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확률에 따라 움직인다
남원석은 가만히 김정대와 한진영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얼추 끝나는 모습을 보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거라 대충 우리의 이번 일이 마무리된다고 생각하면 됩니까?”
한진영은 남원석의 질문에 이번에는 남원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잔뜩 기대했던 남원석은 한진영의 말에 조금은 시무룩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도 큰 수익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더 큰 수익을 기대했던 듯했다.
남원석은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에 아쉬움을 보이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상품에 관련된 것들은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주식과 관련된 것들은 더 끌고 갈 생각입니다.”
“주식은 더 끌고 간다면…….”
“은행주와 건설주 그리고 청명전자는 여기서 더 끌고 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시무룩해졌던 남원석은 한진영이 말할 때마다 한진영의 말을 따라 하며 표정을 화사하게 바꿨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입할 생각입니다.”
남원석은 투자를 멈추지 않겠다는 한진영의 말에 손뼉을 쳤다.
“제가 기다리던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간다는 말. 저는 이런 말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사장님. 잠시만요.”
김정대는 흥분한 듯한 남원석을 잠시 진정시킨 후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본격적으로 매입한다고? 자네…… 얼마나 더 매입할 생각으로 하는 말인가?”
“현재 가용자금을 모두 쓸어 넣을 생각입니다.”
“2,000억을 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2,000억을 다 쓸어 넣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님?”
한진영이 남원석을 바라보고 묻자 남원석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나?”
“알고 있다기보다는 예상이 됐던 것이지요.”
김정대는 한진영과 남원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김정대를 향해 설명했다.
“아무리 불문율과 같은 상황을 무시하고 저를 위해 밀어줬다고 하더라도 2,000억까지 자금이 올라가게 된다면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자금을 회수해 갈 거라 생각했죠. 제 생각이 맞죠?”
“정확하게 보고 있네. 맞아. 2,000억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본사에서도 부담이 돼. 자기자본을 이렇게 크게 굴리다가는 정부에게 밉보일 수도 있는 일이라서…… 이해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진영은 남원석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사실 한진영이 원하던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계속되었을 때 한진영이 본사에서 튀어 나갈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튀어 나갈 때 사람만이 아닌 자본도 함께 튀어 나가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상황이 꼭 필요했다.
모든 것이 한진영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는 남원석은 한진영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제가 처리할 수 있는 금액이 어느 정도 되는 건가요? 여전히 500억이 되는 건가요?”
“본사에서는…… 대략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네. 이해해주게.”
“남 사장님.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회사의 결정을 존중하는 사람이니까요. 500억에 맞추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한 팀장. 내가 미안해서 하는 말인데…… 본사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자네의 성과급을 약 10억 정도를 지급할 계획을 하고 있다네. 신성증권이 설립한 이래 이렇게 많은 성과급이 한 번에 지급된 정도가 없을 정도라고 하니까 자네가 이번 일은 이해해주기 바라네.”
남원석은 계속 미안하다며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항까지 미리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을 보고 다시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김정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500억이 제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의 한계이니 여기에 맞춰 주식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모두 말인가?”
“네. 모두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지난번에는 일정 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모두라면…… 우리 FICC 본부와 점점 가는 길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주식을 운용하는 곳이 아니야.”
“그래서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진영은 남원석이 부르기를 기다렸던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희 팀은 여기서 더 유연한 투자를 하기 원합니다. FICC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돈이 되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권한을 저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돈이 되는 어떤 것이라도 투자를 하겠다고?”
“앞으로 연말까지 주식시장은 상승세를 타게 될 겁니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그냥 두고 보기에는 아까우니까요.”
“연말까지 상승장? 그럼 1,700대로의 회귀를 이야기하는 건가?”
한진영은 김정대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더 높은 곳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말까지 2,000. 내년 이맘때쯤에는 2,200까지…… 앞으로 상승장이 펼쳐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진영의 말이 끝나자 남원석은 김정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이 말뜻을 알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바라본 김정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
“그래서? 임원 회의에 너도 참석하라고 그랬다고?”
“어. 임원 회의에 나와서 조금 더 이야기해달라는데…… 뭐 그러자고 했어.”
