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남의 자식일 때가 실적에 더 도움이 된다
박도하 대리가 TF팀에 합류하고 난 뒤 몇몇 사람들이 IT 부서에서 TF팀으로 전출되어 왔다.
혼자 모든 것을 만들 수 없기에 박도하 대리를 중심으로 손발이 맞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도록 한 것이었다.
박도하는 모든 것을 일임하여 맡겨주는 한진영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일반적인 IT 회사에서도 이렇게 전권을 주는 일이 흔하지 않은데, 한진영만큼은 박도하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이 이렇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회사를 꾸렸을 때 그 빛을 제대로 발휘했었지.’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일 때가 아니라 박도하가 자기 회사를 차렸을 때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TF팀 내에서 스타트업을 차린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었다.
그렇게 해준다면 지난 시절 보여줬던 놀라울 만한 프로그램을 내놓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진영이 어떤 생각으로 결정했든지 박도하에게는 한진영의 결정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제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다 들어주셔서요.”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증권사에 이런 팀을 꾸릴 수 있다는 게…… 이런 게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한 것을 이루는 것이 제 일이니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시고 좋은 프로그램만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도하는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자기를 비롯하여 IT 부서에서 넘어온 직원들을 살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다섯의 인원이라면 충분히 원하는 것의 시제품을 만드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시제품이 제대로 나온다면 인력과 장비의 충원을 약속한 한진영이었기에 박도하는 부푼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여기가 증권사인지 IT 회사인지 모르겠다.”
한진영과 박도하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김정대가 끼어들었다.
“어? 오셨어요?”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박도하가 김정대를 향해 크게 인사했다.
김정대는 박도하의 인사를 고개를 끄덕이며 받고는 박도하와 IT 직원들이 앉을 자리를 살폈다.
“IT 부서에서 직원들 몇 명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너무 본격적으로 IT팀을 꾸리려는 거 아니야?”
한진영은 김정대의 곁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제가 하려는 일에 꼭 필요한 친구들이라서요.”
“뭐…… 자네에게 팀원과 하는 일 등을 일임한 상태라 내가 뭐라고 할 건 없지만…… 그래도 우리 본연의 업무는 잊지 말자고.”
“본연의 업무를 하기 위해 꾸린 팀입니다. 두고 보시면 제 말뜻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래. 뭐 자네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난 자네를 믿어.”
FICC 본부에 IT 직원들이 자리를 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이상하기만 했던 김정대였다.
그러나 한진영이 믿어달라는 말에 더는 꼬투리를 잡지 않은 김정대였다.
그는 한진영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가야지.”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한진영은 시계를 보고 김정대가 말한 가자는 의미를 깨달았다.
그저 단순히 TF팀에 IT 직원들이 자리를 꾸려 김정대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한진영이었다.
“오늘 회의는 중요해. 자네가 얼마나 임원들을 잘 설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자네의 행보에 차이가 크게 생길 거야. 편하게 가려면 오늘 잘 설득해야 해. 특히 장 본부장을…… 뭐 가보자. 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김정대도 막막하게 느껴진 것인지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임원 회의가 펼쳐질 회의실로 향했고 한진영이 그 뒤를 따랐다.
남원석 사장과 김정대와의 만남에서 계획을 이야기했던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남 사장과 김 본부장의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만의 동의만으로는 부족했다.
특히 한진영이 하려는 일 자체가 생소한 분야이며 회사 내 다른 본부와의 마찰이 빚어질 수도 있는 영역이었기에 다른 이들의 동의도 필요했다.
남 사장은 그걸 임원 회의에서 한진영이 풀어주기를 바랐다.
한진영도 남 사장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금융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바지사장이나 마찬가지인 남 사장이었다.
그가 신성증권에 내려온 이유는 신성증권에 대한 모 회사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게다가 사장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회사 내에 지배력이 아직 부족한 상황에서 한진영의 뜻을 사장의 권한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아직 남 사장의 위치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한진영이 직접 자기의 뜻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원했고, 한진영은 그런 남 사장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정대를 따라 임원 회의가 펼쳐질 회의실에 도착한 한진영은 먼저 와 있던 임원들에게 인사했다.
