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룹 지배력을 회복시켜 주겠다
여자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새롭게 온 사람의 정체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달랐다.
조용재 또래로 보이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들은 한진영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성우는 소파로 다가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아는 척을 한 후 자리에 앉았다.
모두 몇 번의 만남이 있었던 건지 자연스럽게 이성우와 인사를 나눈 남자 하나가 한진영에 대해 물었다.
“누구야?”
“친구요.”
“친구? 네가 친구가 있어?”
“그럼요. 저도 친구가 있죠. 저기 계시는 형님도 친구고 여기 계시는 형님도 친구고…….”
“새끼. 넉살은…….”
한진영은 이성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강선건설 아들?’
끼리끼리 만난다고 남자 중 하나가 아는 얼굴이었다.
한진영은 잘됐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자기 얼굴이 잘 보이도록 몸을 돌려세웠다.
지금이 아닌 나중을 위해서 그에게 자기 얼굴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진영이 거실 가운데 홀로 서 있자 조용재가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일 이야기할 거면 양 사장하고 이야기해. 나한테 이야기하지 마. 아주 지겨워 죽겠으니까. 어으~”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몸을 떤 조용재의 잔에 이성우가 술을 따랐다.
“형님. 왜요? 출장 다녀온 게 잘 안됐어요?”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뭔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아버지는 뭐 하러 나한테 그 자리에 참석하라고 그랬는지…….”
“그게 다 아저씨가 형님을 믿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저 보세요. 아버지가 모르는 곳에 던져놓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잖아요.”
“아 맞아. 너 증권사 들어갔다고 했지? 저 친구하고 같은 곳이야?”
“형님. 저 좀 신경 쓰세요. 그럼 제가 쟤를 왜 데리고 왔겠어요?”
“그런가? 그런 의미에서 마셔.”
조용재는 이성우가 들고 있던 술병을 뺏어 들고 이성우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성우에게도 한잔 마시라고 권한 뒤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술을 들이켰다.
이성우는 조용재와 그의 술친구 사이에 격의 없이 녹아 들어갔다.
이미 그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던 데다 이성우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스스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조용재와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한두 살 형을 대하듯이 친숙하게 대했다.
그리고 여자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이 조용재와 그의 술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술잔이 돌았는데도 한진영은 꼼짝 않고 서서 조용재가 부르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는데도 한진영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조용재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술꾼에 소문으로만 듣던 망나니 재벌 3세 같아 보이겠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시절을 통해 알고 있었다.
동 나이대의 재벌 3세들 중에 그래도 인성 면에서 가장 나은 존재였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가 그룹을 장악해 나가며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업무능력 또한 LZ그룹이라는 대기업을 이끌 정도는 된다는 것이 그룹을 장악한 10년 뒤에 받게 된 성적표였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어서 한진영은 조용재라면 이야기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성우와도 친분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하기도 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흔들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가 분명 자기를 부를 거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거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런 한진영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술자리가 지속되며 증명됐다.
눈길도 주지 않던 조용재가 점차 한진영에게 보내는 눈길이 꺾여 들어간 술잔 횟수만큼이나 많아졌기 때문이다.
조용재는 술잔을 비운 뒤 이성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너는 네 친구 챙기지 않냐? 네가 데리고 온 거잖아.”
“데리고 온 건 저지만 여기 별장의 주인은 형님이시잖아요. 형님께서 부르셔야죠. 손님인 제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나요?”
“너는 참…….”
이미 한진영에게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이성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술을 마시기 전에 이미 한진영을 데리고 조용재 앞에 갔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성우에게 그냥 평소처럼 술을 마실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먼저 부르지 말라고 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결국 조용재가 먼저 한진영을 부르게 됐다.
“와봐. 와서 술 한잔해. 여기까지 먼 길 왔는데 내 술 한잔은 받아야지.”
조용재가 손을 들어 한진영을 향해 손짓했다.
한진영은 조용재의 손짓에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거절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차를 가지고 와서요.”
“괜찮아. 정 뭐하면 우리 직원 시켜서 대신 운전하라고 할 테니까 와.”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진영은 조용재의 두 번째 제안에는 거절하지 않고 조용재 앞으로 걸어왔다.
조용재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한진영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았고 조용재는 한진영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며 술을 따랐다.
글라스에 양주가 가득 담겼다.
한진영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술잔을 들어 안에 담겨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이 들어가 잠시 어지러웠던지 머리를 흔든 한진영은 들고 있던 잔의 입구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그리고 술잔을 조용재에게 내민 뒤 말했다.
“제 술도 한잔 받으시지요.”
“좋아. 내가 술을 사양하지는 않지.”
조용재는 한진영이 내민 술잔을 받아 한진영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한진영도 조용재의 술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조용재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니냐 고민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조용재였기에 그 술을 다 마시다가는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용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 전에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벌컥벌컥.
쾅!
조용재는 한 번에 들이켠 빈 술잔을 탁자에 내리쳤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입가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1분. 더는 안 돼.”
한진영은 조용재의 말에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결과였다.
한진영은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붙잡고 조용재에게 말했다.
“1분도 필요 없습니다. 딱 한 마디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 그게 뭔데?”
“골치 아프게 꼬여버린 지분으로 잃어버린 그룹 지배력을 한 방에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두선화학 인수 건으로 말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진영이 이성우와 별장에서 돌아온 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남원석과 임재홍에게 조용재 상무와 약속을 잡았음을 알렸다.