“지수 2,000이라…… 놀랄 만도 하지. 놀랄 만해. 서브프라임 때 장이 미쳐서 찍었던 자리가 2,000이었으니까.”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말을 하고는 김준하를 슬쩍 바라봤다.
김준하는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는 듯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다.
이성우는 슬쩍 한진영에게 몸을 숙이고 물었다.
“얘 괜찮냐? 어디 아픈 애 같아.”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눈에도 김준하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손에 들린 패를 슬쩍 들어 안에 있는 숫자를 확인하고 내려놓은 뒤 칩을 던졌다.
“콜!”
이성우가 콜을 외치자 김준하의 차례가 돌아왔다.
김준하는 그때까지 계산하던 것을 멈추지 않더니 조심스럽게 앞에 놓인 칩을 들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더블!”
이성우는 김준하를 돌아봤다.
“여기서 왜 따당을 쳐? 그냥 콜해.”
“싫어요. 더블 할 거예요.”
“아 참…….”
이성우가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 한진영을 돌아보자 한진영은 패를 덮었다.
“다이.”
“어? 넌 다이야?”
이성우는 바닥에 깔린 패를 슬쩍 쳐다봤다.
개패도 이런 개패가 없었다.
플러시는 고사하고 스트레이트는 애초에 노릴 수도 없게 나와 있었다.
게다가 죄다 숫자들로 깔려있는 게 결국 막판에 가서는 메이드가 안 된 상태에서 가장 높은 카드를 겨루는 하이 카드로 이기는 사람을 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보통 이런 상태에서는 원페어를 들고 덤비는 사람이 왕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베팅으로 보아 그런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마지막 카드까지 봐야 한다는 소리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택한 한진영이 이상하게만 느껴진 이성우였다.
“왜 쫄았어? 판돈도 크지 않은데…….”
“난 쫄았어. 하려면 너나 해.”
한진영이 깨끗하게 손을 털자 이성우는 고개를 갸웃하고 김준하가 배팅한 돈을 받았다.
“콜!”
딜러가 마지막 카드를 놓고 이성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세컨 플레이어부터 베팅하겠습니다.”
마지막 카드도 별 볼 일 없는 카드였다.
이성우는 입을 씰룩하고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체크.”
김준하는 이성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칩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올인!”
“이게 미쳤나. 야! 뭐 하는 거야? 이거라 뭐 한다고 돈을 다 집어넣어?”
김준하는 이성우의 외침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빨리 배팅하라는 눈짓만 했다.
이성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이성우를 재촉했다.
“뭐해? 빨리해. 사람들 다 구경한다.”
뒤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성우의 배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우는 입을 씰룩하고는 패를 던졌다.
“에이. 죽어. 너 뭐냐?”
이성우가 소리치고는 김준하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패를 뺏어 들었다.
“뭐야? Q 탑? 너 이 패를 가지고 올인을 한 거야?”
“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메이드도 안 된 이런 카드를 가지고?”
“네.”
이성우는 태연하게 말하는 김준하를 잡아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짜처럼 카드를 치는 김준하라면 잡아먹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아먹기는커녕 매번 이성우가 김준하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다.
“너 왜 지금은 안 들어와?”
“들어가기 안 좋아 보여서요.”
“그럼 아까는 왜 들어왔어? 좋아 보여서 들어왔어?”
“네. 아까는 이길 확률이 있었으니까요”
“4 원페어가 이길 확률이 있는 거야?”
“어쨌든 제가 이겼잖아요.”
이성우는 할 말이 없었다.
4 원페어가 좋지 못한 패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기의 2 원페어를 잡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4 포카드나 4 원페어나 승부를 결정짓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성우는 한번을 잡지 못하는 김준하를 보며 씩씩댔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본 뒤 김준하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렇게 약 30여 분간의 텍사스 홀덤 플레이가 계속 진행된 뒤 모두가 기다리던 큰 판이 벌어지게 됐다.
한진영에게는 5 다이아와 4 클로버가 들어왔다.
이성우에게는 9 스페이드와 5 스페이드가, 김준하에게는 3 원페어가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깔린 패 석장.
6, 7, 3 스페이드 세 장이 깔리게 됐다.