장근수 본부장과 같이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진영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이름만 들었던 유명한 한진영을 찬찬히 살폈다.
“어서 와.”
장근수 본부장이 한진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진영은 장근수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자네의 첫 데뷔네. 어때? 긴장되나?”
“긴장이라고 할 게 뭐 있나요?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오늘 온 것뿐이지 앞으로 이곳에 제가 올 일이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자리에 앉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장근수가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자기 옆자리의 의자를 두드렸다.
김정대는 장근수가 올린 손을 치우고 옆자리에 앉았다.
“쓸데없이 시간 뺏지 말고…… 자네는 가서 준비하게. 이따 다들 오면 바로 시작할 테니까.”
“긴장 좀 풀어주려고 그런 거지. 왜 그렇게 날카로워?”
김정대는 장근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코웃음을 쳤다.
“조금 뒤에 누가 날카로워질지 두고 보자고.”
“뭐야? 내가 날카로워지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아니야. 나는 한 팀장에게 날카로워질 이유가 없는 사람이야.”
장근수는 양팔을 좌우로 쫙 펼쳐 보였다.
“한 팀장이 미리 언질을 줘서 얼마나 잘 먹었는지 몰라. 한 팀장.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 여기 많은 임원 중에 김 본부장하고 나하고 두 표는 받고 들어가는 거니까 자신 있게 해. 자신 있게.”
“감사합니다.”
한진영이 장근수를 향해 인사하자 장근수는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한진영을 향해 날렸다.
김정대는 그런 장근수를 향해 코웃음을 치고는 한진영에게 어서 준비할 것을 말했다.
한진영은 준비해온 USB를 통해 발표할 것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약 5분여간의 시간이 흐르자 임원들 자리가 모두 가득 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원석이 들어오자 임원 회의가 시작됐다.
본격적으로 임원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한진영의 소개가 자리에 있는 임원들을 위해 이루어졌다.
임원들은 익히 들어봤던 이름의 주인공인 한진영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소개가 끝난 뒤 한진영은 임원회의에 자리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까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근수의 얼굴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쟤 뭐라고 하는 거냐?”
장근수가 놀란 얼굴로 곁에 앉아있는 김정대를 향해 물었다.
김정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 내가 두고 보자고 했잖아.”
“쟤 지금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는 이야기냐?”
“꿈도 야무지다. 네 쪽으로 왜 넘어가? 내 새끼인데.”
“그럼 왜 네 새끼는 저러고 있는 건데? 지난번처럼 일부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이거 뭐냐고?”
장근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참 설명을 하던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장근수를 바라봤다.
다른 임원들도 장근수를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두 이해하는 눈으로 장근수를 쳐다봤다.
장근수가 화를 내는 것이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장근수는 한진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퀀트매매. 나도 알아. 70년대부터 시작해서 점차 많은 미국의 투자은행 및 자산운용사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계량화된 수치로 모든 금융상품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야. 유동성에만 투자한다. 유명한 말이지. 지금은 차익거래를 이용해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말도 들었어. 그런데 그걸 자네가 하겠다고?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본부가 자리하고 있는 주식시장에서?”
“네. 맞습니다.”
“좋아. 하겠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하려면 내 밑으로 들어와야지. 왜 FICC 본부에서 하는 건데?”
장근수가 한진영에게 소리를 치고 남원석 사장을 돌아보고 말했다.
“사장님. 제 밑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럼 저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밀어주겠습니다. 초단타매매. 뭐 설명을 들으니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드니까요. 하지만 남의 집 식구가 내 앞마당에서 노는 꼴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장 본부장. 설명을 마저 들어봐.”
옆에 앉아 있는 김정대가 장근수를 말렸다.
그러나 장근수는 김정대의 말에도 화를 풀지 못했다.
“잘 들어보라니? 들을 게 뭐가 더 있어?”
“주식시장에서 테스트하지만 결국 목표는 모든 금융상품이야. 그렇다면 꼭 자네 본부에 들어갈 이유가 없지.”
