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눈뜨고 놓칠 수 없는 존재
사람들의 동요에도 한진영은 느긋하기만 했다.
팀을 어떻게 구성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뭘 할 생각인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저 자리에 앉아 시간을 죽이기만 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한진영은 TF팀을 구성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진영 씨.”
조수아가 오늘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느긋하게 앉아 있는 한진영을 향해 자기가 지어 보일 수 있는 가장 온후한 표정을 지은 채 한진영을 불렀다.
“네?”
따뜻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조수아의 표정에 한진영이 같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저…… TF팀이요.”
“아~”
한진영은 조수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조수아 씨도 함께 갈 테니까요. 뭘 그런 거로 걱정하세요? 언제나 조수아 씨는 저와 한 세트가 될 테니 이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네?”
조수아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는 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모인 시선에 고개를 살며시 숙인 채 우물거리는 말투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저는 왜요? 왜 제가 한진영 씨하고 세트가 되는데요?”
한진영은 땅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조수아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데리고 가 달라고 말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에요.”
조수아는 급히 고개를 들어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가셔야죠. 저희 팀에는 조수아 씨가 꼭 필요합니다.”
“제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러세요? 저는 정말 능력이 없어요.”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 다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조수아 씨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믿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온다고 했는데 언제쯤 오려나?”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한진영의 눈에 피곤에 찌든 듯한 표정으로 부문장실로 향하는 한 사내가 들어왔다.
“왔네. 저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날 테니 조수아 씨가 이사할 곳 자리를 좀 정리해주세요. 저는 할 일이 있으니까요.”
조수아는 합류할 것이 확정된 듯한 한진영의 말투였다.
조수아가 급히 고개를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한진영이 향한 곳은 조금 전 한진영의 눈에 띈 사내가 들어간 김정대 사무실 쪽이었다.
한진영은 잠시 자기를 저지하려는 김정대 비서의 만류를 손으로 막고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한진영은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김정대와 사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막 나누려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들은 앉은 채로 갑자기 나타난 한진영을 바라봤다.
“부문장님. 이야기하셨나요?”
김정대는 한진영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하고 말고 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들어와.”
김정대의 말에 한진영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정대 곁에 앉았다.
김정대와 마주 앉아 있던 김석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리에 앉게 된다면 김석현 옆에 앉아야 했다.
일반적으로 김정대에게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직원 입장에서는 김정대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마치 이야기하려는 상대가 김석현이라도 된다는 듯이 김석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김정대도 이런 한진영의 태도를 이해한다는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자기에게 말을 걸려는 듯한 모습에 김석현은 한진영이 궁금해졌다.
“본부장님. 누구입니까?”
“자네도 이제 돌아왔으니 익숙해져야지. 지금은 본부장이 아니라 부문장이야.”
“그래도 저에게는 본부장님이시지요. 그리고 조만간 다시 본부장으로 승격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야. 이 친구가 큰 거를 터트려주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준비 잘하고 있어?”
김정대가 김석현의 말을 받은 뒤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준비를 잘하기 위해 여기 온 것 아닙니까?”
“좀 기다려줄 수는 없었나? 내가 이야기한다고 했잖아.”
“아무래도 제가 와야 설득이 될 것 같아서요.”
“자네가 어떻게?”
김석현은 자기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김정대를 향해 다시 물었다.
“본부장님. 누구…….”
“아~ 맞아. 소개부터 해야지. 여기는 새롭게 출범한 TF팀의 팀장인 한진영 사원. 그리고 여기는 자네도 알다시피 김석현 대리야. 인사해.”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김석현 대리님이 복직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김석현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한진영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저를 아십니까?”
“알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김정대는 악수한 뒤 자리에 앉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새롭게 진행하는 TF팀에 자네가 합류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는데…… 직접 이렇게 온 것을 보니 할말이 있나 봐. 그런 거야?”
“네. 그냥 오라고 하면 안 올 게 분명하니까요.”
“하하하. 잘 알고 있군그래.”
“잘 알고 있지요.”
김준하에 이어 영입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동안 김석현은 휴직 중이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김준하의 영입에 총력을 다했다.
그리고 김준하는 이제 완전히 내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완벽히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김석현 차례라고 생각한 한진영이었다.
김석현은 자기를 아는 것도 모자라 새로 구성되는 팀에 영입하려고 한다는 한진영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런데 본부장님.”
“부문장.”
김정대는 호칭을 고쳐주고는 웃으며 김석현을 바라봤다.
“우리끼리 있을 때야 괜찮지만 조심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니까. 그래. 왜 불렀어?”
김석현은 호칭을 고쳐주는 김정대의 말에 살짝 고개 숙여 알았다는 뜻을 전한 후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제가 조금 전 소개 받기로는…… 사원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그런데 새로운 팀의 팀장이라는 말입니까?”
“재미있지?”
“재미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무슨 팀이라는 말씀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려는 일은 차차 소개를 받으면 될 것 같고…… 직접 왔으니 자네가 설득해 봐.”
김정대는 슬쩍 몸을 옆으로 물렸다.
