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움직일 명분을 충분히 쌓았다
하루하루 말라가던 임재홍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움직였다.
한진영의 말을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이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먼저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임재홍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진영은 조심스럽게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먼저 와 있던 임재홍이 퀭한 눈을 한 채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와요. 한 부부문장.”
언제나처럼 남원석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한진영을 반갑게 맞았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을 향해 인사하고 먼저 와 있던 임재홍에게도 가볍게 인사했다.
“저를 부르셨다고요?”
한진영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운을 띄웠다.
퀭한 눈의 임재홍이 그런 한진영의 말에 남원석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저희 리서치센터 때문에 사장님께서 부르신 겁니다.”
“리서치센터 때문에요?”
이번에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하던 한진영은 임재홍의 맞은편에 앉으며 남원석을 향해 물었다.
“리서치센터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문제…… 생겼지요.”
“리서치센터에 문제가 생길만한 것이라면…… 설마 그 두선화학 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아~”
한진영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임재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임재홍은 여전히 한진형을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이리저리 바쁜 상태라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 부부문장님이 허튼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쁜 일을 처리하고 저희 문제를 도와주시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어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지 못하게 됐다니요?”
임재홍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남원석이 임재홍을 대신하여 한진영에게 말했다.
“시간이 촉박하게 됐습니다. LZ그룹에서 자문역 사임에 관해 논의하자고 합니다.”
“자문역 사임이요? 이제 와서 말입니까? 지금까지 들인 공은 어떻게 하고 말입니까?”
“그러니까요. 그래서 임 센터장도 답답해서 저를 찾아온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임 센터장도 한 부부문장이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거 참.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게 됐어요.”
남원석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표정을 구겼다.
“그 전임 센터장이었던 홍 센터장. 그 몹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렇게 큰 사고를 쳤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미리 찾아내서 다행이기는 한데…… 그러다 보니 일이 잘 정리가 안 되고 있습니다. 한 부부문장.”
“네.”
“한 부부문장이 도와준다고 했다고요?”
남원석이 은근한 눈초리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한진영은 남원석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혹 방도가 있어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남원석의 질문에 임재홍이 눈을 반짝였다.
질문을 한 사람은 남원석이었지만, 아무래도 임재홍이 남원석에게 부탁하여 나온 질문이라는 게 한눈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한진영이 잠시 뜸을 들이자 남원석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두선화학의 부실 건을 LZ그룹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수합병 초기만 해도 두선그룹이 손해를 보는 거래라는 이야기가 많았었지요. 아무래도 두선화학의 덩치가 더 크니까요. 그래서 결국 LZ기계에 현금이나 주식을 더하는 형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질 거라고 했는데…….”
남원석이 말을 하며 임재홍을 슬쩍 쳐다봤다.
한진영이 오기 전에 미리 임재홍에게 들었던 이야기로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모습처럼 보였다.
임재홍은 이런 남원석의 모습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 한진영을 향해 설명했다.
“LZ그룹에서 부실을 눈감아준 채 두선화학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면서 자문역에서 빠질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일주일 뒤 이것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는데…… 부부문장님. 방법이 있으면 더는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임재홍은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지 혀로 입술을 핥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큰 피해가 가는 것을 막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이렇게 되면 리서치센터는 물론이고 신성증권에 오명이 씌워질 수 있습니다.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새롭게 들어올 자문사가 이걸 그냥 두고 넘어가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자기네들이 중간에 참여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는 인수합병 시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회사엔 치명적이겠네요.”
한진영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원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치명적입니다. 치명적이에요. 최근 회사가 상승곡선을 보여 그룹에서도 좋은 이미지를 얻었는데…… 이대로 오명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한 부부문장.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임재홍에 이어 남원석도 기대에 찬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마치 한진영이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겠냐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든 듯 고개를 숙였다.
남원석과 임재홍은 한진영이 조용히 고민할 수 있도록 숨도 크게 쉬지 않은 채 한진영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을 하던 한진영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네요.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여 보도록 하지요.”
“아이고 다행입니다. 한 부부문장이 방법을 만들어준다니 나는 이제 안심입니다.”
남원석은 큰 짐을 덜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이 이렇게 말한 것만으로도 벌써 해결이 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임재홍은 남원석과는 달랐다.
“혹 괜찮으시다면 어떤 방법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쉽게 안심하는 남 사장에 움직이겠다는 말만 한 한진영이었다.
임재홍은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했다.
그래서 한진영에게 물은 것이었고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향해서 하려는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간단합니다. LZ그룹의 윗선과 만나서 우리 입장을 잘 설명할 생각입니다.”
“윗선이요? 이번에 나온 전략지원팀의 양준 사장님은…….”
“양준 사장보다 더 윗선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더 윗선이요?”
“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면서 이번 인수합병을 이끄는 건 양준 사장이 맞지요. 하지만 결정까지는 자기가 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더 윗선이라면…….”
임재홍은 한진영의 말을 알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를 만나겠다는 것인지도 알 것만 같았다.
하지면 입 밖으로 단어를 섣불리 내뱉지 못했다.
만나겠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준 사장을 만나는 것도 힘든 임재홍이었다.
그런데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더 윗선을 이야기했다.
