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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80화 (80/650)

80화 호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윤길영의 비서를 따라 주인도 없는 회장실에 먼저 들어간 한진영과 조수아는 응접용 소파에 앉아 가만히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있으라며 차가 나왔지만, 조수아는 찻잔에 손을 가져다 댈 수가 없었다.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는 그대로 분위기에 휩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여유롭기만 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회장실을 구경했다.

“새 건물이라고 하더니 아직 냄새가 다 빠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한진영은 밖이 그대로 보이는 커다란 통유리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내려다봤다.

“마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군요. 여기 있으면 모든 게 다 내 발밑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좋은 곳에 자리를 잘 잡았어요.”

“그렇게 마음에 드나?”

한진영의 말을 받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진영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야. 내가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하아~”

윤길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한진영을 향해 인사하고는 소파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비서가 가지고 온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내가 좀 늦었는데 방 구경은 잘했나?”

“주인이 계시지 않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서요.”

“눈치? 내가 보기에 자네는 눈치 같은 것 보는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제가 이래 봬도 제법 눈치를 본답니다.”

한진영은 웃으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조수아는 마치 동네 아저씨를 만난 듯한 행동을 하는 한진영을 바라보며 놀랐다.

자기는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인데 이렇듯이 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진영은 긴장한 조수아의 등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 긴장을 풀어주고는 손에 들린 서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서류를 윤길영 앞에 내밀며 말했다.

“1차 제안서입니다.”

윤길영은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리스에 다녀왔다고?”

“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서요.”

윤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물었다.

“어떻던가?”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길거리에 쓰레기가 치워지지 않아 악취를 풍기고 있다면 이야기가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던가?”

“내년 봄입니다. 내년 봄이면 이런 사실을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겁니다.”

한진영은 윤길영 앞에 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회는 왔습니다. 그 기회를 잡을지 말지는 이제 회장님이 선택하실 문제지요.”

한진영의 말을 들은 윤길영은 천천히 봉투를 집어 들었다.

“조금 전 자네를 만나기 전에 치렀던 회의가 어떤 회의인 줄 아나?”

윤길영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한진영이 잡은 큰 틀에 김준하가 열심히 계산하여 만든 상품이었다.

김석현이 외환 흐름을 예측하여 선도환과 스왑 물량을 집어넣었다.

TF팀에 합류한 고제상이 브렌트유에 대한 선물과 옵션 등을 계산하여 적정가격을 계산했다.

그리고 조수아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의 채권을 잡아 왔다.

매도하는 것이 있다면 매수하는 것도 있었다.

가격도 다 달랐으며 끌고 가는 지점도 모두 달랐다.

여러 가지 상품을 혼합한 만큼 복잡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게 제각기 다른 상품을 융합하여 하나의 상품으로 김준하가 계산하여 만들었다.

제안받은 사람이 복잡하지 않도록 직관적으로 만든 것으로, 하나의 상품으로 모든 것에 투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한진영이 들고 온 상품의 핵심이었다.

윤길영은 그런 새로운 상품의 제안서를 바라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원유 수입 다각화를 위한 회의였네. 즉, 다른 곳에서도 원유를 수입하자 이거지. 지금 이런 계획을 수립하여 진행하면 딱 내년 봄에 원유를 수입하게 될 거야. 지금 가격으로 말이야. 90불 후반대에…….”

윤길영의 말에 한진영은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 진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사의 미래전략팀 교체를 고려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나는 여전히 모르겠네. 회사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자네의 시선이 완전히 반대라서 말이지.”

윤길영은 서류를 말아쥐고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 회사에서는 내가 이런 제안서를 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내 비서진들만이 겨우 아는 수준인데…… 아마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뒤집어질 거야. 어떻게 지금 원유가격 하락을 이야기하느냐면서 말이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외부 증권사 사람이니 문제가 더 될 수도 있겠군요.”

“그래. 분명 그런 말이 나올 거야. 그렇다면 나는 그들을 뭐라고 설득해야 하나?”

