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준비는 끝났으니 바로 시작하자
출입문 맞은편 벽에는 전 세계 환율 상황을 보여주는 시세판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모든 딜러를 향해서 하는 말인 듯한 글이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와 손이 같이 움직여라]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라는 말이었다.
생각하고 움직이기에는 이곳은 느리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따라 하려는 듯이 딜러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에 놓여 있는 일고여덟 개의 모니터를 수시로 확인하며 먹이를 노리는 것 같은 딜러들의 몸에서는 무림 고수와 같은 향기가 풍겨 나왔다.
“이곳은 올 때마다 뿌듯한 느낌을 받아. 어떤가? 제법 그럴싸하지 않나?”
사무실을 휘감고 있는 공기에서 칼날의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의 치열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딜링룸을 조금 더 키우실 생각입니까?”
“내 욕심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 아직도 부족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고 있으니까.”
“증권사에서 이 정도 딜링룸을 가지고 있는 곳은 몇 군데 없을 겁니다.”
“몇 군데가 아니라 제일이 되고 싶어.”
김정대가 FICC사업부 부문장에 앉은 뒤 가장 신경 쓴 것이 바로 이 딜링룸이었다.
세일즈와 트레이딩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트레이딩에 힘을 더 쏟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세일즈의 역량을 키우는 것보다 트레이딩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들의 딜링룸에 뒤지지 않는 시설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유수의 딜러들을 스카우트해 자리에 앉혔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들어주어 트레이딩센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50 솔드(sold)”
“7원.”
“2.5 2개 보트.”
“2개? 2개 맞아?”
“여기는 3.5에 3개 보트.”
안으로 들어가자 암호와 다를 바 없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짧은 대화를 통해 거래를 진행하고 있는 그들은 말을 하는 그 순간조차도 아끼려는 듯했다.
데스크의 보조 딜러들이 계속 시간을 외쳤다.
“11시 정각까지 5분 남았습니다.”
거래를 총괄하는 치프 딜러 들은 그런 보조 딜러의 시간을 확인하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코퍼레이션(Corporation) 딜러들의 주문을 확인했다.
“40만 불 솔드(sold)!”
“70만 불 솔드(sold)!”
기업고객들의 주문을 중개하는 코퍼레이션 딜러들이 각 주문을 모아오자 치프 딜러가 그렇게 모인 주문을 외환시장에서 외화를 모아 기업들에 팔았다.
“2.5 던(done).”
순식간에 110만 불의 계약이 진행됐다.
솔드(sold)는 기업들이 사고 싶다는 뜻이었고, 던(done)은 그들이 원하는 양을 모아 팔았다는 뜻이었다.
숫자는 환율의 마지막 자리와 소수점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1212.5원의 2.5를 외치는 것이었다.
“치프에 코퍼레이션, 보조 딜러 그리고 전략관까지…… 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팀을 데리고 와야 하는 일이라 돈이 많이 들었어.”
김정대는 자기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훑어보며 감회에 젖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키워나가 치프 급을 20명 정도 보유하는 게 내 목표야. 어떤가? 할 수 있겠지?”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중에는 딜링룸이 아니라 트레이딩센터 건물을 따로 세워 전문적으로 트레이딩만 하는 곳을 만드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하하하. 사람 참…… 듣기 좋은 말만 하는구먼그래.”
김정대는 쑥스러운지 한진영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5여 년 뒤 김정대는 국내 최대 규모의 트레이딩 센터를 세우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가세. 김 대리가 저쪽에 있을 거야.”
곁을 지나는 것만으로 땀내가 풍기는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딜러의 경우에는 체력싸움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 말이 이해가 가듯이 이곳은 한겨울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있기가 괴로울 정도로 열기가 차올라왔다.
“1215원! 1215.5원!”
연신 숫자를 두 개가 흘러나오는 스피커가 한진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런 스피커에서는 여러 목소리로 각기 다른 숫자들이 들려왔다.
