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93화 (93/650)

93화 충분한 검증과 데이터를 모아 확실한 것을 만든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선 불을 켰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시연을 한 뒤 제일 먼저 말씀드린 게 바로 이 프로그램은 임시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기본으로 보기에도 어려운 시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죠.”

한진영은 노트북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말을 계속 이었다.

“제가 100만 원 주고 긴급으로 만든 겁니다. 이런 건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각 증권사가 고객들이 자동매매를 할 수 있도록 API를 제공해준다면 이런 건 개인들이 직접 만들 수 있는 수준이지요. 물론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한 번에 많은 종목에 많은 주문을 넣을 수 있지만 그건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요.”

“API가 뭔가요?”

모르는 용어가 나오자 궁금했던 팀원 중 하나가 한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진영은 질문을 한 사람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간단하게 외부프로그램을 HTS에서 쓸 수 있는 연결고리를 증권사가 제공해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요.”

한진영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다시 이야기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만들기는 매우 쉽습니다. 단순하지요. 중요한 건 이 안에 어떤 공식을 집어넣어 어떻게 매매를 하게 만드냐입니다.”

몇 번이나 만들기는 쉽다는 말을 건넸다.

프로그램에 문외한이면 문외한일수록 프로그램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이었다.

지난 시절 몇 번이나 그런 광경을 보았던 한진영이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채 외견에만 신경 쓰던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한진영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프로그램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깊이 각인시키려 했다.

한진영은 말을 잠시 멈춘 뒤 자리에 앉아있는 팀원들을 쓸어봤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중에 트레이딩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철저히 그런 사람들은 배제한 채로 짠 팀이었다.

이렇게 팀을 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자리에 앉아있는 팀원들은 전략과 분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시장 등의 변화를 예측하는 사람들.

TF팀의 팀원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진영은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자리를 잃을 것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앞으로 이루어질 이 매매 방법에 쓰일 수식을 구상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수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 프로그램 안에 집어넣는 일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는 코어를 여러분들께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는 수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팀원들이었다.

팀원 중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네. 질문하세요.”

“그럼 이건 언제부터 하게 되는 건가요?”

한진영은 손으로 노트북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프로그램도 함께 꺼지며 스크린 속의 화면도 함께 꺼져버렸다.

한진영은 노트북을 닫은 채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지금 이런 식의 매매법은 미국에서 먼저 테스트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 외의 국가에서는 개념만 있을 뿐이지 아직 시도조차 하고 있지 못하지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이런 식의 매매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작할 일이라는 겁니다.”

한진영은 회의실에 앉아있는 팀원들의 어깨를 하나하나 두드렸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조금은 들떠 있는 분위기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하는 일이니 급하게 할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준비해 나가면 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서 시연한 것은 우리의 구상을 미리 알려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작은 저기 있는 김준하 씨와 김석현 대리님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밑바탕에 벽돌이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여러분이 하나하나 참여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차분히 지금의 자리에서 순서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자리에 있는 TF팀 팀원들은 자기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여 준 한진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무리해서 밀어붙인다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장에 제대로 된 퀀트매매가 없기에 어쩌면 어설픈 공식과 부족한 전략만으로도 충분히 시장에 대응할 만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매매법만으로도 큰돈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그렇게 억지로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시간이 충분한 만큼 꼼꼼한 검증을 통해 확실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했다.

여기에도 통하고 저기에도 통하는 만능 공식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지난 시절 증명이 됐다.

각 시장에 맞는 공식은 따로 있었으며 그곳에 맞는 공식을 찾아 프로그램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도 여러 증권사를 통해 알려졌다.

한진영은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을 각 시장에 맞는 공식을 찾아 적용하는 데 쓰려 했다.

막상 닥쳐서 허둥지둥 대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을 때 충분히 테스트하여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것이 한진영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도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500억.

주식시장에 사용하겠다며 이미 승인을 받은 자금이었다.

‘주식 시장만큼 다양한 패턴이 존재하는 곳이 없지. 이곳에서 충분히 검증하고 데이터를 모아 확실하게 만든다.’

한진영은 어서 빨리 퀀트매매를 하고 싶어 하는 팀원들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

회의실에서 팀원들에게 직접 시연을 한 이후 팀원들의 의욕은 하루가 다르게 솟구쳐 올랐다.

지난 프로젝트로 금전적인 보상을 충분히 받을 것이 예상되는 팀원들이었다.

아무리 성과급이 적게 나와도 TF팀의 최소 성과급 규모는 억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그들에게 더는 돈이 새로운 목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회의실에서 보여준 영상 속의 퀀트매매가 팀원들을 자극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서 빨리 한진영이 보여줬던 것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수백 개에 달하는 종목 중 시험할 대상을 추려야 했다.

무턱대고 아무 종목이나 할 수는 없었다.

1분에도 적게는 수십 번에 많게는 수백 번 혹은 그 이상의 매매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금감원의 관리대상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테스트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철저히 수립된 계획에 따라 테스트를 펼치더라도 다른 이들이 모를 만한 곳을 골라야 했다.

한진영과 김석현은 함께 모니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는 어떻습니까?”

“하루 거래대금이 너무 적지 않겠습니까? 테스트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김석현은 다음 종목을 가리켰다.

“여기는 거래대금이 충분하니 테스트하기 좋을 것 같은데요?”