회사 내부에서는 유가의 상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년에 더 높아진 원유를 지금이라도 빨리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진영은 유가가 여기서 거의 반 토막이 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대한정유의 직원들이 듣게 된다면 윤길영이 이상한 소리에 현혹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게 뻔했다.

윤길영은 그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윤진영의 질문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건 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지요.”

“뭐라고?”

윤길영은 예상 밖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해답을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내부를 설득할만한 무언가를 내놓을 것으로 기대했던 윤길영이었다.

“제가 왜 대한정유 내부를 설득해야 하는 건가요? 저는 신성증권의 직원입니다. 신성증권에서 일어나는 일만 신경 써도 정신이 없습니다.”

“설득할 무언가가 없다면 이건 더는 진행할 수 없을 텐데?”

윤길영은 제안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에게는 이런 협박이 먹히지 않았다.

한진영은 윤길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더는 진행을 하지 못한다면 할 수 없죠. 여기서 회장님과의 일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내놓을 게 하나도 없는 건가?”

“회장님.”

한진영은 몸을 앞으로 숙여 윤길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설득은 확신이 없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런 귀찮은 과정을 제가 왜 거치려 하겠습니까? 회장님이 아니면 그걸 들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면 됩니다. 회장님을 위해 만든 상품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하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이걸 살 사람이 국내에 또 있다고? 믿지 못하겠는데?”

“회장님. 조합을 다르게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입니다. 원유에서 다른 원자재로 바꾸면 되니까요.”

“다른 원자재로?”

“원유가 반 토막에 가까운 하락을 보이는데 다른 것이라고 멀쩡하겠습니까?”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생각해보시고 대답해주십시오.”

윤길영은 자리에서 일어난 한진영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상품에 대해 설명은 하지 않는 건가?”

“아직 회장님의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제가 가지고 온 상품을 설명해 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선 회장님께서 마음을 정하시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저는 회장님을 원망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결정해 주시면 됩니다.”

“나에게 이걸 팔겠다는 애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맞습니다. 저는 그걸 회장님에게 꼭 팔아야 한다는 애절함까지는 없습니다. 회장님에게 못 판다고 하여 어디 사라질 물건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팔면 되니까요.”

“내 앞에서 허세를 부리려는 건가?”

“회장님. 저를 아직 잘 모르시는군요.”

한진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어쩔 줄 모르는 조수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손으로 일어나라는 뜻을 전한 후 윤길영 회장을 향해 말했다.

“저는 이런 일에 골치 아프게 머리싸움을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잘 생각해보시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진영이 인사를 하자 조수아도 얼떨결에 따라 윤길영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는 한진영의 뒤를 조수아가 다급히 따랐다.

문이 열리고 회장실을 나오자 조수아가 연신 뒤를 돌아봤다.

윤길영에게 자기소개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방을 빠져나올 줄 몰랐던 조수아였다.

그녀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한진영에게 물었다.

“파투가 난 건가요?”

“아니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네? 잘 진행된다고요? 이게 어떻게 잘 진행되는 거예요? 누가 봐도 파투죠.”

조수아는 한진영의 곁에 바짝 붙은 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이 있으신 거죠? 아까 말한 대로 다른 곳에 팔 수 있는 곳도 다 준비해 놓고요.”

“글쎄요. 뭐 그런 상황이 오면 당연히 다른 곳에 팔아야지요. 물론 여기처럼 수천억 치를 한꺼번에 팔지는 못하겠지만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왜 그렇게 자신하세요? 아까 보셨잖아요. 우리가 가지고 온 제안서를 펼쳐보지도 않았어요.”

“이제 보겠지요. 우리가 나갔으니까요.”

한진영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내부의 반발을 걱정하느라 괜히 한번 튕겨본 겁니다. 혹시 뭐 다른 게 없나 하고 궁금한 마음에 말입니다. 있으면 그걸 핑계로 내부 반발을 잠재울 생각이셨던 것 같은데 제가 굳이 그런 놀이에 함께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나오면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이 건물.”

