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89화 (89/650)

89화 모두가 죽는 자리에서의 반전

5월 중순.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은 시장의 움직임 속에서 신성증권만은 조용히 움직였다.

500억으로 시작됐던 TF팀의 자본은 어느새 1,200억까지 올라가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자본금을 뒤도 보지 않고 정리해 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놓은 것들을 잡을 타이밍을 쟀다.

FICC 사업부의 다른 곳들도 준비해 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존 고객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고객들을 물색하여 투자자들을 새롭게 꾸렸다.

어디를 보더라도 두려움이 느껴질 시장이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큰 것을 몰고 온다는 말로 고객들을 설득해 나갔다.

WM본부도 물밑에서 고객들을 유치했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로 시장이 무너지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이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적극적인 투자자들을 모았다.

1,500이라는 숫자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성증권 WM본부의 스탠스였다.

이런 신성증권의 모습을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시장과 모조리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권업계에서 신성증권이 차지하는 위치가 높았다면 지금의 행동을 어쩌면 다르게 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신성증권은 증권사 순위에서도 중후반대를 유지하는 중소형 증권사에 불과했다.

이런 곳이 시장의 상황과 전혀 다른 포지션을 잡는다는 것은 시장이 움직일 거라는 것을 예측해서라기보다는 한 방을 노리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1,200억 다 쓸어 넣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김석현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김석현에게 물었다.

“아이는 어떻습니까?”

김석현은 기쁨에 겨운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대답했다.

“회복이 빠르다고 합니다. 이게 다 팀장님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기는요. 다 대리님이 잘해주셔서 도와드리기 위해 그런 것인데요. 회복이 잘 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지 팀장님의 말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한진영은 각오를 다지는 듯한 김석현의 말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석현의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받아들인 이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걸 굳이 고쳐줄 생각이 없는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그저 김석현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놔둘 뿐이었다.

한진영은 TF팀의 자금이 집행될 상품들을 확인한 뒤 날짜를 확인했다.

‘이제 5월 25일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한진영이 디데이로 기억하는 날이 바로 25일이었다.

그날 증시를 비롯하여 시장의 모든 것이 피크를 찍을 때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전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제 준비가 다 됐으니 다시 담으러 가보자.’

한진영과 마찬가지로 FICC 사업부의 모든 팀도 자기들과 뜻을 같이할 고객들을 모은 뒤 때를 기다렸다.

한진영이 GO를 외치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게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

한진영이 기억하고 있는 5월 25일의 날이 밝았다.

한진영의 기억대로 전날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모든 금융시장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3.5%의 폭락을 보였습니다.”

“독일과 영국이 2.6%, 프랑스는 3%가 넘게 하락했습니다.”

“미국의 3년 만기 채권의 경우 수익률이 폭락했습니다. 위험자산과 유럽권의 채권에서 빠져나온 금액이 미국 채권으로 모두 흘러간 모습입니다.”

“유가도 4%에 가까운 급락을 보였습니다. 어떻게든 지지하려던 50불대마저 깨진 상황입니다.”

한진영은 아침 출근 후 브리핑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에 나온 뉴스가 뭐가 있었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조수아가 대답했다.

“스페인 쪽에서 나온 뉴스가 시장을 타격한 가장 강력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스페인이라면 며칠 전에 이야기했던 지방은행의 강제합병 문제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까?”

“네. 국채 문제가 은행권까지 번졌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 은행들의 디폴트가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으로 말입니다. 현재 PIGS에 아일랜드까지 더한 문제가 되는 나라들의 익스포저 규모가 2조 3천억 유로라고 합니다. 한화로 따지면 3,500조로 이것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시장에 퍼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네요.”

조수아의 말에 김석현이 뒤를 이었다.

“BBC에서는 유럽 재정위기가 서브프라임 이후 겨우 회복되던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에 한반도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은 만큼 투자를 자제하는 것이 어떠냐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BBC뿐만이 아닙니다. 뉴욕타임스 또한 북한이 남북관계 단절 선언을 하면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는 속보를 전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런 북한의 도발에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도 내보냈고요.”

조수아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난리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대응이라느니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 않나요?”

