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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77화 (77/650)

77화 병이 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함에 절어 있던 세 사람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조차도 시차가 맞지 않아서인지 피곤함을 다 벗어낼 수는 없었다.

“식당가기도 귀찮다. 룸서비스로 먹자.”

“룸서비스는 돈이 얼마예요? 나가서 먹어요.”

“네 돈 내고 먹자고 안 할 테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

“제가 식당에서 음식 싸 올게요. 그럼 그 돈 저한테 주세요.”

“너 나가서 말 한마디 할 수나 있냐?”

여전히 투덕대는 두 사람을 두고 한진영은 옷을 갈아입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보고 귀찮은 듯이 물었다.

“진짜 나가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방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넌 방에 있고 싶으면 방에 있어.”

이성우는 한진영이 나가겠다는 데 계속 방에 있기도 뭐하다는 생각에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밖에 나온 세 사람은 호텔 직원의 추천을 받아 근처의 맛집이라고 유명한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 너무 더러운데요?”

“왜 이러냐? 내가 전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김준하와 이성우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코를 막았다.

길거리가 아니라 마치 쓰레기장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진영은 코를 막고 인상을 쓰는 이성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네가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어?”

“그때는 깨끗했어. 최소한 지금처럼 거리에 쓰레기가 널려있지는 않았다. 이렇게 치우지 않은 지 며칠이 된 것 같은 쓰레기가 거리에 나뒹굴지는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이건 너무 심하다.”

이성우를 데리고 온 이유가 여기에서 제대로 드러났다.

과거 그리스 아테네에 여행을 와봤던 이성우였다.

한진영은 과거의 상황과 지금을 비교하기 위해 특별히 최 지점장에게 부탁하여 이성우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뭐가 이렇게 더럽게 바뀌었냐? 사람도 없어. 예전에는 거리에 외국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시간이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 거 아닌가요?”

“이 시간에는 사람이 더 많지. 생각해봐라. 휴양지 저녁에 사람들이 뭐 하겠어? 술 마시고 놀아야지. 그런데 지금은…… 놀러 온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얼마 없잖아.”

한진영은 글로 보았던 것보다 실제로 피부로 느껴지는 심각성에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노천카페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이성우의 손에 이끌려 클럽에도 다니며 아테네에서의 저녁을 즐겼다.

이틀째부터는 이성우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났다.

호텔 수영장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알았는지 아테네의 핫플레이스까지 이성우는 아테네가 마치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휘젓고 다녔다.

한진영과 김준하는 그런 이성우의 뒤만 쫓아다니면 아테네의 모든 곳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피바라같이 누구와도 잘 친해지는 성격으로 한진영이 궁금해하는 것의 이유를 물어왔다.

“야. 내가 거리에 왜 쓰레기가 그렇게 많은지 알게 됐다.”

잠시 호텔 카운터에 다녀온 이성우가 라운지로 다시 돌아오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내가 저기 카운터 아가씨한테 물어봤는데 요새 정부에서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쓰레기 담당 공무원들이 죄다 일을 그만뒀대.”

“그래서 쓰레기들을 수거하지 않고 그대로 길에 내버려 둔 거래요?”

“그래. 그뿐이 아니라 서류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죄다 관뒀다고 하더라. 그리스 공무원들 월급이 벌써 두 달째 밀렸다고 그러는데?”

“그래?”

한진영은 주스를 마시며 호텔을 살폈다.

그리스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급호텔이었다.

한진영이 묶는 방의 경우에는 하루 숙박료가 수백만 원을 호가했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서 이렇게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사람이 너무 없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이성우를 따라다닌 경험상 이곳만 이런 것 같지가 않았다.

전체적으로 그리스의 어느 호텔에 가더라도 이런 분위기가 연출 될 것만 같았다.

