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할 큰 건
9층에서 FICC 본부로 돌아온 한진영은 최준호 지점장을 김정대 본부장과 장근수 본부장에게 소개했다.
이미 최준호에 대해 알고 있던 두 사람은 최준호를 한진영이 사업부의 부문장으로 추천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뭐? 최 지점장을?”
특히 장근수의 놀람은 김정대보다 더 컸다.
“진심이야?”
“네. 진심입니다.”
“이야~ 계 탔네. 최 지점장 계 탔어.”
최준호는 장근수의 말에 얼굴을 붉힐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도 계 탔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사장님께는? 사장님께 뭐라고 이야기할 생각인가?”
김정대가 한진영을 보고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남원석 사장을 어떻게 설득하겠냐는 말이었다.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 안 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두말없이 허락해 주실 테니까요.”
“그래?”
김정대는 한진영의 자신 있는 말에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준호가 부문장으로 오는 것은 정말로 의외의 모습이었다.
영업 쪽에서만 구르던 사람이 투자전략과 어떤 연관성이 있어서 자리에 앉히겠다는 건지 김정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대놓고 바지 부문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앉힌 것일 수도 있겠어.’
사람이란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게 큰 다툼의 이유가 되고는 했다.
김정대는 그래서 아예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사람으로 최준호를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사가 아닌 외부에서 수십 년을 활동하며 영업에 관련된 일을 한 최준호였다.
최준호가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도 사업부 부문장이라는 권력이 가진 힘의 속성을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는 방향과 힘의 정도가 다른 사람보다 약할 것이 분명했다.
김정대는 다툼이 일어날 상황을 원천차단하는 선택으로 한진영이 최준호를 선택했다고 결론 내렸다.
***
최준호의 사업부 부문장 취임은 순풍에 돛 단 듯이 진행됐다.
한진영이 최준호를 남원석에게 추천하자 남원석이 한진영의 말대로 두말하지도 않고 바로 승인을 해줬기 때문이다.
영업으로 오랫동안 지내 온 최준호가 투자전략사업부 부문장으로 어울리겠냐는 말은 애초에 물을 생각도 없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사업부의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 부부문장에 앉을 한진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남원석이었다.
최준호가 잘할지 못할지는 한진영이 일을 하는데 얼마나 서포트를 해주느냐로 갈릴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의 인사 추천이라는 것을 안 남원석은 그 선택을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임원급에서는 최준호의 이력을 들어 반대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야기가 나오는 수준이었지 적극적인 반대의 의미는 없었다.
왜냐하면 남원석 사장과 김정대 본부장, 그리고 장근수 본부장까지 한진영과 최준호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찬성을 하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있었던 반대의 소리까지 잠잠해지자 취임식은 바로 진행됐다.
이미 사업부로의 승격이 결정 난 마당에 해를 넘길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빨리 사업부로 승격시키고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회사를 위해서도 좋다는 남원석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취임식과 함께 이루어진 투자전략사업부의 승격식은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원석이 직접 사업부에 대한 기대를 드러냄으로써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사업부라는 것을 공표하기도 했다.
투자전략사업부는 시작부터 날개를 단 상태에서 첫 날갯짓을 하게 된 것이었다.
취임식 이후 사람들은 신임 투자전략사업부 부문장인 최준호에게 높은 관심을 보냈다.
그의 이력을 비롯하여 한진영과의 관계 등이 사람들이 관심 가지기 딱 좋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항상 신임 부문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정도로 최준호는 신성증권에 있어 뜨거운 감자였다.
최준호는 이런 회사 내의 분위기를 즐겼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이 좋았고, 그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기뻐했다.
회사 생활을 20여 년 넘게 하면서 이런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로 관심을 받는 것에 은근히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그래서 최준호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기가 맴돌았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이성우가 최준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최준호는 얼른 웃는 것을 멈추고 이성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뭐 하는 거야? 일 안 해?”