이런 숫자들의 홍수 속에서 딜러가 마이크를 잡고 스피커 속에 숫자를 향해 외치는 것이 귀에 들렸다.
“마인(mine)!”
김정대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왜 스피커에서 다른 두 개의 숫자가 들려오는지 아나?”
한진영을 향해 아는 척을 하고 싶어 말을 걸어오는 김정대였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그런 김정대를 돌아보고 대답했다.
“앞에 숫자는 비드(bid). 즉, 사겠다는 숫자이고 뒤에 숫자는 오퍼(offer) 즉, 팔겠다는 숫자이지요. 숫자 중에 사고 싶은 숫자가 나오면 마인(mine)을 외치고 팔만한 숫자가 나오면 유어스(yours)를 외치면 그거로 거래가 끝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번에 거래되는 기준 금액은 500만 불. 0.5원의 거래로 250만 원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거죠.”
김정대는 의외라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의외인데?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
“그뿐이 아닙니다. 처음 봤던 곳은 기업들의 요청을 받아 거래하는 곳이고, 지금 이곳은 은행 간의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뭐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암호 같은 용어에 정신 못 차리기 마련인데 뭐 이렇게 잘 알아?”
김정대의 놀람은 생각 이상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런 거래시스템은 몇 번을 보는 것만으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단말기를 통해 거래가 이루어지는 주식시스템과 달리 직접 사람들이 목소리로 외치는 거래 시스템 속에 암호와 같은 단어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들려왔다.
일반인이라면 이런 곳에 있는 것만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한진영은 익숙한 모습은 물론이고 그들의 암호와 같은 단어들을 모두 알아듣는 것이 한두 번 이런 곳에 온 것 같지가 않았다.
김정대조차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에게 이런 모습은 익숙한 것이었다.
딜러로서의 전직을 고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수천억을 움직이는 일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땀내가 후끈 달아오르는 분위기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한 남성성을 자극하기도 했다.
성과급도 상당했고 성취감도 높았다.
때에 따라서는 타국의 환율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어떤 때는 시장의 움직임을 제어하려는 정부의 폭탄 공세 또한 온몸으로 맞는 날도 있었다.
이런 날을 보내고 결국 승리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든 포지션이 그날 시작하여 그날 마무리되기 때문에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쉴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은 한동안 이곳에서 보조 딜러부터 코퍼레이션 딜러까지 여러 경험을 쌓으며 전직을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 이상의 업무강도로 오랫동안 현장에서 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루 거래대금 수천억이라는 것이 성취감을 올려주기도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다.
큰 거래금액만큼이나 타이밍이 잘못 맞으면 얻어맞는 금액도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야 하다 보니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눈앞에 쓰러져 실려 가는 사람을 다섯 명째 보았을 때 한진영은 깨끗이 포기했다.
자기는 오랫동안 이 바닥에 살아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 결과적으로 그러나저러나 오래 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한진영은 지난날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뒤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김정대는 신기한 물건을 바라보듯이 한진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한진영의 손짓에 고개를 돌려 한진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김석현이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한진영과 김정대는 김석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김석현은 한진영 등이 오는 줄도 모르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가고 있었다.
“계산이 잘 됩니까?”
김석현은 자기를 향해 말을 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한진영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왜 이러십니까? 오랜만에 봤으니 잘 지냈냐는 인사를 먼저 하셔야지요.”
“아닙니다. 연락받았습니다. 저희 아이 수술이 잡혔다고요.”
“잘됐군요.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말입니다.”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도 다 이유가 있어 도와드린 거니 마음의 짐을 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김석현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한진영은 그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김석현이 적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보고 화제를 바꿨다.
“제가 부탁드린 일은 잘되고 있습니까?”
“네. 거의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한진영은 그리스로 떠나기 전에 김석현에게 일을 내어줬다.
