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업부로의 승격
장근수는 이제 한진영이 FICC 본부 품을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한진영의 손 아래 있는 저게 무엇인지 보는 일만이 남았다.
장근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이게 뭔지…….”
장근수는 김정대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이 서류의 주인은 김정대였기 때문이다.
김정대가 놔두라는 말이 나오면 더는 손을 댈 수 없기에 장근수는 천천히 손을 뻗으며 김정대가 무슨 말을 할지 살폈던 것이었다.
김정대의 입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장근수의 손이 서류에까지 닿았다.
장근수는 이번에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아무리 서류에 무엇이 쓰여있는지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한진영의 손이 치워져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힘으로 서류를 뺐을 수는 없었다.
한진영은 김정대가 자기의 말에 동의한 것을 확인하고 서류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을 거뒀다.
이제 서류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은 장근수의 손이 유일했다.
“그럼 내가 먼저…….”
장근수는 서류의 주인이 김정대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김정대에게 먼저 보겠다는 뜻을 슬며시 전한 후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서류를 살폈다.
“강우건설 풋백옵션?”
한진영을 바라보던 김정대의 시선이 장근수에게로 옮겨졌다.
왜 갑자기 강우건설 풋백옵션 이야기를 하냐는 눈빛이었다.
작년 말부터 강우건설의 풋백옵션은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게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며, 강우건설 인수에 자금을 대줬던 FI(재무적 투자자)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은호산업이 강우건설을 인수하려고 하며 일어났는데, 상당히 특이한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맞지 않는 인수합병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정도였다.
강우건설은 업계 1위와 2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대형건설사였으며, 은호산업은 기껏해야 10위 자리를 겨우 유지하는 수준의 회사였기 때문이다.
10위가 1위를 집어삼키는 상황.
사람들은 과연 강우건설을 인수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 눈으로 은호산업을 지켜봤었다.
자금에도 문제가 있었다.
인수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강우건설은 해외를 비롯하여 국내서도 탄탄한 입지를 유지한 상태였다.
비록 모회사가 무너지며 은행권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 동안 착실히 워크아웃을 진행하여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래서 인수가격이 낮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예상대로 인수금액은 6조 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책정이 되었다.
은호산업이 이런 자금을 홀로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시장은 예상했다.
가격을 깎을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았으며, 당장에 가격을 깎아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6조라는 돈을 은호산업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고, 은호산업이 그룹사의 모든 자금을 끌어모은다고 하더라도 6조는커녕 3조에 가까운 돈도 모으지 못할 거라는 것이 시장 참여자들 대다수가 은호산업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풋백옵션이었다.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유치한 뒤, 일정 시점까지 주식가격이 원하는 가격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주식을 되사주겠다는 옵션.
강우건설을 28,000원에 인수하며, 2년 뒤에 목표가격인 32,000원의 가격에 주식 가격이 도달하지 못한다면 32,000원에 은호산업이 재무적 투자자의 주식을 모두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은호산업의 계획은 강우건설을 인수할 당시에는 타당해 보였다.
2년 동안 약 15%의 상승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강우건설은 주식시장에서 저평가를 받는 종목 중의 대표종목이었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은행에 회사 주인이 넘어간 이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강우건설이 주인만 만난다면 지금부터 2배 가까이 주가가 오르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 것을 보자면 15%의 상승은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재무적 투자자들은 은호산업에 돈을 빌려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자금이 자그마치 3조 5천억이었다.
은호산업은 이 자금에 모든 계열사의 주머니와 본인 스스로 담보가 되어 자금을 마련한 뒤 강우건설을 인수하는 초유의 사건을 성공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은호산업은 단숨에 건설업계 1위를 차지했다.
해외사업 수주도 2위권과 차이를 보일 정도로 이제 건설업계에서는 거칠 것이 없어만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인수 확정이 난 지 1년 만에 벌어지고 말았다.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며 주가가 32,000원이 아니라 10,000원대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전 세계 금융시장이 신음을 흘리는 와중에 강우건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해외수주도 발목을 잡았다.
