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81화 (81/650)

81화 완성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다

한진영은 김준하에게까지 지시를 내린 뒤 외투를 챙겨 입었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제안서는 가지고 가지 않으세요? 정리해서 가지고 갈만하게 만드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요.”

갑작스럽게 예상에 없던 만남이라 아직 준비가 덜 된 TF팀이었다.

2차 제안서를 준비하기는 했지만, 정리가 아직 안 되어 있던 것이었다.

“먼저 제가 갈 테니 그냥 준비만 해주세요.”

“그럼 마무리되면 제가 가지고 갈까요?”

“아닙니다. 준비만 해주시면 됩니다. 오늘은 제안서를 들고 가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그럼…….”

한진영은 조수아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외투를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한진영은 대충 이런 자리가 마련될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가지게 된다면 윤길영 회장이 마음을 정한 거라 생각했다.

‘그럼 계약을 해보러 가볼까?’

한진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사인할 계약서를 비롯하여 두 번째 제안서 등 아무것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오늘 자리에서 윤길영 회장에게 제안한 것이 확정될 거라 자신했다.

한진영은 윤길영 회장이 있는 마포 본사로 향했다.

한진영은 이번에는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는 윤길영 회장의 비서를 따라 다시 한번 회장실로 향했다.

회장실 앞에 도착한 비서는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한진영에게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안쪽에서 문을 열고 한진영에게 들어올 것을 권했다.

한진영은 열린 문을 통해 지난번에 왔던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윤길영이 먼저 안에서 찾아온 한진영을 반겼다.

“어서 오게.”

“안녕하셨습니까?”

한진영이 인사를 하자 윤길영은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안녕? 자네가 그런 물건을 줘놓고 내가 안녕하기를 바란 건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제가 드린 제안서 어땠습니까? 아름답지 않았습니까? 그곳에 적혀있는 숫자들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설레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자네 참 넉살이 좋아 보여. 자네 나이가 얼마라고?”

“해가 넘어가면 스물아홉입니다.”

“그래? 요새 젊은 친구들은 모두 자네 같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회장님 앞에 앉아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제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으니까 이렇게 회장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스스로 얼굴에 금칠할 줄도 알고…… 하여튼 물건이야.”

윤길영은 앉은 채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핀 뒤 소파를 가리켰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게.”

“네. 그럼…….”

한진영은 얇게 미소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길영은 말했다.

“왜 그렇게 웃나?”

한진영은 윤길영의 말에 미소를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장사치가 큰 거래를 앞두고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내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처럼 이야기하는 군 그래.”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수정한 제안서를 가지고 왔나?”

“연락을 받자마자 왔는데 그런 게 제 손에 들려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자네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난 지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말이야.”

윤길영의 말에도 한진영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윤길영 앞에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겁니다. 500억 증액. 어떠십니까? 총액 2,500억으로 계약을 진행하시죠.”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회장실 가득 윤길영의 웃음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한동안 큰 웃음을 터트린 윤길영은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미있는 친구야. 계약 체결을 자신하는 것도 모자라 증액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웬만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할 거야.”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자신감을 회장님께서 못 알아채지 않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윤길영은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이 한동안 시선이 오간 뒤 윤길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안서 속에 들어 있는 상품 구조를 자세히 살펴봤네. 그 무능해 보이는 미래전략실 놈들에게 자네가 가지고 온 것을 던지고 분석해보라고 했지.”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맞아.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그리고 자기네들과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한 신성증권. 아니지. 정확히는 자네지. 자네를 사기꾼이라 폄하하기도 했다네.”

“이해합니다.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완전히 반대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시선을 탓하지 않습니다. 지금 유가 관련된 예측은 모두 내년 100불 재탈환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우리네들의 예측이네. 그래서 미래전략실에서는 3월 만기 원유선물을 매입하는 것을 골자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자네는 그것과 완전히 상반된 제안서를 가지고 왔으니 그들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야.”

“이해합니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은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장황한 설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왜 그 방향을 보고 있는지 정도쯤은 이야기할 줄 알았던 윤길영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미래전략실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할 말이 없나?”

“뭘 말입니까?”

“시장과 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이유 말일세.”

“이유는 계속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스?”

“네. 바로 그겁니다.”

윤길영은 잠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스로…… 유가가…….”

“박살이 납니다.”

확신에 찬 말투였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일 필요도 없다는 당연한 듯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윤길영은 그런 한진영의 말에 더는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여튼 자네는 내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깟 기대를 충족시키면 뭐합니까? 돈만 벌게 해 드리면 되는 일이지요.”

윤길영은 손가락을 들어 한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풍철강의 이 회장님이 그러더군. 진작에 정유나 석유화학 회사 하나 인수해둘 걸 그랬다고 말이야. 프라임리츠의 정 회장님은 착실히 돈을 모으고 있다더군. 내년에 헐값에 나오는 물건들 싹 다 거둬들이겠다고…….”

“하여튼 눈치들은 빠르네요. 어쩐지 조용히 있길래 조용히 있을 양반들이 아니다 생각했는데…… 은밀히 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나 봅니다.”

윤길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진영을 바라본 채 말했다.

“포지션이 너무 한쪽에 치우쳐져 있어.”