한진영은 조수아의 말에 웃으며 달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오고 있지요. 그리고 나오게 계속 언론이 떠들고 있고요. 다음 달에 지방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래서…… 쉽게 결론을 내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니 진짜 그렇네요. 어떻게든 선거 때까지 끌고 가려는 정부의 생각인 것 같아요.”

“뭐 그건 정부에서 알아서들 하라고 하고…… 우리는 돈이나 법시다. 디데이는 오늘입니다. 분위기 다 쏠려 있으니 준비했던 것을 그대로 펼쳐도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모두 각자 자리에서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합시다. 수아 씨는 우리 계획을 사업부 내의 다른 팀에게도 전해주시고요.”

“네. 그렇게 할게요.”

장이 열리기 전에 새벽같이 모인 TF팀의 팀원들은 회의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동안 한진영이 이야기하던 파도타기로 반대포지션을 잡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팀원들은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똑바로 정신을 차렸다.

한진영의 TF팀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업부의 모든 팀이 한진영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FICC 사업부만이 아니었다.

위층에 자리 잡은 WM본부 또한 한진영의 팀을 따라 일제히 매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신성증권의 FICC와 WM이 일제히 시장의 공포와는 다른 포지션을 잡아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계획했던 크루드오일 9월물 선물 매수 포지션 200계약 완료했습니다.”

“3년물과 10년물 채권 완료했습니다.”

“달러화 매도 및 원화 매수 완료했습니다.”

“청명전자를 비롯한 은행주들과 건설주 등의 매수 완료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속속 계획했던 일들의 완료 이야기가 전해져 들어왔다.

한진영은 조용히 보고를 받으며 무너져 내리는 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전날 저녁 무너져내렸던 미국과 유럽 시장에 이어 아시아 시장도 뒤를 이어 무너져 내렸다.

3%가 넘게 폭락한 홍콩의 항셍을 비롯해서 닛케이의 일본과 상해의 중국증시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코스피가 압권이었다.

군사 충돌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외국인들의 일방적인 매도 속에 1,500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확산해 갔다.

환율시장도 증시의 시장과 비슷했다.

원화 가치의 하락 속에서 채권시장에서조차 외국인들은 위험회피를 위해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한국 시장에서 당장에라도 철수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듯했다.

“계획했던 매수가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김석현의 보고에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 마감에 맞추어 포지션을 잡은 한진영의 TF팀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FICC 사업부의 다른 팀들도 속속 포지션이 잡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WM본부에서 전해진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장근수의 WM본부도 각 지점을 비롯하여 사업부에 적극적인 매수포지션을 지시했다고 했다.

FICC 사업부와 WM본부까지 모두 한진영이 계획한 내용 아래 포지션을 잡아나간 것이었다.

한진영의 TF팀만 잡힌 포지션의 금액이 1,200억이었다.

FICC 사업부 전체로 보자면 약 2,000억이 넘는 돈이 오늘 당일에만 집행됐다.

WM본부까지 더하면 잡힌 금액은 훨씬 높아질 게 분명했다.

이런 일방적인 포지션은 근래 보기 드물 정도였다.

“별일 없겠지?”

장이 마무리되자 김정대가 사무실에 가만히 있지 못하겠던지 한진영이 있는 자리로 찾아왔다.

오랜 세월 활동했던 그도 지금의 포지션은 뒤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극단적이었다.

“우리가 포지션 잡은 게 소문이 났나 보더라.”

“모를 수가 없겠죠. 이렇게 일방적인 포지션이 잡히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게다가 우리 사업부만 그런 게 아니라 WM본부의 상당 부분까지 함께 들어갔으니…… 주식시장에 채권, 환시장 할 것 없이 죄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다 들어가지 않았냐? 그러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한진영은 불안감이 살짝 엿보이는 김정대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오늘은 가서 푹 쉬세요.”

“푹 쉴 수나 있었으면 좋겠다. 잘못되면…….”

“마음 놓으세요. 이 지점에서 잘못되면 우리만 잘못되는 게 아니니까요.”

여기서 무너지면 시장붕괴를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지난 서브프라임 때 붕괴했던 것처럼 포지션을 들어간 사람이나 들어가지 못한 사람 모두 생존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김정대는 한진영의 말에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한진영의 말대로 이 뒤는 물러나고 말고 할 이야기를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모두가 죽는 자리였다.

