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끌다
임재홍은 남원석의 반응에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괜찮다는 뜻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임재홍은 그런 한진영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남원석이 안정을 찾은 뒤 임재홍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올리라고 한 겁니까?”
한진영을 바라보던 임재홍은 남원석의 질문에 급히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제가 산출한 가격에서…… 30%를 더 올리기를 바랐습니다.”
“미친놈.”
남원석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증권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남원석이 느끼기에도 30%는 너무 큰 차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30%는 큰 금액이었다.
조 단위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30%는 수천억의 돈이 왔다갔다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100억은 물론이고 10억 단위까지도 깎기 위해 혈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천억을 올려붙이려 한다는 것은 홍지란이 두선그룹과 끈이 이어져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원석은 다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다스리고 임재홍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왜 홍 센터장은 가격을 산출한 임 팀장에게 그러지 않고…….”
남원석은 왜 폭력을 휘두르는 대상이 임 팀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느냐는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이내 임재홍의 산적 같은 외모에서 그 답을 찾고는 하려던 질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린 남원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한번 웃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으니 바로 잡아야지요.”
한진영의 말에 남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바로 잡아야지요. 보고서 저에게 바로 올리세요.”
“사장님께요?”
“네. 이미 작성된 것 아닙니까? 지금 당장 센터장은 공석이니 제가 처리하는 게 맞겠네요. 저에게 주시면 제가 바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임재홍은 놀란 눈으로 남원석을 바라봤다.
자기가 듣던 남원석에 대한 소문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그러면 앞으로는 누구에게…….”
지금 보고서야 사장에게 올리면 된다지만, 앞으로 계속 진행될 사업에서는 누구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임재홍이었다.
남원석도 임재홍의 지금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계속 자기가 챙긴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진영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참에 임 팀장을 센터장으로 올리시지요.”
“저를…… 센터장이요?”
임재홍이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바라보고 말했다.
“뭐 우선은 임시로 하시고…… 실적이 쌓이고 능력이 있음을 보인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특히 이번 건을 잘 마무리한다면 내부에서도 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하기에는…….”
한진영은 당황한 모습의 임재홍 너머에 앉아있는 남원석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외부인사를 데리고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홍지란이 외부에서 와서 큰 사고를 쳤는데 또 외부에서 사람을 데리고 온다면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한 팀장 말이 맞아요. 지금 또 외부 사람을 데리고 오기는 어려운 상황이지요.”
“지금 흐트러진 센터를 단속하기 위해서라도 내부에서 승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일을 수습하기 좋으니까요. 아무래도 모든 사건을 다 알고 있을 테니 더는 일을 키우지 않는 적당한 선도 잘 알고 있을 테고요.”
한진영은 말을 하고는 슬쩍 임재홍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밀어줬는데 더는 못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임재홍도 그런 한진영의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봤다.
임재홍은 놀란 눈을 한 채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원석은 한진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좋아요. 우선 임시로 센터장직을 맡아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인수합병 건을 마무리 짓도록 하세요. 이런 상황에서 센터장직을 계속 공석으로 둘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짓는다면 정식 센터장에 임 팀장님을 공식적으로 제안해볼 만할 겁니다. 그러니 우선 이번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움직여주세요.”
“제가…… 정말 괜찮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임 팀장님이 가장 적격입니다.”
남원석의 승낙까지 떨어지자 임재홍은 더는 사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최선을 다할 것을 남원석 앞에서 약속했다.
***
사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임재홍은 한진영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시만요.”
한진영은 마치 이런 임재홍의 모습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어서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임재홍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잠시 주춤거렸다.
그리고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고는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저에게 할 질문은 그게 아니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진영이 임재홍의 등을 밀어 계속 걷게 했다.
그리고 임재홍의 곁에서 함께 걸어가며 말했다.
“지금 저에게 할 질문은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가 맞습니다.”
임재홍은 놀란 눈으로 곁에 걷고 있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향해 웃는 얼굴로 계속 이야기했다.
“여기서 잘해야 정식으로 센터장 자리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세요. 기회가 왔는데 놓쳐서야 하겠습니까?”
“기회…… 입니까?”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다면 그건 기회이지요.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한진영은 임재홍을 끌고 엘리베이터 앞에 가 섰다.
임재홍은 한진영에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한진영의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자기를 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점차 사장실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고 말했다.
“우선 두선화학 건부터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맞겠죠? 어쨌든 우리는 LZ그룹 자문으로써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죠. 홍지란이 요구한 가격도 문제였지만, 지금 산출된 가격도 문제니까요.”
“가격을 다시 책정하란…… 말입니까?”
“네.”
잠시 말을 멈춘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자기보다 더 큰 키의 임재홍을 올려다봤다.
임재홍은 혼란이 더해지고 더해져 이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한진영의 시선에 멍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우선 두선화학의 수처리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수처리 사업이요?”
“수처리 관련 사업을 육성하여 단기간 내에 세계 점유율 1위가 가능할 거라고 말하는데…… 그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부분이 시장성이 생각과 달리 빠르게 따라오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중국 쪽에서만 수처리 사업에 4000억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70조가 넘는 돈을 쏟아붓는다고 하는데…… 이 사업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로 미뤄진다고요?”
