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투자금을 받아 부족한 자금을 메운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눈싸움만 벌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한진영이 입을 열지 않자 결국 답답한 이명운이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저는 알 수 없군요. 뭘 약속하고 그랬다는 건지…… 저는 분명 저희 회사와 앞으로 신성증권과의 거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왔는데 말입니다. 홍 센터장님과 거래는…… 아 하나 있기는 합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분석툴 패키지 열 키트를 홍 센터장님이 구매하시기로 하셨죠. 설마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설마 제가 분석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사장님 앞에 앉아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이 사장님이라면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나왔으면 빙빙 돌리는 이야기는 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서로 너무 피곤한 일 아닙니까?”
이명운은 한진영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물고 한진영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한진영은 이명운을 향해 웃으며 물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고 싶으면 실컷 보라는 듯이 고개를 들고 웃기만 했다.
이명운은 도저히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겠던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부부문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계속 함께할 마음이 있으시면 다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그래도 모르겠다고 느껴진다면 이걸로 우리의 만남은 그만하도록 하지요. 분석툴은 분명 귀사의 것을 쓰라고 임 센터장님께 제가 이야기를 해놓을 테니 말입니다.”
한진영은 상대가 모르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애초에 자기 앞에 앉아 있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지금 이명운이 이렇게 조심을 하는 이유는 홍지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궁금하지만 몸을 사리는 이명운을 위해 한진영이 먼저 오픈을 하는 것이 이야기를 편이 나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진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LZ그룹과 두선그룹 간의 빅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는 여기에 왔습니다.”
“그걸 왜 저와 이야기하겠다는 겁니까? 저는 두 곳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제 말을 듣고 판단해 주시겠습니까?”
“네. 뭐 말씀을 하시겠다면…… 하셔도 상관없지만…… 제가 그 일과 무슨 상관…….”
“LZ그룹이 1조 3천억에 두선화학을 인수할 겁니다. 어떠십니까? 이러면 좀 상관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이명운은 물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민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진영의 눈에 이명운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가는 게 보였다.
표정도 이리저리 바뀌는 것이 지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명운을 위해 가만히 생각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이명운이 웃으며 물잔을 잡았다.
“농담이시죠? 1조 3천억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기 위해 제가 이 사장님과 여기 앉아 있는 것은 아닌데…… 농담처럼 들리셨습니까?”
이명운은 마시던 물잔을 급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정말이란 말씀입니까? 1조 3천억…….”
이명운은 자기 목소리가 커진 것을 느끼고 급히 주변을 살폈다.
방음이 잘 돼 이곳을 선택했는데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이명운은 급히 말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낮게 내린 목소리만큼이나 한진영을 향해 몸을 숙이고 말했다.
“정말…… 정말 1조 3천억에 LZ그룹이 두선화학을 인수하겠다고 합니까?”
“우선은 저희 쪽에서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두선화학이 1조 3천억의 가치가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 중이지요.”
“그게…….”
이명운의 머리가 다시 복잡하게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명운은 갑자기 왜 LZ그룹이 1조 3천억에 인수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알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명운이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지금은 기다리기보다 몰아쳐야 할 타이밍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 두선그룹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홍지란에게 무얼 해주겠다고 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과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를 테니 말입니다.”
이명운은 마른침을 삼키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홍지란에게 약속한 것은 강남에 위치한 10억가량의 아파트와 고급 외제차. 그리고 현금 3억이었다.
대략 돈으로 따지자면 15억 정도를 약속한 것이었다.
이명운은 한진영이 그런 것들을 알고 나왔다면 비슷한 금액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했다.
설혹 그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하더라도 두선그룹은 상관이 없을 게 분명했다.
많다고 해 봤자 두선그룹이 얻을 이득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명운은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제가 원하는 것은 두선그룹이 신성증권. 그러니까 제가 있는 투자전략사업부에 투자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금액은 1,000억. 물론 그대로 투자를 진행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할 테니, 투자법인을 하나 설립하셔서 그곳을 통해 투자해주는 센스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있으시겠죠?”
“투자요? 1,000억을요?”
“제가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두선화학이 약 3,000억의 이득을 보게 되는 것 같더군요. 그중 1,000억쯤 돌려서 투자하실 수 있는 일 아닙니까?”
“투자?”
이명운의 눈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한진영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이명운을 보며 앞에 놓인 것들을 정리했다.
이제 얼추 이야기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만큼 일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명운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떠날 것 같은 한진영을 잡았다.
“잠시만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정말 투자입니까?”
“계약서도 쓰고 날인도 할 겁니다. 투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투자자에게 보고도 할 것이며 수익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세부적인 협의도 진행해야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정상적인 투자를 이야기한 겁니다.”
“설마…….”