해외에서 벌어지는 사업에 자금이 돌지 않으며, 졸지에 부실 자산으로 해외사업들이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탄탄했던 실적이 부실 덩어리가 되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호산업은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은호산업이 수습하기에는 강우건설의 사이즈가 너무 컸다.
10위권의 회사가 1위 회사를 수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브프라임이 마무리되며 주가들이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강우건설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수습이 어려워 주먹구구식으로 땜빵을 했던 것들이 모두 부실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주가는 기존 가격은 물론이고 20,000원대를 회복하는 것도 어려워져 버렸다.
결국, 재무적 투자자들은 주가가 회복할 기대가 보이지 않자 은호산업에 32,000원에 주식을 매수하라는 풋백옵션을 발동하고 말았다.
김정대는 장근수가 들고 있던 서류를 뺏어 들고 살폈다.
서류에는 풋백옵션을 행사한 회사 이름들과 그들이 투자했던 투자금액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비고란에는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빨리 털고 싶어 하는 회사 등이 체크되어 있었다.
김정대는 서류를 내리고 한진영을 바라본 채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옵션을 인수하십시오. 최대한 많이 최대한 싸게…… 가능성이 높은 곳들 위주로 제가 직접 정리해 가지고 온 것이니 그대로 따라 하시면 될 겁니다.”
“그러니까 강우건설의 풋백옵션을 우리가 인수하라는 이야기인가? 이걸? 이 쓰레기가 될 게 명백해 보이는 이걸?”
이미 시장에서는 은호산업이 기브업을 할 거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은호산업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이 자금을 마련할 체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은호그룹을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3조 5천억이라는 자금을 마련하지 못할 게 뻔해 보이는 상황에서 휴지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를 옵션을 인수하라고 하고 있으니, 김정대는 한진영의 말에 믿기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진영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김정대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옵션이 행사될 겁니다.”
“그게 정말이야?”
장근수가 놀란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장근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끄덕였다.
“네. 행사됩니다.”
“은호산업은…… 그럴만한 돈이 없을 텐데? 그렇다고 누가 돈을 빌려줄 것도 아니고…… 이게 어떻게 행사가 돼? 풋백옵션을 발동한 이 회사들도 행사가 될 거라 예상해서 발동한 것은 아닌데.”
“네. 여러 곳이 얽혀있어서 가만히 있다가는 돈을 돌려받을 순위에서 밀려날까 봐 옵션을 발동한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됐고요.”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다시 김정대를 바라보고 말했다.
“지금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하며 제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신다면 믿어보셔도 좋습니다. 행사됩니다. 그러니 옵션들을 거둬들이셔도 됩니다. 은호산업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옵션을 발동한 회사들도 기회만 되면 옵션을 넘기고 싶어 할 겁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싸게 옵션을 구하실 수 있으니 최대한 싼 가격에 구하시면 분명 나중에 FICC 본부에 큰 수익으로 돌아올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김정대는 다시 서류를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내려놨다.
“어차피 이게 없어도 자네를 놓아줄 생각이었어. 이미 자네는 내가 품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으니까. 그런데 이런 선물까지 내어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다는 소리를 해야겠구먼. 고맙네. 가는 순간까지 이런 좋은 것을 알려줘서 말이야.”
한진영이 부탁하는 말을 하러 온 건데 김정대가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장근수는 단번에 바뀐 분위기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알 수 있었다.
자기가 내민 서류와 그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까지 김정대는 계산이 끝났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김정대가 고맙다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내보내며 잃는 것보다 서류 속에 담긴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김정대가 깨달은 것으로 보였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오른손에 꽉 쥐어진 서류를 보며 만족했다.
***
2분기 사업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특별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소문이 신성증권 내에 돌았다.
FICC 본부 산하의 투자전략팀이 사업부로 승격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TF팀이 정식 팀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부까지 승격된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진영의 투자전략팀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한진영이 걸어온 길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회사에 입사해서 한진영이 이룬 업적 자체가 역대급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모든 게 업계 최초였고 모든 게 신성증권의 전설이 되어버린 존재였다.
