 풋을 매집했던 김준하의 계좌가 500만 원까지 쪼그라든 뒤 점차 탄력을 받아 원금 회복의 기염을 토했다.
“계좌가 빨간불이 들어왔어요.”
“점점 더 재미있어질 거다.”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을 듣고 시계를 돌아봤다.
동시호가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5분여 남짓이었다.
37,000원까지 쉼 없이 달려왔던 민국은행은 이곳에서 쉴 곳을 정하려는 듯이 달리는 것을 멈췄다.
한진영이 이야기한 35,000원 언더와는 큰 차이가 나는 가격대였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에서만 마무리돼도 모두 날릴 것 같던 천만 원의 원금이 큰 손해 없이 마무리될 것만 같았다.
지수도 멈추고 민국은행도 멈췄다.
동시호가에 들어가며 마지막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지막 동시호가에 들어가기 전 민국은행은 37,000원을 깨고 36,700원에 동시호가에 진입했다.
김준하는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37,000원 풋도 결제가 되는 권역에 들어갔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39,000원에 38,000원도 결제를 받을 수 있고 37,000원까지 결제를 받으면…… 큰 손해 보지 않고 끝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예상 체결가나 잘 보고 있어.”
“예상 체결가요? 예상 체결가가 왜요?”
“저 움직이는 거 보이지 않아?”
단일가 매매 시간대에 얼마의 가격으로 체결이 될지를 보여주는 예상 체결가 창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