임재홍으로서는 단번에 그러냐고 대답하지 못할만한 이야기였다.
임재홍은 남원석을 돌아봤다.
한진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냐는 눈빛이었다.
남원석은 한진영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한진영이 더 윗선을 만나겠다면 그렇게 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임재홍은 뭘 근거라 남원석이 한진영을 이렇게 믿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주일 뒤에 자문역 사임에 관해 논의하신다고요?”
한진영의 말에 임재홍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일주일 뒤 LZ그룹 본사에서…….”
“알겠습니다. 그 전에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말로 해결하겠다고 하면…….”
임재홍은 정확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남원석이 그런 임재홍을 막아섰다.
“한 부부문장이 그러겠다고 하면 그렇게 될 테니 이제 임 센터장도 마음 놓으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그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센터장님. 제가 도와드린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해결해 드리지요. 앞으로 계속 리서치센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동료의 어려움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확실히 도와드릴 테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게…….”
양쪽에서 서로 걱정하지 말라는 통에 임재홍은 더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일 때문에 처리할 게 있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뜬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움직일 준비를 미리 다 해놓은 상태였다.
그걸 알리지 않은 채 임재홍의 몸이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린 한진영이었다.
이제 견디지 못하고 임재홍이 남원석까지 끌어들여 부탁했기 때문에 명분은 충분히 쌓아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진영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된 것이었다.
***
고속도로를 나오자 이제는 가로등마저 잘 보이지 않는 도로를 한진영과 이성우가 차를 몰고 달려갔다.
“여기 맞아?”
“맞아. 여기로 쭉 가면 형님 별장이 있어.”
“아니. 그 형님도 참…… 왜 별장으로 부르는 거야?”
“거기가 이야기하기 편하니까. 자주 그래.”
“자주 그래?”
한진영은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이성우를 슬쩍 돌아봤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성우도 그런 한진영의 눈길이 느껴졌는지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거 성공하면 나도 대리 달아줘야 한다. 나만 사원이야. 속상하게.”
“왜? 너도 직급이 신경 쓰여?”
“그럼 당연하지. 나도 과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리하고 싶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이번 프로젝트만 성공시키면 너 대리 다는 건 문제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옆에서 바람 잘 넣어. 네가 어떻게 바람 넣느냐에 따라서 성공이 달린 거니까.”
“그럼. 그럼. 걱정하지 마. 내가 그 형님 성격 잘 아니까. 나만 믿어.”
이성우는 한진영의 약속에 만족하다는 표정을 지은 뒤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서 좌회전. 그럼 거의 다 온 거야.”
한진영은 이성우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차를 몰았고 그렇게 30분을 더 달리고 나서야 산정호수에 자리한 조용재 상무의 별장에 도착하게 됐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별장이었지만, 돌이 깔린 마당과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별장이 고풍스러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한진영과 이성우는 별장과 호수를 번갈아 바라본 뒤 별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진영과 이성우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혹시 기풍철강의 이성우 씨입니까?”
“네.”
이성우는 익숙하다는 모습으로 가지고 있던 신분증을 내보였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어둠을 밝혀줄 후레쉬로 신분증과 이성우의 얼굴을 몇 차례 확인한 후 자리를 비켜줬다.
“상무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포천까지 오는 것보다 이 과정이 더 귀찮아.”
이성우는 신분증을 주머니에 넣은 뒤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뒤를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별장 문이 열리자마자 이성우는 보이지 않는 조용재를 찾았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이성우는 나무 바닥 소리가 나는 거실을 가로지르며 조용재를 다시 찾았다.
“형님! 어디 계세요?”
“너는…… 여전하구나.”
안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진영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성우의 뒤를 따랐다.
한진영이 거실 중앙쯤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사람이 나와 이성우를 와락 안았다.
이성우도 거친 포옹이 익숙하다는 듯이 남자를 끌어안고 인사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냈지. 너도 오랜만이다.”
격의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인 남자는 30대 후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술을 어느 정도 마셨는지 얼큰한 모습을 보이며 이성우의 양어깨를 잡은 채 얼굴을 살폈다.
“너 얼굴 좋아졌다. 왜 이렇게 얼굴이 좋아진 거야? 좋은 거 있으면 형한테도 말하라고 했잖아. 혹시 요즘 만나는 여자 때문에 그래? 누구 만나냐? 누굴 만나길래 이렇게 얼굴이 좋아진 거야?”
“여자는 무슨…… 제가 형님인 줄 알아요? 저 여자 안 만나요.”
“네가? 천하의 이성우가? 하하하.”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어깨동무를 한 조용재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재는 이성우를 만날 때와 달리 차가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누구냐?”
이성우는 벌써 술판이 벌어지는 곳을 쳐다보다 조용재의 말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제가 전화로 이야기드렸죠? 제 친구하고 같이 간다고요. 그 친구예요. 야. 인사해.”
이성우가 어서 인사하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조용재를 향해 한발 다가간 후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네가 성우 친구라는 한진영이구나.”
조용재는 한진영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여전히 이성우의 양어깨를 붙잡은 채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나를 왜 보고 싶어 할까?”
“저희 회사가 상무님의…….”
“아~ 일 이야기는 귀찮아. 그만 듣고 싶다.”
조용재는 회사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조용재의 술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