그런 한진영이 팀장으로 있는 곳이었기에 사업부로의 승격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진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걸 받아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FICC 본부의 김정대 본부장이 이런 이야기를 용납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업부로의 승격을 본부장님께서 정식으로 제안했다고?”
“그렇다니까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도대체 뭔 생각으로 사업부로 승격시켜달라고 한 건지…… 혹시 본부장님께서 회의 전에 드신 밥에 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한 팀장의 투자전략팀이 우리 본부에서 떨어져 나가면 어떡해요?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FICC 본부 원자재팀의 정 팀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FICC 본부 차원에서 보자면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이 요청하고 김정대 본부장이 거절하는 상황이 일반적이지, 지금처럼 한진영은 가만히 있는데 김정대 본부장이 나서서 요청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외환 팀의 양 팀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사업부로 승격되더라도 우리 본부 산하에 있는 건 아닐까?”
“에이. 그건 아니죠. 그럴 거면 뭐 하러 사업부로 승격시키겠어요. 가만히 둬도 되는 건데…….”
“하긴 그렇지.”
양 팀장은 정 팀장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구 팀장은 어디 갔어?”
항상 만나 담배를 피운다면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곤 했다.
같은 본부 소속에 팀장인 한진영보다 비록 팀장으로 자리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비슷한 또래의 구 팀장과 더 친한 그들이었다.
“그러게요. 구 팀장이 안 보이네요.”
고개를 돌리던 정 팀장의 눈에 채권팀의 구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둘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구 팀장. 뭐가 그렇게 신이 났어? 같이 좀 좋아하자. 뭐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 구 팀장을 향해 정 팀장이 말을 걸었다.
구 팀장은 입에 담배를 빼 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본부장님께서 부르셔서요. 갔더니 저에게 할 일을 주시기에…….”
“할 일? 그거?”
정 팀장이 구 팀장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구 팀장은 담배를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거요. 드디어 제가 팀장 자리에 앉은 뒤에 제대로 된 몫을 할 기회가 생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양 팀장의 얼굴에도 궁금증이 차올랐다.
구 팀장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어차피 비밀도 아니고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종이를 건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양 팀장부터 구 팀장이 내민 종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정 팀장이 종이를 다 살폈을 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 담기고 말았다.
“이게 뭐야?”
구 팀장은 그런 두 사람의 표정과는 달리 즐거운 표정을 계속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본부장님께서 종이에 적혀 있는 곳에 연락해서 강우건설의 풋백옵션을 사들이라고 하셨어요. 2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요. 뭐 지금 상황 봐서는 반으로 후려쳐도 넘기겠다는 곳이 있을 것 같다니까 한번 제가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 하시네요.”
“이걸 반값에? 아니. 이걸 왜? 반값도 비싸지. 이건 휴지나 마찬가지인데?”
“가만. 잠깐만 가만있어봐.”
이해가 안 간다는 정 팀장을 잠시 진정시킨 양 팀장은 구 팀장을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이걸 본부장님이 지시한 거 보면 뭔가 알고 계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들은 거 있어?”
구 팀장은 종이가 보물이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종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있죠. 그냥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이 있겠어요?”
“뭔데? 뭘 들었는데?”
정 팀장은 휴짓조각과 마찬가지인 옵션을 인수하라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 팀장이 거둬들이는 게 좋다고 했대요.”
“한 팀장이?”
“네. 그 한 팀장이요. 자신 있게 인수하라고 했다고요. 어때요? 제가 왜 이렇게 즐거워하는지 이해가 가시죠? 이거 뭐 거의 땅 짚고 헤엄치기 수준 아니겠어요?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감격스러운 표정의 구 팀장은 마치 은혜를 받았다는 듯이 감격스러워했다.
그런 구 팀장을 바라보는 양 팀장과 정 팀장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한진영이라는 이름은 성공을 뜻하는 단어와 같기 때문이다.
휴짓조각을 인수하라는 의미의 종이가 한진영이라는 이름이 더해지자 보물 지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