한진영은 걷던 것을 멈추고 새로 지어진 대한정유의 본사를 발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 건물이 어떻게 지어졌겠습니까? 이런 건물을 짓는 곳이 이런 호기회를 놓친다? 그럼 이삿짐을 풀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금방 이곳에서 쫓겨나게 될 테니까요.”

한진영은 자신에 찬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

한진영이 회사에 돌아왔다는 말에 김정대는 사무실에서 나와 한진영이 있는 TF팀 자리로 직접 찾아갔다.

“어떻게 됐나?”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던지 한진영에게 질문하는 김정대의 모습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잘됐습니다.”

“그럼 계약서 진행해도 되나? 아니. 그 전에 설계한 상품에 맞는 물건들부터 확보해야지? 그게 아닌가? 계약서부터 써야 하나?”

정신이 없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김정대를 보고 한진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문장님. 1차 제안서일 뿐입니다. 거기서 대한정유 측에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고르고 또 수정하는 작업을 몇 번 해야 합니다. 연말을 보내고 내년 초쯤에나 계약서에 사인할 것 같으니 차분히 지켜봐 주십시오.”

“그래? 내년 초나 돼야 계약이 마무리된다고? 아~ 기다리다 말라 죽겠다. 어쨌든 수고했어. 무슨 연락 오면 바로 알려주고…….”

잘 끝내고 왔다는 말에 김정대는 한숨 돌리고 자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진영은 김정대가 멀어지자 자리에 있던 TF팀의 팀원들을 향해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1차 제안서는 잘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곧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가 저쪽에서 나올 테니 그때까지 구체적인 틀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외환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김석현이 대답했다.

“달러 쪽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로 쪽이 조금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로는 매도입니다.”

“네. 저희보다 먼저 유로 매도를 잡으려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포지션을 우리보다 더 길게 잡으려는 것이 우리보다 더 큰 확신이 있는 듯합니다.”

“어디 쪽인지 확인하고 일이 귀찮아질 것 같다 하면 유로를 버려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원유가 주 타깃이니까요. 원유는 어떻죠?”

한진영의 질문에 고제상이 대답했다.

“브렌트유는 문제가 없습니다. 크루드오일 쪽도 받아주겠다는 곳이 많습니다.”

“내년 전망이 좋다니 오히려 매도 포지션을 잡으려는 우리를 반길 겁니다. 물량 확인 꾸준히 하시고 대한정유에서 어떤 수량을 말하더라도 해결해줄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네. 원유 파트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조수아를 향해 말했다.

“아시죠? 그리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스페인. PIGS입니다.”

“그곳들 채권을 매도한다는 이야기지요?”

“수아 씨가 제일 빨리 움직여야 할 겁니다. 올해를 넘기지 마세요.”

조수아는 한진영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뒤 걱정 가득한 눈으로 한진영을 올려다보고 물었다.

“정말…… 연락이 올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한진영의 말을 믿고 그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진영과 함께 직접 윤길영을 마주하고 온 조수아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글쎄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냥 수아 씨는 제 말을 따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고제상이 조수아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아니에요.”

조수아는 고제상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 급히 자리를 피했다.

조수아가 자리로 돌아가자 질문을 던진 고제상은 뻘쭘하니 한진영과 조수아를 번갈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진영이 대한정유 본사를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한진영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진영은 전화를 받은 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조수아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수아의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가 연락이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수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대한정유 본사로 들어가 볼 테니 채권파트 빠르게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핵심이니까요. 그리고 준하야.”

한진영은 김준하를 불렀다.

한쪽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던 김준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향해 말했다.

“조금 더 규모를 키워도 되겠다. 2,500억까지 키워봐.”

조수아는 한진영의 말에 놀라 크게 눈을 떴다.

파투를 걱정해야 했던 일이 일주일 만에 규모를 수정해야 할 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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