“아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봐라. 너 인마. 네가 제일 한가하잖아. 여기 있는 다른 직원들 좀 보라고.”
최준호가 손가락을 들어 새롭게 이사한 9층에 자리한 사업부 직원들을 가리켰다.
최준호의 말대로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바삐 무언가를 하는 중이었다.
이성우는 그런 그들은 한차례 쓸어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저거 일하는 거 아니에요. 게을러서 아직 저러는 거죠.”
“게을러서?”
“네. 지금 자리 정리하는 거잖아요. 저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고 늘어져 있다가 인제 이사를 마치고 정리하려니 저렇게 바쁜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속지 마세요.”
“그럼 너는? 너는 다 정리했어?”
“그럼요. 저는 정리 다 했어요.”
큰소리치는 이성우의 목덜미를 붙잡고 최준호가 이성우의 자리에 갔다.
정말로 다 정리했는지 확인하겠다는 모습이었다.
이성우 자리에 도착한 최준호는 자리를 한차례 살펴보고는 이성우를 향해 소리쳤다.
“뭐가 있어야 정리를 하지.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 정리하고 말 게 없지.”
“아 그것도 능력이에요.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있고 필요 없는 건 버리는 거요. 쓸모없는 것까지 다 끌고 가지고 있다 보면 책상이 쓰레기장이 된다니까요. 쟤 봐요. 쟤 책상에 비하면 제 책상이 훨씬 낫죠.”
이성우는 손가락으로 김준하 자리를 가리켰다.
이성우의 말대로 김준하의 책상 위에는 종이가 가득 놓여있었다.
이사를 하며 정리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 정도의 종이가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사하기 전의 상황이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최준호는 이성우의 손가락질에 김준하 자리를 살펴본 뒤 이성우의 잡은 목덜미를 눌렀다.
“얌마. 김 대리는 하는 일이 많으니까 그렇지. 너처럼 한가한 줄 알아?”
이성우는 최준호의 손길에 괜한 엄살을 부렸다.
그리고 최준호의 손길에서 슬며시 벗어난 뒤 목덜미를 만지며 김준하를 바라봤다.
“참 쟤도 운이 좋은 거 같아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대리로 승진하다니…… 하여튼 진영이 옆에 있으면 떨어지는 떡고물도 급이 다르다니까요.”
“걱정하지 마. 너도 조만간 떨어지는 떡고물 받아먹게 될 테니까.”
최준호와 이성우의 대화에 한진영이 끼어들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안 그래도 너에게서 떨어질 떡고물 받아먹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어깨를 한번 툭 하고 치고는 최준호에게 말했다.
“아직 공사하고 남은 먼지가 다 빠지지 않아서 그런지 목이 칼칼하네요. 부문장님. 차 한 잔 주시겠어요?”
한진영은 말을 하고 손가락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부문장실을 가리켰다.
최준호는 한진영의 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뒤 한진영의 뜻을 알아챘다.
“그럴까?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성우는…….”
“아니요. 성우도 같이 가죠. 성우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조용히 둘이서만 이야기할 줄 알았던 최준호는 한진영이 이성우까지 함께하자는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이야기이길래 이성우가 함께 들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부문장실에 들어가자 한진영은 차분히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문장님. 이제 취임식도 끝이 났고 이사도 마무리됐으니 슬슬 새로운 일을 시작해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새로운 일?”
잠시 최준호는 한진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깜짝 놀랐다.
“네. 프로그램은 개선되어 가는 과정에 있으니 놔둬도 알아서 잘 굴러갈 테고…… 눈앞에 커다란 먹이가 있는데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커다란 먹이?”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거라면…… 혹시 지난번에 여기 처음 왔던 날 말했던 그 일 말이야?”