처음 김석현을 TF팀에 영입했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김정대는 놀랐다.
한진영이 휴직한 지 1년이 넘어가는 김석현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김석현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능력이 특출나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한 상황이 복잡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많이 오르내렸던 것이었다.
“잠시만요.”
김석현은 말을 하려는 한진영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김정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부문장님. 제가 오늘 회사를 찾아온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김석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회사에 온 이유는 복직을 신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럼?”
“휴직을…… 연장…… 정말 죄송합니다. 부문장님. 일 년이나 믿고 기다려 주셨는데 제가 이런 염치없는 부탁이나 하게 돼서 말입니다.”
김석현은 말을 하고 나서도 부끄럽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을 정도로 숙였다.
김정대는 그런 김석현의 행동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휴직을 연장해 달라고?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그건 안 되죠.”
김정대의 질문에 한진영이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김석현은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려 한진영을 쳐다봤다.
왜 나서냐는 표정의 김석현이었다.
휴직을 신청한 것은 김석현이었고, 그걸 들어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김정대의 소관이었다.
한진영이 끼어들 자리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팀장이라고는 하지만 일개 사원이 휴직이 되니 마니 하는 건방진 이야기를 하려는 것에 김석현은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김석현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일을 앞두고 휴직을 할 수는 없지요. 우리는 연말 휴가도 다 반납해야 할 실정입니다. 그런데 휴직이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도 다시 휴직에 들어가는 건 곤란한 입장이야. 다른 직원들과도 형평성을 맞춰야 하니까. 그런데 진영아.”
이제는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김정대였다.
김정대는 안쓰러운 눈으로 김석현을 바라보고 말했다.
“김 대리도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거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프시지요?”
한진영의 말에 김석현은 놀란 눈을 했다.
김준하만큼이나 김석현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신성증권의 외환 딜러로 첫발을 내디뎠던 김석현은 외환 딜러로서의 평가는 그저 그랬다.
성실하기만 할 뿐 탁월한 판단력과 위기 대처 능력 같은 딜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모두 중간 정도라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였다.
단지 굉장히 냉정하여 위기의 순간에서도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의 성격적인 모습을 이야기 한 것일 뿐 딜러의 능력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런 김석현이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게 됐다.
결혼 뒤 2년 만에 가진 남자아이로 김석현은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 사진을 보여줄 정도로 기뻐했다.
그랬던 아이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김석현은 제대로 된 회사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 병원으로 잦은 휴가와 일하다 말고 중간에 퇴근하는 날이 일상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김정대가 먼저 장기휴직을 제안했다.
그래도 결혼 전 성실함을 인정받아 김정대가 편의를 봐준 것으로 김석현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현재 휴직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일 년 동안이나 곁에서 아이를 돌봤는데도 아이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정말로 저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아이에게 정신 팔린 바람에 회사 직원들과도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던 김석현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진영의 모습에 김석현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생겼다.
“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불편하네요.”
“불편해하실 것 없습니다. 그만큼 김 대리님과 꼭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니까요.”
“제 상황을 알고 계신다면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실 텐데요? 저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회사를 방문한 것도 휴직을 연장하기 위해서고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잘 알아서 드리는 제안이고요.”
어떤 면에서는 김준하보다 김석현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김준하야 당시에 친분이 없는 상태에서 사라진 데다 그 일 이후 더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김석현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천재 외환 전략가. 김석현. 잘 알고 있지요.’
한진영은 김석현을 보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외환 딜러로서는 능력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환 전략가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걸 지금 신성증권에서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한진영이 잡지 않는다면 영영 신성증권은 김석현의 진면목을 모른 채 놓치고 말게 될 게 분명했다.
결국 장기휴직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던 신성증권을 김석현은 결국 떠나고 말 테니 말이다.
아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떠났던 김석현은 결국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방황하며 업계에서 잠시 몸을 숨겼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돌아온 김석현은 딜러가 아닌 전략가로 보직을 바꿔 승승장구했다.
‘눈뜨고 이런 인재를 놓칠 수 없지.’
한진영은 김석현이 가장 아파하는 것을 해결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아이가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한진영의 알 수 없는 미소에 거부감이 생기던 김석현이었다.
그런 그의 귀에 아이 치료 이야기가 들리자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이를…… 어떻게 치료…….”
“아이의 선천성 심장 수술을 받고 싶으신데 자리가 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시죠?”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놀라시기엔 이릅니다. 두성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싶은데 반년 동안의 수술 스케줄이 모두 차버려 대기를 넣어 놓은 채 순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래서 그 수술이 마무리될 때까지 아이 곁을 떠날 수 없으시고요.”
김석현은 정신은 이미 멀리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한진영이 처음 말한 ‘치료’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김석현의 반응을 가만히 바라봤다.
김석현이 회사를 그만두고 순번이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아이를 잃고 말았던 과거가 떠오른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지난 기억을 지우고 김석현에게 말했다.
“제가 순번을 당기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그럼 저와 함께 일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김석현의 엉덩이가 소파에서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