“변동이 적습니다. 이렇게 엉덩이가 무거운 곳에서는 정확도를 테스트하기 어렵습니다.”

까다롭게 테스트할 종목을 고르는 한진영이었다.

김석현은 그런 한진영의 선택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첫 스타트를 끊을 종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종목을 선별해 나갔다.

“팀장님.”

조수아가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와 한진영 옆에 섰다.

“IT부서에서 전출되어 온 박도하 대리님이세요.”

조수아의 소개에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도하는 한진영이 퀀트매매를 구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축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지난 시절 접점은 없었지만 이름은 많이 들어봤었다.

그리고 퀀트매매를 하게 된다면 꼭 자기 팀으로 데리고 오리라 마음먹었었고 그걸 지금 현실로 실현했다.

한진영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고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TF팀의 팀장을 맡은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한진영의 내민 손을 잠시 내려보던 박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진영의 손을 잡고 FICC 본부를 살폈다.

자기가 이곳에 왜 왔는지 표정에서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제가 여기에 왜 온 거죠? 위에서 FICC 본부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오기는 했는데…….”

한진영은 박도하와 악수를 한 손을 거두고는 말했다.

“앞으로 박도하 대리님께서는 우리 TF팀과 함께하시게 될 겁니다.”

“제가요? 제가 여기서 일한다고요?”

“네. 앞으로 FICC 본부 산하 TF팀에서 함께 일하시면 됩니다.”

“제가 여기서 할 게 뭐가 있다고…….”

박도하는 주변을 다시 살폈다.

그가 상상하던 모습의 사무실은 아니었다.

수많은 모니터 앞에서 바쁘게 숫자를 입력하고 전화를 수시로 주고받는 트레이더들의 세계와 이곳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자기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는 프로그래머로서 회사의 HTS 개발을 주로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자기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박도하는 감도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박도하에게 다가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박 대리님은 박 대리님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제가 잘하는 거라면…….”

“프로그램 만드는 것 말입니다. 저희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박 대리님이 만들어 주면 됩니다.”

“프로그램을…… 여기서 만든다고요?”

“네. 다른 기능 없이 빠르고 직관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끼리만 쓸 것이니 다른 쓸데없는 것은 뺀 본연의 물건. 저희는 그게 필요합니다.”

한진영은 영문을 몰라 하는 박도하에게 앞으로 할 일을 설명했다.

박도하는 한진영의 설명을 들으며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다른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HTS에 더덕더덕 여러 가지 기능을 붙이는 일이 전부였다.

물론 이런 일이 하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능을 붙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느라 HTS 본연의 맛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프로그램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으며 쓸데없는 기능들 속에서 트레이딩을 위한 능력은 점점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박도하는 이런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트레이딩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면 트레이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빠른 속도와 직관적인 구성이 맞지 않냐고 생각했던 박도하였다.

그러나 일개 팀원으로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박도하는 자기 의견을 낼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나중에는 트레이딩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진영이 지금 박도하가 만들고 싶어 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도하는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한진영은 기뻐하는 얼굴의 박도하를 보며 지난 시절 박도하가 만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퀀트매매에 최적화되어 있는 프로그램.

어떤 프로그램보다 빠르게 주문을 넣을 수 있는 것이 박도하가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초단타 매매에서는 발군이라는 평가조차 모자랄 만큼 박도하의 프로그램은 다른 것을 압도했다.

게다가 여러 주문을 처리하는 것 또한 탁월했다.

동시에 수십여 개의 종목에 주문을 넣을 수 있었으며, 십여 개 정도의 종목 정도라면 초당 500번의 주문까지도 커버할 수 있는 것이 박도하의 프로그램이었다.

박도하는 신성증권의 IT부서를 나온 이후 스스로 창업하여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여러 증권사에 팔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증권사 맞춤 프로그램도 제작해주며 명성을 높였다.

한진영은 이런 박도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시절 자산운용사를 이끌며 박도하의 프로그램을 직접 써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쉬운 점이 있어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바쁜 사람이라 한진영의 입맛이 맞게 고치기 위해서는 대기표를 뽑고 순번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내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지.’

한진영은 품에 들어온 박도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누구나 쓸 수 있는 퀀트 프로그램이 아니라 TF팀에 최적화되어 있는 퀀트 프로그램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됐다.

박도하는 자기가 원하던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즐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했다.

“그런데…… 저는 Back office에서 움직이던 사람인데…… 그럼 임시로 파견 나와서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Front office에 해당하는 FICC와 Back office는 대우부터 임금까지 모든 것이 차이가 있었다.

높은 임금과 좋은 대우는 모두 Front office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Back office 계열 직원들의 경우에는 타회사의 일반 직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박도하가 이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기의 위치에 자괴감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게는 수 배에 달하는 임금 차이를 겪게 된다면 주눅이 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박도하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박도하의 어깨를 둘러 품에 끌어당겼다.

“박도하 씨는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와 같은 팀입니다. 월급부터 성과급 그리고 모든 것이 동일하게 TF팀과 맞추어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그래도 됩니다.”

지난 시절 프로그램 하나를 사는데 10억이 넘는 돈이 들었으며, 유지보수 개념으로 매달 수천만 원의 돈을 써야 했다.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 박도하가 Front office의 다른 직원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한진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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