한진영은 스트레이트.
이성우는 플러시.
김준하는 트리플.
한 번의 배팅만으로 모두 메이드가 되어 버린 큰 판이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이성우의 코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벌렁거렸다.
한진영은 턱을 쓰다듬었으며 김준하는 또다시 허공에서 손가락이 그어졌다.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는 김준하를 보며 이성우는 조심스럽게 배팅에 들어갔다.
“우선 100불.”
“레이즈요. 받고 100불 더요.”
죽겠다고 나올 거 같았던 김준하가 따라온다는 소리에 이성우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질 뻔했다.
이미 플러시로 메이드를 해 놓은 상태였다.
거기에 8 스페이드가 들어온다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는 막강한 족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김준하가 어떤 패를 잡더라도 99%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이성우였다.
이미 스트레이트를 메이드해 놓은 한진영은 잠시 고민했다.
바닥에 깔린 같은 그림의 그림 세 장.
스트레이트를 메이드했지만 따라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여전히 계산을 하는 김준하와 얼른 자기 턴이 와서 배팅하고 싶다는 이성우를 보며 죽는 것을 택했다.
“다이.”
이성우는 한진영을 돌아보고 잘 선택했다는 눈짓을 보낸 후 당차게 배팅해 들어갔다.
“레이즈! 받고 100불 더.”
“콜!”
김준하는 이성우의 배팅을 그대로 받았다.
뜨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딜러가 네 번째 카드를 오픈했다.
3 클로버.
아쉬워하는 이성우와 빨라진 손가락의 김준하였다.
이성우는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지 다시 배팅을 이어갔다.
“200불.”
“레이즈! 받고 200불 더.”
“콜!”
클럽으로 운영되는 텍사스 홀덤 펍에서도 흔하지 않게 벌어지는 큰 판이었다.
실제로 가치를 지닌 칩도 아니고 단순한 게임용 칩일 뿐인데도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이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
이성우는 김준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냥 우리 깨끗하게 다 밀어 넣고 까보는 게 어때? 배팅하는 것도 귀찮은데.”
“좋아요.”
둘은 앞에 쌓여 있는 칩을 다 밀어 넣은 채 손을 털고 딜러의 마지막 카드가 오픈되기를 기다렸다.
K 하트.
이성우의 눈이 흔들렸다.
첫 석 장에서 메이드가 됐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앞에 보여지는 석 장의 스페이드 카드보다 뒤에 보이는 3 원페어가 더욱 신경 쓰였다.
“수고하셨어요.”
김준하는 이성우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들고 있던 패를 뒤집었다.
3 포카드.
“플러시죠? 제가 잘 먹을게요.”
“너. 그동안 잘만 죽더니 왜 지금은 끝까지 따라왔어? 나 플러시인 거 알면서…….”
이성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김준하에게 말했다.
김준하는 그런 이성우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도 첫 세 장에서 3 트리플로 메이드가 됐어요. 그리고 나머지 두 장에서 3이 나올 확률은 제가 죽을 확률보다 높았어요. 게다가 바로 다음 장에서 3이 나와버렸으니 제가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내가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만약 첫 세 장의 카드가 저런 식이 아니었다면…… 맞아요.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무서워 죽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들고 있는 카드에 깔린 넉 장만으로는 메이드를 하지 못하는 카드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메이드를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마지막 장을 봐야 하는데…… 그 확률이라면 그냥 올인하는 쪽이 확률이 더 높아요.”
“너 그럼…… 지금까지 죽은 게 날 놀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확률로 계산해서 배팅한 거라고?”
“맞아요. 카드는 확률 게임이잖아요. 제가 왜 성우 씨를 놀리려고 죽겠어요. 계산해서 높은 확률로 움직인 것뿐이에요. 그리고 뭐 어때요. 실제 돈이 걸린 것도 아닌데.”
이성우는 김준하의 말에 씩씩댔지만 할 말이 없었다.
철저히 계산에 의해 움직였다는데 거기에 다른 말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칩을 자기 자리로 가지고 오는 김준하를 보며 한 가지를 떠올렸다.
‘김준하에게 맡기면 되겠구나.’
한진영은 이미 미국에서는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김준하에게 맡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