“내가 지난번에 그랬잖아. 사람이 내가 왔을 때보다 적은 것 같다고…… 그것도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더라. 실제로 관광객이 엄청나게 줄었대.”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곳에 사람들이 찾지 않고 정부는 돈이 없어 공무원들 월급 줄 돈이 없다? 그럼 뭐 더 볼 것도 없네.”

“네 생각대로야?”

이성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곳에 온 이유와 무엇을 확인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진영의 미소가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내 생각대로야. 그러니까 너는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행동해.”

“그럼. 알지. 지난번처럼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지?”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설탕을 챙기던 김준하는 주머니에 설탕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조용히요? 그럼 어디 가서 말하지 말란 이야기죠?”

“그래. 진영이와 함께하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입이야. 미리 알고 있다고 입을 놀려서는 안 돼. 조용히 지켜보면 진영이가 다 알아서 해줄…… 야. 넌 또 뭘 그렇게 챙기냐?”

말을 하다 말고 김준하의 행동에 이성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러지 좀 마. 창피하게 그게 뭐냐? 내가 하나 사줄게. 그게 뭐라고 그걸 챙기냐?”

탁자 위에 놓인 냅킨을 주섬주섬 챙기던 김준하를 향해 이성우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김준하는 그런 이성우의 말에도 주눅 들지 않고 계속 주머니에 물건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제가 챙긴 물 제일 잘 드신 분이 누구시더라…….”

“그건…… 주변에 물을 사 먹을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 아니 뭔 동네가 물 파는 데가 없어.”

“결국, 제가 싸 온 물 잘 드신 건 맞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챙겼으니 정말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인 거잖아요?”

“아니. 그건 그런데…… 아우. 그래도 휴지를 왜 챙기냐?”

“휴지 안 쓰실 것 같아요? 두고 봐요. 성우 씨가 휴지 제일 잘 쓰실걸요?”

김준하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린 이성우였다.

실제로 챙기는 사람은 김준하였지만 챙긴 물건을 요긴하게 쓴 사람은 이성우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놓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한국의 봄 날씨 같은 햇살이 비치는 그리스였다.

그러나 내리쬐는 햇살과 달리 거리는 이미 병이 들 대로 든 모습이었다.

지중해의 풍요로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찌든 고단함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한진영은 거리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

공항에 내린 한진영은 반쯤 눈을 감고 걷는 이성우의 등을 때렸다.

“야! 정신 차려. 그러니까 비행기에서 좀 자라니까.”

“비행기에서 자기는 왜 자? 놀게 천지였는데 재미있게 놀아야지. 그리스에서 우리나라까지 일등석 타고 올 일이 어디 있다고…… 나도 일등석은 못 타. 비즈니스석 타는 게 고작이야.”

“그래서 뽕 제대로 뽑은 거야?”

“뽕은 저 친구가 뽑은 거 같은데?”

이성우는 봉지 가득 무언가를 담아서 나온 김준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김준하에게 다가가 봉지를 빼앗으려 했다.

“줘봐. 도대체 뭐 담아서 온 거냐?”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분명 비행기 탈 때는 못 봤던 건데 어디서 이게 나온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필사적으로 봉지를 사수하려던 김준하와 빼앗으려던 이성우 간의 실랑이가 한동안 벌어졌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그냥 놓고 공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으앗!”

실랑이가 벌어지던 도중에 결국 봉지가 찢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찢어진 봉지를 뚫고 쏟아지는 물건을 이성우가 서둘러 주워들었다.

“이거 뭐냐? 아니 넌 왜 비행기에서 고추장을 가지고 내린 거냐? 얼라? 이건 고추냉이. 이건 간장…….”

과자와 사탕은 물론이고 짜 먹는 양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담요와 실내화를 가지고 내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런 식의 양념을 챙겨서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한진영은 어이없는 눈으로 김준하를 바라봤다.

“이거 집에 싸가서 먹으려고?”

“일등석이잖아요. 한두 푼짜리 좌석도 아니고…… 제가 스튜어디스 누나한테 물어보니까 좌석값만 왕복으로 수천만 원은 한다고 하던데요?”