변수 몇 가지를 던져주고 환율의 움직임에 대한 추세를 파악해달라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리스사태로 인해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점이 1500대를 넘기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상품을 설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작점과 끝점이 아닌 추세까지 알고 있어야 정확히 설계가 가능했고, 그 추세를 예측하기 위해 김석현이 필요했다.
김석현은 한진영의 지시를 받아 변수 발생 시의 환율의 추세를 예측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한진영이 딜링룸에 직접 찾아온 거였다.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이곳에 돌아오니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났나요?”
“많이 도움이 됐습니다. 일 년이나 쉬었더니 감각이 무뎌졌었는데…… 이곳에 돌아오니 단숨에 잊었던 것들이 떠올라 등골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한진영이 김석현에게 원했던 것은 이런 순간순간의 트레이딩이 아니었다.
그래서 위층에 마련되어 있는 TF팀 자리에서 일을 해주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김석현은 일주일만이라도 이곳에서 잊었던 감각을 되살리고 싶다고 요청했다.
일 년이라는 휴직 기간 동안 사라졌던 감각을 되살리고 싶어서였다.
한진영은 어차피 그리스에 가 있는 일주일 동안 일을 진행하기는 어려웠기에 김석현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리고 살아난 감각의 김석현을 데리고 가기 위해 이곳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대리님. 이제 시작하실까요?”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바로 시작해도 됩니다.”
“잘 됐습니다. 그럼 가시죠.”
한진영이 김석현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딜링룸 밖으로 김석현을 데리고 나갔다.
***
한진영이 회의실 앞에 모여 서성이는 팀원들을 보고 이상한 듯이 물었다.
“왜들 이러고 있습니까?”
“저기…… 아직 채권팀의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고…….”
한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조수아를 바라봤다.
“이 시간에 우리가 쓰겠다고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요청했죠. 요청했는데…… 먼저 와 있던 채권팀에서 자기들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고…… 어머. 팀장님.”
조수아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한진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한진영은 문을 열고 회의실 안에 몸을 밀어 넣은 상태였다.
조수아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은 급히 한진영을 따라 회의실 문 앞에 모였다.
“뭐야?”
성현수는 갑자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한진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차례입니다. 이만 나가주시죠.”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 밖에서 기다려.”
“분명 2시부터는 우리가 쓰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왜 나가라 말라야?”
성현수는 회의 탁자에 앉아 한진영을 올려다보고 소리쳤다.
누가 보더라도 일부러 시비를 거는 듯한 그의 모습에 조수아가 가만히 한진영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조금만 기다렸다 하시죠?”
한진영은 조수아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1차 제안서를 들고 일주일 뒤에 윤 회장님을 찾아봬야 합니다.”
“풋. 웃기는 소리 하는군.”
성현수는 한진영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봐도 한진영이 하겠다는 일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하려고 하는 놈들보다 우리 일이 더 중요해. 그러니까 빨리 문 닫고 꺼져. 너희들은 그냥 저기 사무실 끝에 자리한 너희들 책상에 모여 옹기종기 소꿉장난이나 해.”
한진영은 성현수의 비아냥에 눈을 가늘게 뜨고 성현수를 쳐다봤다.
성현수는 그런 한진영의 눈빛에 지지 않으려 큰소리를 쳤다.
“뭐? 그렇게 보면 어쩌려고? 우리가 너희들같이 실속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아? 어디 팀 같지도 않은 것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고 그러는 건지…… 여기는 애들 장난하려고 모인 곳이 아니야.”
한진영은 성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수는 아무런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한진영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더욱 큰소리로 한진영 곁에 있는 조수아를 향해 소리쳤다.
“야! 조수아. 문 닫고 나가. 우리 회의 방해하지 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현수의 팀원으로 있던 조수아였다.
그는 성현수의 말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성현수를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의 손길에 더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한진영이 조수아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참 귀찮게 하시는 분이군요.”
한진영은 오른손으로 조수아를 잡은 채 왼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