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79화 (79/650)

79화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라

한진영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전화기를 꺼냈다.

성현수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전화로 부문장님께 이르려고 그러는 거냐?”

한진영은 전화기를 든 채 성현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전화기를 켜며 말했다.

“중요한 일을 하신다고요?”

“아무렴 너희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지. 너희는 허황한 꿈을 좇는 녀석들 아니냐? 우리는 실제로 FICC사업부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야. 너희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아.”

“아~ 그렇군요.”

한진영은 전화기를 탁자 위에 놓은 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소리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성현수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짜증이 일어났는지 곁에 앉아 있는 팀원을 향해 눈짓했다.

사람 숫자도 자기들보다 적으니 그냥 숫자로 밀어붙여 밖으로 쫓아내라는 뜻이었다.

성현수는 한진영과 분란을 계속 일으키려 마음먹었다.

아직 회사 생활을 얼마 하지 않은 한진영이었기에 이런 분란을 견디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성현수는 알지 못했다.

실제로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은 성현수보다 한진영이 배는 많았다.

성현수의 이런 분란이 그의 눈에는 아이 장난처럼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한진영이 성현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을 때 한진영의 전화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굽니까? 한진영 씨 아닙니까? 아니지. 이제는 팀장 자리에 올랐으니 한 팀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성현수의 지시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팀원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움직이려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성현수도 스피커를 통해 나온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머릿속에서 설마 ‘그’인가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 지내셨죠?”

-잘 지냈지요. 그리스는 잘 다녀왔습니까?

“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부족한 게 아니었나 걱정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잘 지내다 왔습니다. 이게 다 정 회장님 덕분입니다.”

-뭘 그 정도로…… 제가 더 잘해드렸어야지요.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프라임리츠의 정병선 회장이라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갑자기 왜 정병선 회장에게 전화를 건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의 상황을 중재하라는 뜻에서 김정대 부문장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오히려 더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왜 생뚱맞게 정병선에게 전화를 거는 것인지 사람들은 한진영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제자리에 굳은 상태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진영은 태연한 모습으로 계속 전화기 속의 정병선 회장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한 팀장님이 어쩐 일입니까? 그리스에 잘 다녀왔다는 뜻으로 전화를 건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역시 정 회장님은 한 번에 알아채시는군요.”

-사업하는 사람이 이 정도 눈치챌 수 있어야지요. 말씀해보십시오.

한진영은 고개를 들어 성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돈을 꽤 버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계좌를 이제 한번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리요?

“네. 제가 팀을 옮겼는데 계속 채권 쪽에 돈을 집어넣고 있는 것도 우습기도 하고…….”

-아~ 이해했습니다. 하긴 팀장님이 자리를 옮겼는데 제가 굳이 채권팀의 실적을 올려주고 있을 이유가 없겠지요. 당장 김 비서를 통해 정리하도록 하지요.

성현수는 갑작스러운 정병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한진영이 먼저 나섰다.

“그럼 제가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전화기를 끊었다.

성현수는 손을 들어 올린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성현수를 향해 얇게 웃으며 말했다.

“우선 50억.”

한진영은 회의용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휴대폰을 누르기 시작했다.

-네. 기풍철강 비서실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신성증권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성현수는 잽싸게 달려 나가 한진영의 전화기를 빼앗았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한진영을 대신하여 말을 한 성현수는 전화기 종료 버튼을 누른 뒤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뭐하긴요?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여전히 채권팀의 사람이 아니니 말입니다.”

“너…….”

성현수는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리에 앉아있는 팀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일어나.”

“뭐 하십니까?”

“나가면 될 거 아니야?”

성현수는 잔뜩 짜증 난 말투로 말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불만 가득 한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다 몸을 돌려 한진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그렇게 건방 떨다가는 언젠가는 크게 당할 날이 있을 거다.”

한진영은 성현수의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절 걱정하시기 전에 성 팀장님부터 걱정하시지 그러십니까? 기풍철강까지 빠져나간다면 채권팀의 실적이 쫙 쪼그라들지 않겠습니까?”

“부문장님이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가만히 계실 것 같아?”

“가만히 계시지요. 뭐라 하실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우리 사업부 실적을 빼가는데 가만히 계신다고? 부문장님이 너를 아무리 예뻐하더라도 그런 것을 그냥 보고 넘기실 분이 아니야.”

“아니지요. 사업부 실적이라니요?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실적들은 다 저를 따라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회사를 옮겼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팀만 바뀐 것이지요. 그러니 사업부로만 놓고 보자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너…….”

“그냥 채권팀 실적에서 저희 팀 실적으로 옮기는 거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은 본인과 본인 팀 걱정만 하시면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성현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혈압이 오르는 것인지 한눈에 보기에도 화가 난 듯한 모습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성현수를 주변에 있던 채권팀의 다른 팀원들이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한진영은 사람만 빠져나갔을 뿐 아직 어지러운 탁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혀를 찼다.

“양심도 없게 몸만 쏙 빠져나갔네. 제대로 정리도 하지 않고 말이야.”

한진영이 인상을 찌푸리고 지저분한 탁자 위를 정리하자 나머지 TF팀의 다른 팀원들도 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의하면서 뭔 회식을 했나? 뭐 이렇게 과자를 많이 뜯어 먹었어?”