“그 돈 네가 낸 것도 아닌데 왜 네가 챙겼어? 아이고…… 창피해라. 창피해. 너 설마 이거 챙겨달라고 스튜어디스 언니들에게 부탁한 건 아니지?”

“부탁이 아니면 제가 이걸 어떻게 챙겼겠어요.”

당연하다는 듯한 김준하의 말에 이성우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나 얘랑 같이 못 다니겠다.”

“저도 성우 씨랑은 같이 못 다니겠어요. 코를 얼마나 골던지 잠을 제대로 잔 적이 하루도 없었어요.”

“지는…… 야. 너도 코 골았어. 나만 코 곤 줄 아냐?”

“성우 씨는 이도 갈았어요.”

“너는 밤새도록 뒤척였어. 네 이불 스치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한진영은 공항 게이트 앞에서 아이들처럼 싸우는 두 사람을 두고 먼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그리스를 둘러보고 오랜만에 도착한 서울이었다.

한진영은 직접 그리스의 상황을 둘러본 만큼 과감하게 행동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월요일 일주일 만에 출근한 사무실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변한 게 한 가지가 있다면 한진영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입니까?”

한진영은 새롭게 마련된 자리를 확인하고 조수아에게 물었다.

조수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한 대로 여섯 명 정도가 머물 공간을 먼저 만들었어요. 책상에 사무기기 등도 다 들어온 상태고요. 그런데 우리 셋에 나머지 셋은 어디 있어요?”

한진영과 김준하가 그리스를 다녀온 사이 조수아가 TF팀이 머물 공간을 정리했다.

FICC 사업부 가장 끝쪽에 자리 잡은 TF팀은 임시로 파티션을 쳐 놓은 모습이었다.

김정대의 기대를 한껏 받고는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었기에 사업부에서의 지원도 한계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오히려 이런 모습을 즐겼다.

자리가 좋다고 해서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조금은 떨어져 있는 편이 움직이기 더 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비어있는 세 자리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어디 가시게요?”

조수아가 이야기하다 말고 나가려는 한진영을 불렀다.

한진영은 조수아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자리가 정해졌으니 일을 시작해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빈자리를 채워야 할 테고요. 세 명 지금 데리고 오겠습니다.”

한진영은 대답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한진영은 사무실이 자리한 층에서 한 층 아래 위치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조용했던 위층과 달리 아래층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계단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문을 뚫고 들려올 정도였다.

한진영이 계단 문을 열자 한꺼번에 열기가 훅하고 한진영을 덮쳐왔다.

“여기는 여전하네.”

이곳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민망함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돼 있었다.

알아듣기 힘든 약어들과 각자 자기들이 맡은 분야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소통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수십억에서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다는 것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신경이 멀리서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여기 있었군.”

한진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김정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김정대는 한진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다녀왔으면 보고부터 해야지. 내가 이렇게 직접 자네를 찾아와야 하겠어?”

타박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드러운 말투였다.

오히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오는 김정대의 말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곳에 왔다가 올라가 뵈려고 했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떻던가?”

김정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직접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찾아온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를 향해 간단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김정대는 확신에 찬듯한 한진영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채권 파트는 지금부터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겁니다. 다른 곳은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움직여도 될 것 같고요.”

“그래. 채권은 덩치가 있고 움직임이 둔하니까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거야.”

“대신 미리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아시죠? 굳이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노출 시킬 이유는 없으니까요.”

“알지. 조심히 은밀하게…….”

김정대는 손짓까지 하며 웃었다.

한진영은 기분이 좋은 것 같은 김정대를 보고 같이 웃었다.

김정대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인가? 딜링룸에는 잘 내려오지 않잖아?”

트레이딩을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상품을 중개하거나 설계하는 위층과 달리 매매를 중점적으로 하는 곳으로 이곳의 분위기는 위층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살폈다.

“김 대리님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그래서 김 대리 데리러 왔어?”

“네. 제가 돌아왔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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