임재홍은 한진영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화학섹터를 맡아 지난 5년간 화학 쪽에 관련된 분석을 진행했던 자기를 앞에 놓고 저렇게 확정적인 대화한다는 것부터 임재홍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걸 모르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에 임재홍은 마냥 한진영이 잘못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임재홍이었다.
한진영은 임재홍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미뤄집니다. 그러니 알아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다면…… 두선화학의 가치는 지금 보고서에 쓰여있는 숫자보다 많이 낮아질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가격도 터무니없이 높습니다.”
“물론 수처리 사업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가격을 낮춰야 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사장님께서 그러셨는데…….”
“사장님께 드리는 것은 그대로 올리세요. 대신 보고서를 건네시며 한 말씀만 더하시면 됩니다.”
“뭐라고…….”
한진영은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임재홍을 바라보고 웃었다.
“홍 센터장 때문에 정확한 가치를 계산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더 정확하게 가치를 매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이 정도 말만 드려도 시간을 주실 겁니다.”
“보고서를 받는 것을 미뤄주신다고요?”
“아니요. 2차 보고서를 받을 시간을 준다는 겁니다. 온전히 임 센터장님의 의견이 반영된 보고서. 그걸 받아보시겠다고 할 겁니다. 그편이 임 센터장님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그래야 모든 성과가 임 센터장님의 것이 될 테니까요.”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임재홍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임재홍은 한진영의 손길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도 한진영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한진영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엘리베이터에 탄 이후 리서치센터가 있는 층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그 보고서를 받게 된다면 임 센터장님에 관한 판단도 달라질 겁니다.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고요. 임시 센터장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진영은 임재홍의 질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질문을 하셨네요. 맞습니다. 제가 임 센터장님을 도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내리시지요.”
리서치센터에 도착한 한진영은 사고가 터진 이후의 리서치센터를 둘러봤다.
커다란 사고가 터졌었던 만큼 리서치센터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원석과 함께 왔을 때 느껴지던 어두운 분위기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한진영은 리서치센터입구에 서서 리서치센터를 한참 둘러봤다.
“혼자 사용하기에는 넓지요?”
“네?”
“여기 공간 말입니다. 센터급이기에 한 층을 온전히 내어주기는 했지만 리서치센터 직원 숫자에 비하면 공간이 너무 넓지 않습니까?”
한진영의 갑작스러운 말에 임재홍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천천히 리서치센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리서치센터 직원이 지금 서른 명 정도지요?”
“네. 서른두 명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여기의 반만 써도 되지 않겠습니까?”
한진영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임재홍은 한진영의 손이 가리킨 곳을 보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공간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넓은 곳을 차지하고 있어 업무적으로 비효율적인 부분이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걸 이야기하시는지…….”
“저희가 이쪽에 이사 오겠습니다.”
“네?”
한진영은 오른쪽을 가리키고 말했다.
임재홍은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사 오신다니요? 여기로 TF팀이 이사 온다는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저희가 있는 곳은 조금 좁았거든요.”
“지금 FICC 본부 산하에 계시지 않습니까? FICC 본부 소속인데 어떻게 여기로…….”
“이제 FICC 본부 소속의 팀 딱지를 떼어야 할 때가 됐으니까요.”
말을 마친 한진영은 이사 오겠다는 쪽을 천천히 둘러봤다.
자기가 있을 곳과 직원들의 배치 그리고 넓어진 공간 때문에 새롭게 추가할 인원들까지 벌써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임재홍은 부지런히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아시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한진영은 둘러보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제가 하는 일에 리서치센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야 뭐 독불장군식으로 밀어붙였는데 테스트 단계를 넘어 정식으로 운용하게 된다면 리서치센터 측의 분석이 꼭 필요하니까요.”
임재홍은 한진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10여 개 종목으로 돌리고 있다지만 앞으로 그 폭을 더욱 넓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걸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임재홍이 자리한 리서치센터였다.
홍지란도 이런 생각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식으로든 한진영은 도움의 손을 내밀 것이 분명했고, 그 손을 어떻게 잡느냐가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진영에게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임재홍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까 물어보셨지요? 왜 도와주느냐고 말입니다.”
“네. 저와 친분은 물론이고 안면도 없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도와주시니…….”
“친분과 안면이 없다고 해도 귀는 가지고 있지요.”
한진영은 자기 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임 센터장님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임 센터장님이라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려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실 거라 생각했고요.”
“지금 하시는 일을 위해 저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제가 하는 일. 그걸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임 센터장님이 팀장이 아니라 센터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 이렇게 도움을 드리는 겁니다. 그편이 제가 움직이기에도 편하니까요.”
“그럼 여기로 온다는 것도…….”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붙어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홍 센터장이었으면 반대했을 만한 일이겠지만요.”
임재홍은 한진영의 말에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그리고 한진영이 도와주면 정식 센터장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했다.
임재홍의 눈에 점차 욕망의 빛이 담기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은 몸을 돌려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로써 리서치센터와의 협력관계에서 완벽히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체급싸움에서 리서치센터에 밀리는 게 현실이었다.
한쪽은 센터 급이었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팀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었다.
나중에야 팀을 벗어난다고 한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리서치센터가 아랫급으로 내려올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의견 조율과정에서 리서치센터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은 이것이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리서치센터를 한진영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능력 있는 사람이 맡는 것도 좋을 테고…….’
한진영은 리서치센터장이라는 꿈에 한 발 더 다가간 듯이 몽롱한 표정의 임재홍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