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면 안 되는 곳
요동치는 방향은 아래쪽이었다.
순식간에 -5%였던 예상 체결 가가 한순간에 -10%까지 빠져 내린 후 다시 -3%대로 회복되기도 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체결 가에 김준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한 후 말했다.
“누가 장난치나 봐요.”
“저게 누가 장난치는 거로 보여?”
“그게 아니면 가격이…… 어라. 하한가까지도 갔네…… 그런데 저게 뭐 드문 일은 아니잖아요. 동시호가니까 마지막에 정리하기 위해 시장가로 매매주문을 넣어놓으니 나오는 현상 아니에요?”
“아니. 저건 매수 잔량 호가를 확인하기 위한 움직임이야.”
“매수 잔량 확인이요?”
“그래. 매물대를 테스트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가격대까지 밀기 위해서 얼마의 물량을 던지면 되는지 알기 위해서…….”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을 듣고 다시 36,700원으로 회귀한 민국은행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김준하의 눈에는 36,700원에서 위아래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 체결 가에서 흔들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요동치듯 흔들리더라도 마무리는 동시호가 들어간 가격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에서 끝나고는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39,000원에서 36,700원까지 밀어 내린 힘이 동시호가에까지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수의 동시호가 움직임도 크지 않은 상태에서 한진영의 생각은 과하다는 느낌이 든 김준하였다.
“내 생각이 과하게 느껴지지?”
“어? 제가 저도 모르게 말했나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굳이 직접 목소리로 들을 필요가 있어?”
한진영은 호가 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테스트를 하면서 한탕 해 먹기 위한 자료를 모았나 보구나.”
“뭐가요?”
“문서로 볼 때랑 직접 볼 때랑 좀 느낌이 다르네…….”
“뭐가요?”
한진영의 혼잣말이 궁금한 김준하는 계속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고개까지 돌려가며 물어보는 김준하를 향해 손을 들어 모니터를 바라보게 했다.
“이런 식으로 두어 번 더 만기일 테스트를 하다 보면 이 종목에 대해서 파악이 끝나게 돼. 만기 날 원하는 가격에 가져다 놓는 데 필요한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만기잖아요. 민국은행같이 대형주가 한꺼번에 빠지게 되면 반대편 쪽에 있는 곳에서 주가 방어하겠다고 들어올 텐데요?”
“이번처럼 처음에는 놔두고 보겠지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네 말처럼 방어하겠다고 들어오는 곳이 생기겠지. 그래서…….”
한진영은 뒷말은 속으로만 내뱉었다.
‘그래서 전 종목을 매도치며 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지. 프로그램 매도를 터트려서…….’
내년 11월 만기일에 벌어질 일이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시장은 시끄러웠으며 많은 관련자가 조사를 받았다.
외국계 증권사 한 곳이 코스피 시장 전체를 뒤집어 놓은 것에 금감원부터 정부까지 모두 나서 조사를 벌인 것이었다.
여론은 극도로 좋지 않게 변했고, 관련자들의 엄벌을 촉구했다.
몇 년의 지루한 법적 공방 끝에 관련자들은 결국 법적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감시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시장의 분노를 잠재웠다.
물론 그 일을 벌인 증권사는 우리나라 시장에서 퇴출당한 것은 기본으로 한 채 말이다.
‘민국은행의 ELS가 결제되지 못하도록 한 짓치고 사고를 크게 쳤지.’
한진영은 내년에 벌어질 일의 사전단계로 지금 민국은행을 테스트하고 있는 거로 생각했다.
김준하는 뒷말을 하지 않는 한진영을 올려다보고 다음 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한진영이 시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질문을 던지지 못한 채 몸을 돌렸다.
어느새 마무리 시간에 카운트다운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잘 봐라.”
한진영의 말이 끝나며 옵션 만기 날 장이 마무리되게 됐다.
하나둘 종목들의 가격이 확정되기 시작했다.
지수의 결과도 천천히 계산되어 HTS에 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민국은행만큼은 동시호가가 마무리되었음에도 가격이 창에 뜨지 않았다.