***

[그리스 구제금융 승인]

하루 만에 상황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암흑 덩어리의 공간에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스 의회가 구제금융을 긴급으로 승인하는 법안을 처리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해결을 하려 했던 그리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다른 나라들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회의 승인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럽연합과 IMF는 총액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연이율 5.5%에 지원하는 합의를 끌어냈다.

그리스의 막혔던 숨통이 단번에 뚫리는 순간이었다.

전날 폭락을 보였던 금융시장은 그리스의 구제금융 승인 소식에 환호했다.

단숨에 전 세계 금융시장을 날려버릴 것 같았던 폭탄의 뇌관이 해체됐다는 식의 표현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은 온전히 그리스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다는 평가였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 화답하려는 듯이 시장이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폭락에 폭락을 이어가던 주식시장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전날 -3%가 넘는 하락을 보였으며,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2%의 하락을 보이던 미국의 다우가 그리스 구제금융의 소식이 전해지고 플러스권을 회복한 데 이어 2% 상승 마감한 것이었다.

환율과 채권시장도 안정을 찾았다.

유가도 주식시장을 따라 상승했으며 금을 비롯한 안전 자산들은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밤사이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

“정신 바짝 차려.”

김정대는 FICC 사업부를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부하직원들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던 김정대의 모습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자켓을 벗어던지고 와이셔츠의 팔을 걷어붙인 김정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사업부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만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장이 시작되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마. 화장실을 갈 때도 옆에 있는 동료에게 이야기하고 가도록 해. 혹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바짝 긴장하고 집중해. 모두 알았어?”

“네!”

이미 포지션을 잡아놓은 만큼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지시였다.

사업부 직원들은 김정대의 지시를 받아 시장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김정대는 직원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뒤 아래층에 자리 잡은 딜링룸으로 향했다.

한진영은 딜링룸으로 간 김정대가 어떤 식의 주문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적극적인 대응.

그동안 딜링룸에 있는 트레이더들에게 김정대가 주문한 내용은 소극적인 시장의 대응이었다.

시장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소극적인 대응으로 시장의 변화를 기다리자는 것이 그동안의 작전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며 세상이 바뀌자 소극적으로 시장을 바라보던 스탠스를 바꿔 적극적으로 나가야 했다.

김정대는 그걸 지시하기 위해 딜링룸으로 향했다.

장이 시작하자마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쉽사리 포지션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직 바뀐 분위기에 탑승하지 못한 참여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시장을 최대한 잡아놓고 포지션을 바꾸겠다는 뜻이 전해지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환율시장부터 그런 참가자들의 뜻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고공행진을 보이던 환율시장이 단번에 30원에 가까운 하락을 보였기 때문이다.

“1,500원대가 깨졌습니다.”

환율의 하락은 채권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10년물 국내채권의 금리가 20bp(0.2%) 하락했습니다. 남유럽권의 경우에는 50bp 이상씩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부텍사스유의 가격도 급등하고 있습니다. 현재 5% 가까이 상승하여 50불대의 가격대도 회복했습니다. 골드와 실버도 하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환율에 채권 그리고 상품시장까지 움직이자 결국 증시도 견디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날보다 2% 이상 상승한 가격에서 마무리한 것이었다.

1,500대를 깨느냐 마느냐 하던 증시가 1,500대를 결국 지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음 날은 상승 폭을 더욱 키웠다.

어떻게든 포지션을 바꿀 때까지 시장을 잡고 있겠다던 이들이 기브업을 선택하고 말았다.

시장의 힘이 강력하여 더는 잡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익스포저 우려를 겪던 은행들의 경우에는 10%에 가까운 상승을 보였으며, 건설주 또한 8%가 넘는 상승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리스 국가산업에 진출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의 반 토막이 났던 청명전자는 상한가에 진입했다.

그로 인해 1,200억을 집어넣었던 한진영의 TF팀 자금이 이틀 만에 1,500억대를 돌파했다.

한진영을 따라 강력한 포지션을 구축했던 FICC 사업부도 엄청난 수익을 올릴 것이 예상됐다.

그리고 WM본부까지…….

신성증권은 축포를 올려도 될 정도로 이번 사태의 최대 승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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