“그러니까 우리 쪽에 와서 테스트하라고. 왜 네 쪽에 앉아있으면서 내 쪽을 테스트하는데? 네 쪽에 앉아서 할 거면 네 쪽에서 테스트해. 그리고 정식으로 운용될 때 그때 우리 쪽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 보자고. 그게 맞는 순서잖아.”
장근수는 김정대를 향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난 인정 못 해. 아니.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인정하지 못할 거야. 다른 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 아닙니까?”
장근수가 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물었다.
자리에 있는 다른 임원들도 장근수의 말에 서로 돌아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근수의 말대로 인정하기에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런 장근수의 태도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곤란해하는 표정의 김정대의 얼굴을 보고도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리고 장근수가 떠드는 것을 한참 동안 선 채로 가만히 바라봤다.
어차피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기운이 빠질 것이고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씩씩대던 장근수가 기운이 어느 정도 빠진 모습을 보자 한진영이 입을 열었다.
“장 본부장님께서 화가 나시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사 차원에서…….”
“회사 차원에서야 당연히 어디에서 하든지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난…….”
“본부장님.”
다시 한번 씩씩거리던 장근수를 한진영이 차분히 불러 세웠다.
장근수는 당장에 화를 내려던 모습을 멈추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를 향해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선 제 이야기부터 들어보시지요. 분명 장 본부장님도 만족할만한 이야기일 테니 말입니다.”
“나도 만족할만한 이야기? 그게 뭔데?”
한진영은 자리에 서서 퀀트매매의 개요가 담겨있는 스크린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이걸 어떤 특정한 상품에만 사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 금융상품에 써먹을 생각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 때 완성해서 쓰려 합니다. 그리고 테스트는 주식시장에서…… 이게 기본적인 제 계획입니다.”
한진영은 장근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 소속이 FICC 본부 소속이라 장 본부장님이 불편해하는 것 이해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합니다.”
“제안?”
“네. 저희 쪽에서 발생하는 테스트로 인한 수수료는 모두 장 본부장님의 실적으로 통합시킬 생각입니다. 즉, 장 본부장님의 고객이 되어 테스트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장근수는 한진영의 말에 깜짝 놀란 눈을 보였다.
놀란 것은 장근수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오직 남 사장만이 한진영이 말하는 것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었다.
남원석 사장이 한진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두리번거리자 곁에 앉아 있던 경영지원본부의 노 전무가 남원석에게 설명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수수료 없이 진행합니다. 내부에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수수료가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한 팀장은 수수료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을 표했습니다. 게다가 그 수수료를 장근수 본부장의 WM본부의 실적으로 올리겠다고 이야기했고요. 이렇게 된다면 수수료율도 WM본부에서 진행하는 수수료율로 하겠다는 건데…… 굳이 왜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진행하려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남원석은 노 전무의 설명을 듣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소란이 일어나는 회의실 풍경을 보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와서 진행하게 된다면 수수료가 발생할 테니 처음부터 수수료를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편이 낫지.’
한진영이 계획하고 있는 이 사업의 최종 테크는 신성증권에 위치해 있지 않았다.
그저 신성증권은 편하게 테스트를 하기 위한 자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진영의 생각대로 밖으로 튀어나와 사업을 진행한다면 어느 곳이건 증권사를 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수수료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테스트할 때 수수료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테스트하려 하는 것이었다.
테스트할 때 수수료 부분을 넣지 않았던 것이 나중에 발목을 잡는 일을 차단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생색이라는 양념을 조금 더 쳐서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아시겠지만 1초에 짧게는 수 번, 많게는 수십 혹은 수백 번의 거래가 이루어질 겁니다. 수수료도 그만큼 엄청나게 많이 나올 테지요. 이렇다면 본부장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희 팀을 품었을 때는 얻지 못할 실적이니 차라리 남의 자식으로 놔두고 실적을 올리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화를 내던 장근수의 얼굴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오히려 웃음기가 얼굴 가득 번지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자는 말이 장근수의 입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