“이거…….”
“이제 곧 나오니까 집중해.”
고개를 돌리려던 김준하의 머리를 잡은 한진영은 모니터를 향하게 했다.
그리고 약 5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민국은행의 주가가 호가 창에 나왔다.
34,900원
-8.2% 하락.
한진영의 말대로 민국은행은 35,000원이 깨진 채로 마감에 들어갔다.
“어…… 어…….”
김준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신기하지?”
김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대로 35,000원을 깨고 마무리됐다.
한방에 36,700원에서 1,800원이 하락한 것으로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큰 하락이 한순간에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다.
휴지가 될 줄 알았던 풋들이 모조리 결제라인을 넘어서고 말았다.
한진영의 말대로 100원에 만 주 매수했던 것들이 10배가 되어 돌아왔다.
나머지 풋들도 작게는 몇십 프로에서 많게는 몇백 프로까지 모두 결제가 되고 말았다.
김준하는 이런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단 1초 만에 보여준 폭락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진영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김준하를 향해 말했다.
“돈이 있고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가격대를 내가 원하는 곳에 맞춰 놓는 건 일도 아니야.”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뭐…… 시장을 교란했다는 지탄을 받을 담력이 된다면 가능하지. 그리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가는 법의 심판을 받는 것도 모자라 시장에서 퇴출당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종목을 원하는 가격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는 거지.”
“지탄과 법의 심판이라면…….”
한진영은 김준하를 보고 웃었다.
“괜찮아. 오늘은 한 발 더 나아가지는 않았어. 조사를 받고 경고 조치를 받는 수준에서 마무리될 거야.”
“조사요? 그럼…….”
“그러니까 내가 흔적 남기지 말고 쪼개서 사라고 한 거야. 괜찮아. 천만 원 밀어 넣어 4천만 원쯤 만든 것 가지고는 잡혀들어가지 않아. 게다가 우리는 일부러 손해를 감수하고 아침부터 매수 들어갔잖아. 그리고 매수 금액도 많지 않게 일부러 잘라 들어갔고…….”
김준하는 그제야 한진영이 조금 전 했던 말들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방법만 알려주고 하라고 내버려 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귀찮음에 혹은 쫓아오는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렸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됐다면 조사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한 일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으면 골치 아파져. 민국은행이 35,000원 언더가 될 줄 알았다는 말을 뭐로 증명할 거야?”
김준하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게다가 우리가 일하는 곳이 어디야? 우리 회사 이름에 떡하니 증권사라는 글자가 박혀있는데 변명을 할 수가 있겠어? 그리고 회사는 우리가 이런 문제로 조사를 받는다면 어떻게 할까?”
점점 김준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진영이 말하지 않아도 회사가 어떻게 나올지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선을 긋기 위해 조사를 받을 직원을 내칠 게 분명했다.
게다가 때에 따라서는 자기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내친 것보다 더 심한 징계를 내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 효시하듯이 박제를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뜻에서 말이다.
회사에 미련을 버리고 나가려 했던 김준하도 결코 원치 않는 결말이었다.
“괜찮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정말 괜찮을까요?”
한진영은 계좌가 떠 있는 모니터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까는 35,000원 언더를 의심하더니 지금은 조사받는 걸 걱정하는 거야? 내가 괜찮다면 괜찮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음 주 월요일 계좌로 결제받은 돈이 들어오면 이자율 제일 높은 놈들로 정리해. 그럼 먹고사는 것은 걱정이 없게 되는 거지?”
김준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진영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의심하지 않고요.”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너를 도와줬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나한테 고마워할 것도 없고 감동할 필요도 없어.”
한진영은 김준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네가 필요해서 네가 가장 지금 곤란한 걸 치워준 것뿐이야. 그리고 난 이걸 다 기억한 뒤에 이자까지 받아서 돌려받을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자를 곱절로 쳐서 돌려 드릴게요.”