“기억하고 계시네요. 맞아요. 그 인수합병이요. 그걸 해보려 해요. 성공시켰을 때의 보수와 실적이 꽤 큰 건이니까요.”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임 센터장 얼굴 보니까 큰 건인 거는 맞는 것 같더라. 하루하루 얼굴이 말라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어. 그리고 만날 때마다 나한테 너에게서 뭐 들은 게 없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뭐 들은 게 있어야지. 그때마다 없다고 하니까 죽을상을 짓더라.”
한진영은 최준호의 말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임재홍은 지난 만남 이후 한진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두선화학 일을 해결해주기를 바랐는데 한진영은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취임식과 사업부로의 승격 그리고 이사 같은 중요한 일이 계속 이어져 그럴 수도 있다지만, LZ그룹과의 미팅 때마다 이어진 질문 세례에 임재홍은 하루하루 말라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임재홍은 한진영을 대신하여 최준호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아직 들은 게 없다’였다.
임재홍은 매일 아침 베개에 빠진 머리카락 숫자만큼 늙어만 갔다.
한진영은 최준호를 향해 은밀한 말투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계속? 진영아. 요즘 임 센터장 얼굴 보지 못했지? 얼굴이 말도 아니야. 너는 바쁘다고 계속 만나는 걸 피하고 그 두선인가 두산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죽어라 죽어라 하는데 그걸 계속하라고? 야. 그러다 송장 치우게 생겼다.”
“협력을 위해 리서치센터 곁으로 왔다지만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는지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러는 거니까 부문장님은 그냥 하던 대로 해주시면 돼요.”
한진영은 잠시 사무실 밖 풍경을 바라봤다.
분주하게 정리를 하는 사업부 직원들을 살핀 것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감상에 젖었던 한진영은 이성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너는 어떻게 됐어?”
“나? 내가 뭐?”
지금까지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이성우는 자기를 향해 한진영이 질문을 던지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왜 이야기가 없어?”
“이야기?”
“그래. LZ그룹의 조용재 상무 말이야. 왜 약속을 잡았다는 말이 없어?”
이성우는 한진영의 입에서 조용재 상무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 형님 바쁘더라. 아~ 연락하기 너무 힘들어. 이제는 완전히 우리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아. 아~ 옛날에는 그 형님하고 정말 친했는데……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더니 얼굴 보기가 영 어렵더라고. 지금은 더더욱 보기가 어렵고…….”
이성우는 손으로 조용재가 사는 곳과 자기가 사는 곳이 다르다는 뜻을 표현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정말로 그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조용재는 LZ그룹의 장남으로 차기 오너가 확실시되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는 중으로, 본사에서 상무이사 직함을 달은 채 내년에는 부사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몇 년 내에 승계가 확실시되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재벌 3세들의 특징상 지분 문제에서는 곤란함을 겪는 중이었다.
그런 조용재와 이성우는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사람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러 다녔으며 함께 유흥을 즐겼던 사이였다.
비록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기는 했지만,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하는 이성우 성격에 조용재는 무리 속에 이성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돈독한 우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성우에게 조용재와의 자리를 마련할 것을 주문한 것이었다.
이성우라면 조용재와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리 마련하기가 어려워?”
한참 손으로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질문에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내가 또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사람 아니냐?”
이성우는 한진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기다려. 연락 올 거야. 이번에 잠깐 출장 다녀오느라 시간 내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녀오면 연락하라고 했어. 형님이 먼저 술 한잔하자고 했으니까 우리는 연락만 기다리면 돼.”
“LZ그룹 조용재 상무하고? 그 사람하고 왜 술을 마시려는데?”
최준호가 놀란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에게 잘했다는 뜻으로 등을 두드리고 대답했다.
“인수합병에서 결국 키를 쥐고 있는 건 오너의 결심이니까요. 조용재 상무를 만나 인수합병의 물꼬를 띄워야지요. 그리고…… 자문역으로 신성증권 내부에서 우리를 직접 지목하게 만들고요.”
“우리를? 지목?”
“그래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공이 될 테니까요.”
“우리가 주인공?”
최준호는 한진영이 전에 말했던 이번 건을 접수하겠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