한진영은 혀를 차고 자리에 앉았다.

한진영의 뒤를 이어 의자에 앉은 김석현은 한진영에게 말했다.

“성 팀장은 여전하군요.”

“귀엽지 않습니까?”

마지막까지 정리하던 조수아는 자리에 앉으며 한진영의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하다고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누가 귀엽다고요?”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의 반응도 재미있었는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왜 그러십니까? 귀엽다니까 이상합니까?”

“이상하다 뿐이에요? 성 팀장 어디가 귀엽다고 그러세요?”

“매번 당할 줄 알면서 덤비는 게 말입니다. 그래도 일관성 있지 않습니까? 다른 팀장들에 비해서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김석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네요. 다른 팀장들은 눈치만 보던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러니 귀여운 것이죠. 돌벽에 머리가 깨질 줄 알면서 들이받는 산양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김석현은 성현수가 나간 문을 가만히 돌아보고 말했다.

“그래도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놔둔다? 마치 제가 정리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하실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김석현이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김석현을 보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굳이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놔두다가는 계속 팀장님의 발목을 잡겠다고 나설 수 있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셨나 보군요.”

“오해요?”

“네. 제 말뜻은 놔둬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죠.”

조수아는 서류를 든 채 굳은 듯이 제자리에 서서 한진영을 쳐다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를 향해 손짓해 서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서류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저를 따라 들어온 실적이 한 방에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날을 세우는 제가 계속 승승장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놔둬도 정리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말씀은…….”

“지금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는 부문장님이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한 번만 보인다면…….”

한진영의 말에 김석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추가 확실하게 기운다면 부문장님 입장에서도 계속 성현수 팀장을 지켜볼 수만은 없겠네요.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지요.”

한진영은 서류를 흔들었다.

“이것만 잘 해결되면 귀찮은 것들이 모두 해결이 됩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얼굴로 앉아있는 고제상을 향해 말했다.

“고 대리님께서 먼저 시작하시겠습니까? 다른 곳보다 대한그룹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원유 파트가 될 테니까요.”

고제상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

조수아는 바짝 얼은 표정으로 한진영 곁에 서서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대한그룹에 간다고 하여 평소에 가지도 않는 미용실에 예약하여 만진 머리였다.

“머리가 어디 불편하세요?”

뻣뻣이 고개를 들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조수아의 모습이 보는 사람도 목이 아프게 만들었다.

한진영은 굳은 표정으로 머리끝을 만지는 조수아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불편하지 않아요.”

한진영은 불편해 보인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머리를 만지던 조수아는 참지 못하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저기…… 한 팀장님.”

“네?”

로비 너머를 바라보던 한진영은 조수아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조수아는 몸을 반쯤 틀어 한진영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기 저 이상해요?”

“뭐가 말입니까?”

“제 머리요.”

“머리요? 머리가 어떻다고…….”

“저 대한그룹에 온다고 해서 새벽같이 미용실 가서 무려 15만 원이나 주고 만지고 온 거거든요. 근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아~ 머리.”

한진영은 조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다시 조수아의 머리를 살폈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인사말과 같은 말을 조수아에게 건넸다.

“머리 예쁘네요.”

“한눈에 보고 못 알아보셨죠?”

“제가 그런데 둔해서요.”

“아무리 둔해도…… 15만 원이나 주고 한 건데…… 새벽같이 나가서…… 15만 원이나…….”

조수아가 혼잣말과 같은 말을 던질 때 한진영은 급히 얼굴을 보이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깁니다.”

한진영이 로비를 지나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걸어가자 상대편에서도 급히 한진영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급히 잡힌 회의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늦게 내려왔습니다.”

“그럼 회장님께서 저희를 뵙지 못하시나요?”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금방 정리하고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한 팀장님께서는 우선 올라가서 기다리고 계시면 됩니다.”

윤길영 회장의 비서는 한진영에게 늦게 내려온 이유를 잠시 설명하고 몸을 돌려 한진영을 회장실이 있는 곳을 안내했다.

마포에 자리한 대한정유 본사는 지은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40층의 건물에 으리으리하게 느껴질 규모는 한진영과 함께한 조수아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쳐다봐요.”

조수아는 한진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은 회장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한진영과 조수아를 향해 눈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조수아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허리 펴세요. 지금 우리는 전쟁터에 가는 중입니다. 회사에 있는 동료들은 우리의 승리를 염원하며 기다리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허리를 굽히고 주눅 든 모습을 보이면 적에게 얕보일 수 있습니다.”

조수아는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한진영의 말대로라면 대한정유의 직원들은 모두 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적들과 한 공간 안에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눈으로 한진영을 쳐다봤다.

그러나 말을 한 한진영은 전혀 주눅 든 모습 없이 똑바로 서서 자기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건넸다.

조수아는 한진영의 얼굴에 보이는 미소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진영의 자신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미소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자 자연스레 허리가 펴지고 어깨를 내리눌렀던 중압감이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진영은 점점 몸을 곧게 세우는 조수아를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잘하셨습니다. 저와 앞으로도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가시죠.”

한진영은 허리를 곧게 세운 조수아보다 앞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감이 솟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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