“그래그래. 그런 마음이면 됐어. 우리는 은혜니 감사니 같은 일차원적인 사슬로 묶이지 말자. 그냥 서로 필요로 묶이는 정도면 딱 좋아. 알았지?”
“네.”
김준하는 알았다고 말했지만, 표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목격한 뒤에 필요로 묶이자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김준하에게 한진영은 신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으며 이제 앞으로 모든 일은 한진영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기는 그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됐다.
김준하에게 한진영은 사람에게서 받는 감정 그 이상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
민국은행 사건은 생각보다 떠들썩하게 시장을 강타하지는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이런 식으로 종목마다 사고가 터지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고를 통해 얻는 이득도 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민국은행의 개별주식 옵션이 만기당일 폭발적으로 거래량이 늘었다고 하지만 절대적인 수치로 봤을 때는 아직도 시장 평균에 한참 모자라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민국은행의 사고를 그저 어쩌다 일어나는 해프닝 정도로만 생각했다.
신성증권의 FICC 사업부 내부에서도 민국은행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큰 이슈는 새롭게 생긴다는 TF팀 이야기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누구누구가 차출된대?”
사람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바로 새롭게 출범하는 TF팀의 구성이었다.
“글쎄요. 팀마다 최소한 한 명씩 빼간다는 말이 있어요.”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저도 그래요. 어떻게 저보다 기수도 아래인 친구의 지시를 받겠어요.”
“듣기로는 파생팀에서는 이미 정해졌다고 하더라고요.”
“파생팀 누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모두 궁금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낸 사람을 바라봤다.
그는 주변을 살핀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왜 있잖아요. 파생팀에 이상한 애.”
“이상한 애?”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며 누구를 말하는지 떠올리려 했다.
그러다 파생팀에 있다는 이상한 애가 한 명 떠올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를 꺼낸 사람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 이상한 애?”
“네. 그 이상한 애요.”
“걔 회사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곧 나갈 것처럼 보였죠. 그런데 아직도 잘 있더라고요.”
“그런데 걔가 TF팀에는 왜? 걔는 정말 쓸모없는 잉여인간이라고 그러지 않았나?”
“한진영이가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하더라고요.”
“한진영이가? 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디에도 쓸모가 없어서 업무에서도 배제하던 존재를 도대체 왜 요구했다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팀 자체를 그 이상한 애를 중심으로 꾸리겠대요.”
“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는 가면 절대 안 되는 자리겠다.”
“가면 안 돼. 난 팀장님에게 지금이라도 말해야겠어.”
“나도. 거기에 보내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협박이라도 해야지 이거 원…… 아니 뭔 정신으로 그렇게 꾸미는 거야?”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흔드는 도중에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 TF팀인가 뭔가 부문장님이 밀어주시는 곳 아니에요?”
“밀어주면 뭐 해? 된다는 보장이 없는데…….”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대한그룹에 팔아먹을 상품을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하고는 맞지가 않지. 대한그룹이 미쳤다고 우리하고 거래를 하려고 하겠어? 다른 곳도 많은데?”
일제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대한그룹에 상품을 팔아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팀 구성원까지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부문장님이 뭐에 홀리셨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크게 실수하신 거야.”
“보니까 장 본부장님하고도 친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그거다.”
“뭐가”
“친분. 친분으로 지금 팀을 하나 꾸리는 것 같아. 그리고 대한그룹에 상품을 팔아먹겠다는 것도 그런 친분을 이용해서 부문장님과 본부장님을 홀린 거 같고…….”
“아~ 그러네. 그거 말 되네. 그거라면 설명이 되겠다.”
사람들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고 있던 음료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뭐가 됐건 난 그 팀에 안 가.”
“나도. 나도 안 가. 가서 괜히 잘못돼서 쓸려나갈지도 모르는데 거길 왜 가.”
“맞아. 지금이야 뭐에 홀리셔서 일을 진행하는지 모르겠는데 정신 차리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야. 그리고 생각이 달라지면 TF팀도 와해시키실 테고…… 그럼 다시 돌아올 수가 없어. 차라리 처음부터 안 가는 게 상책이야.”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