남원석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한진영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임재홍은 한진영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는지 매일 얼굴을 볼 때마다 묻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오늘도 임재홍은 한진영의 뒤를 따르며 계속 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내일 LZ그룹 본사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네.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인수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입니다.”
몇 번을 물었는데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와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임재홍도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한진영의 뒤를 따르던 임재홍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뭘 준비해야 하나요?”
임재홍은 살짝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함께 들어가는 것을 상상이라도 한 것인지 임재홍의 눈은 기대에 차 있었다.
한진영은 걷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임재홍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대답했다.
“내일은 저와 이성우 사원만 들어오라고 하시니 임 센터장님은 잠시 기다리시지요.”
“부부문장님과 이성우 사원만 들어오라고 했다고요?”
“네. 지난번에 만났던 사람끼리만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니 이번에도 제가 다녀올 동안 회사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될 듯합니다.”
“분명 이번 인수 건의…… 자문역은…… 저희 센터가…….”
임재홍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진영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임재홍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향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임재홍의 한숨 소리로 그도 알아들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한진영은 이성우만을 데리고 LZ그룹으로 향했다.
같은 여의도에 있는 LZ그룹이었기에 한진영은 차를 놓고 천천히 걸어서 LZ그룹의 본사까지 이동했다.
“진영아…….”
이성우가 한진영을 향해 그동안 묻고 싶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방법이란 거 말이야.”
“너는 안 돼.”
“어?”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데 너한테는 안 통하는 거야.”
“그래?”
포천에서 돌아온 뒤 몇 번이나 한진영을 향해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조용재가 통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써먹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한진영은 걷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뒤를 돌아 이성우를 바라봤다.
풀이 죽은 것 같은 모습의 이성우는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는 지분이 없잖아. 이건 지분이 있는 사람이나 쓰는 방법이야.”
“그래…….”
“걱정하지 마. 널 기풍철강의 맨 꼭대기에 앉히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잊은 적 없으니까.”
“아니. 나는 잊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 왔다.”
높은 건물 앞에 선 한진영은 잠시 건물을 올려다봤다.
신성증권 건물보다 2배는 높은 듯한 LZ그룹의 본사 건물이었다.
지난번에 갔던 대한정유의 본사도 크기는 했지만, LZ그룹의 본사 건물에 비하면 어른과 아이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40층이 훌쩍 넘는 건물에 LZ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총괄하는 본사였던 만큼 상주하고 있는 직원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한진영은 LZ그룹의 본사 건물을 올려다본 뒤 이성우의 가슴을 쳤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가자. 시간 됐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마지막까지 품었던 기대를 접었다.
한진영이 안 된다고 했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과 이성우는 본사 건물 로비로 들어가 인포데스크로 직행했다.
처음 왔던 만큼 조용재가 어디 사무실을 쓰는지도 몰랐고 안다고 하더라도 무턱대고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인포데스크를 통해 자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안내를 기다리는 편이 여러 가지로 더 좋았다.
다른 곳과 달리 LZ그룹의 인포데스크에는 네 명의 여직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큰 곳이라도 두 명을 넘기지 않는 것을 봤을 때, 그만큼 LZ그룹에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신성증권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조용재 상무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조용재 상무님과요?”
인포데스크의 여직원 넷이 모두 한진영의 말에 멈칫한 뒤 급히 어딘가로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전한 뒤 한진영을 살피기 바빴다.
한진영은 그런 그녀들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LZ그룹의 로비를 구경했다.
“저기 진영아. 저 언니들이…….”
“눈길 주지 마. 우리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 테니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왜 우리를 저렇게 살피는데?”
이성우는 살짝 눈을 돌려 한진영과 자기를 바삐 살피는 여자들을 쳐다봤다.
그녀들은 이성우고 고개를 돌렸음을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한진영과 이성우를 관찰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다시 그녀들이 왜 이러는지 물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침 며칠 전에 별장에서 만났던 조용재의 경호원이 로비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찾아온 경호원은 가볍게 한진영과 이성우에게 인사하고 두 사람을 조용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LZ그룹에는 임원들만이 따로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곳에 올라탄 경호원은 38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타겠다는 사람도 없는 것이었는지 순식간에 조용재가 있는 38층으로 향했다.
빠르게 올라간 엘리베이터 때문에 귀가 먹먹해졌을 때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시죠. 상무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경호원의 안내에 한진영과 이성우는 수많은 문이 보이는 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우는 여전히 귀가 아픈지 귀를 만지며 줄지어 늘어서 있는 문을 살폈다.
“이 문들이 다 뭐지?”
“문 앞에 쓰여있는 명패 보면 알잖아. 임원들 방이잖아.”
“임원들 방?”
이성우는 놀란 눈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들을 살폈다.
“이게 다 임원들 방이라고? 아니. 임원들 방이 이렇다고?”
LZ그룹이라고 하면 한 해 매출만 10조가 넘는 곳이었다.
국내 상위 10개 그룹사를 꼽자면 어떤 방법으로든 들어가는 곳으로 명실상부한 대기업인 곳이었다.
그런 곳의 본사 임원실이 신성증권의 일개 사업부 부문장실보다 못한 모습에 이성우는 이상하기만 했다.
경호원은 가장 안쪽에 들어가 있는 방에 노크하고 들어가 한진영 등이 왔음을 알렸다.
“상무님.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한진영과 이성우가 온 것을 알린 경호원이 문에서 비켜서자 조용재 상무의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겉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초라한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