“원하시면 수익을 좀 포기하더라도 균형을 맞춰드리겠습니다.”

“원달러로 맞추고 싶어.”

“문제가 안 됩니다. 유로의 등락이 더 심할 테니 그만큼 위험도가 높을 테니까요.”

“은행 쪽은 괜찮을까?”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로 부실 은행들이 많이 정리됐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은행들은 몸을 사리느라 굉장히 건전한 상태이고요.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을 겁니다.”

“결론은…….”

“결론은…… 그리스 파산은 없다입니다.”

물 흐르는 듯한 질문과 대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전에 질문과 대답을 미리 만들어 놓고 대화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호흡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중이었다.

윤길영은 오랜만에 느끼는 호흡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럼 양방향을 다 먹을 수는 없는 건가?”

“그러기에는 덩치가 너무 큽니다. 계약 덩치를 줄일까요? 그렇게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니네. 됐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확실한 방향 하나만 먹어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윤길영은 한진영과의 대화를 속으로 되짚어가는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을 가만히 기다렸다.

한동안 말없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던 윤길영은 한진영을 향해 마지막 말을 건넸다.

“계약은…… 미안하네. 자네가 아니라…….”

“그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약 체결 때는 우리 사업부 부문장님께서 참석하시게 될 겁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일을 진행했던 사람은 한진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사인하는 과정에서 책임자가 바뀐다는데 화가 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만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의 말을 전혀 고깝게 듣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이야기해줘서 다행이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혹시라도 저와 사인까지 해야 한다고 하실까 봐 걱정했습니다.”

“섭섭하지 않나?”

“섭섭하다니요? 당연한 일을 왜 섭섭해합니까? 제가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계약은 다른 문제이지요. 계약은 회사의 얼굴을 내보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신성증권을 대표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배포가 크구먼.”

“배포가 아니지요. 제가 머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에 섭섭함을 느낄 이유가 없으니까요.”

윤길영은 한진영의 말에 엷게 미소 지었다.

“혹시 자네 회사 옮길 생각은 없나? 자네 말대로 미래전략실이 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이번에 자네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거기에는 밥버러지들만 있다는 게 증명이 되는 거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 어떤가?”

“농담도 잘하십니다. 미래전략실이라면 그룹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그곳에 제가 왔으면 좋겠다고요?”

“싫은가?”

한진영은 윤길영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 저를 미래전략실의 실장으로 앉히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고 일원으로 제안한다면 제가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농담은 더는 하지 마십시오.”

한진영의 말에 윤길영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아쉬워서 그렇지. 자네 아직 결혼 전이지? 보자 내가 어디 숨겨놓은 딸이 있던가?”

턱에 손을 올리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윤길영이었다.

농담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그가 아쉬워한다는 것만큼은 잘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회장님. 이걸로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이곳에 있는 게 회장님에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오히려 회장님 품에 들어간 것보다 더 말입니다.”

“도움이 된다? 어떤 식으로 말인가?”

생각을 하던 윤길영은 턱에 손을 올려놓은 채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올 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유상증자나 채권발행 그리고 회장님께서 가장 신경 쓰고 있는 IPO(기업공개) 같은 것 말입니다.”

윤길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의 짙은 미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쪽에서 제가 자리해 있는 게 회장님에게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맞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윤길영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처음과 지금 중 언제 웃음소리가 더 컸는지 묻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분이 좋다는 것이었고 그 기분의 정도는 지켜보는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네 말이 맞아. 거기 있는 게 더 도움이 되겠구먼. 그리고 이번 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일을 하게 될 테니 그렇게 알아.”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진짜’ 일을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 윤길영의 웃음소리가 회장실 문을 뚫고 밖으로까지 새어나갔다.

***

윤길영이 마음을 정하자 나머지 일 처리는 실무진 단위에서 진행되기 시작했다.

대한그룹의 미래전략실은 물론이고 법무팀과 자금팀 그리고 회장 직속의 비서실까지 모두 동원되었다.

한두 푼짜리 계약이 아니었기에 세세한 분석이 진행됐다.

신성증권 측도 대한그룹에 못지않았다.

FICC 사업부 전체 인원 중 절반이 이번 일에 매달렸을 만큼 이번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계약 체결식에서는 대한그룹의 미래전략실 실장이자 부회장이 나와 김정대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짝짝짝짝.

사인을 끝마친 두 사람이 서로 계약서를 나눠 가지며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는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고, 그 자리에 한진영을 비롯한 TF팀도 함께 있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새해는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수고했어. 네가 없었으면 이번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 이제 당분간 큰일은 없을 테니까 푹 쉬도록 해.”

“제가 뭘 했다고요. 한진영 씨가 제일 고생했죠. 그리고 이런 큰일을 저에게 맡겨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래.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 고생했지.”

한진영이 퀭한 눈을 하고 있는 김준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흘에 한 번 집에 들어가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강행군을 이어온 TF팀이었다.

원자재 선물에 선도환과 스왑 물량 그리고 여러 국가의 채권과 그에 걸맞은 옵션들까지 모든 일을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무리 짓는다고 결정하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며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TF팀 팀원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석현도 감격한 표정으로 다가와 한진영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조수아와 고제상 등도 찾아왔다.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에 모든 사람이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