“투자금을 들고 도망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기업 대 기업으로 투자를 하고 투자를 받을 겁니다. 물론 대상은 바로 우리 사업부로 지정해 주셔야 하지만요. 그리고 수입에 대한 배분도 기존의 다른 곳보다 좀 빡빡하기는 할 겁니다. 구두상으로만 말씀드리자면 수익의 30%를 저희가 가진다는 조건입니다. 보통은 수수료만 챙겼는데, 저희는 그러지 않을 거거든요.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고…….”
한동안 이야기를 하던 한진영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로 마음이 통할 때 그때 나누도록 하지요. 지금은 이런 세부적인 사항들이 중요한 시점이 아니니까요.”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했기 때문에 더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좋은 대답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부부문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떠나려는 한진영을 부른 이명운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진심입니까?”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설마 제가 이 사장님과 농담이나 하자고 어렵게 이 사장님과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그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예상 밖의 이야기라…….”
두선화학의 인수가격부터 시작해서 원하는 가격을 받게 해줬을 때의 보답까지 놀람의 연속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갈 줄 몰랐던 이명운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했다.
그리고 두선그룹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벌써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한진영은 복잡한 표정의 이명운을 뒤로하고 레스토랑을 떠났다.
***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최준호가 다가왔다.
그는 쭈뼛거리는 얼굴로 한진영을 불렀다.
“진영아.”
“네?”
최준호는 한진영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잘되고 있는 거지?”
“그럼요.”
한진영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들을 정리하고 최준호를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성우와 함께 조용재 상무가 있는 곳에 가서 조용재 상무의 관심을 끌었고…….”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용재 상무가 있는 사무실로 가서 상속세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했으니, 조용재 상무도 충분히 제 이야기를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걸로 두선화학 인수 건을 받아들일까? 무려 1조 3천억이잖아.”
“후계 구도에 욕심이 있다면 받아들이겠죠. 두선화학을 비싸게 사는 건 맞지만, 그로 인해 지분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리고 제가 만나본 조용재 상무는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충분히 받아들이고도 남을 겁니다.”
“나는…… 연락이 오지 않길래…….”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우리는 우리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확신에 찬 한진영의 말에 그제야 최준호 부문장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4천억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중이야? 남 사장님이 해주겠다고 했으니 2천억은 우리가 담보물 받아 대출을 하는 거고…… 나머지 2천억은…….”
“투자자를 유치하기로 했으니 그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투자자는 어디서 유치를 할 건데?”
한진영은 최준호의 말에 대답대신 다가오고 있는 이성우를 바라봤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시선에 얼굴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날 왜 그렇게 쳐다봐?”
“부문장님이 투자자 이야기하니까 마침 네 얼굴이 보여서.”
“내 얼굴이 왜?”
“그냥. 그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하는 거라 하고…….”
한진영은 이성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최준호에게 말했다.
“투자받는 이야기는 가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시죠. 성우가 온 걸 보니 모두 기다리고 있는 듯하니 말입니다.”
“그럴까? 그런데 그 전에…… 왜 두선그룹에 직접 연락하지 않고 브로커를 통한 거야?”
이성우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쳐다봤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후 웃었다.
“두선그룹의 투자 이야기는 LZ그룹과 상관없다는 선을 긋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직접 찾아갔다면 이번 딜 상의 부속 합의로 여길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이 보상은 LZ그룹과 상관 없이 우리와 두선그룹 간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요.”
“아~”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의 최준호였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뒤로하고 이성우를 끌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손길에 조금 전 투자자 이야기를 하며 왜 자기를 쳐다보는지 물어보지도 못한 채 회의실로 가게 됐다.
투자전략사업부의 회의실에 사업부의 주축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문장인 최준호부터 시작해서 이성우와 최석영, 김석현 그리고 김준하와 박도하 등 투자전략사업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진영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어떤 사람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결국 부문장인 최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LZ그룹과 두선그룹 간의 빅딜이 성사될 거고…… 두선그룹은 감사의 뜻으로 우리 투자전략사업부에 1,000억의 투자금을 집어넣을 거다?”
“네. 그게 핵심이지요.”
“어~ 다들 어떻게 생각해?”
최준호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최 과장. 뭐 다른 의견 있어?”
“제가 다른 의견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부부문장님의 의견을 따르는 게 제 의견이지요.”
“그럼 김 대리는?”
“저도 다른 의견 없습니다. 다만…….”
김석현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1,000억을 어디다…… 쓰시려고 투자를 받으시는 건지…….”
“아~ 그 이야기를 안 했군요.”
한진영은 김석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김준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준하야. 어디까지 진행됐냐?”
“어…… 우선 상위 100여 개 회사와 국내 선물 시장까지…… 모의 테스트 진행해봤어요.”
“결과는 어때?”
“1% 수익을 올리는 데는 문제가 없어요. 다만…….”
“돈이 빡빡하지?”
“네. 맞아요. 우리가 가진 돈만으로 운용하기에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할 예비금이 조금…… 부족했어요.”
“조금 부족한 게 아닐 텐데…….”
한진영은 김준하의 대답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 진행하는 초단타 퀀트매매의 경우에는 충분한 예비금을 들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할 수 있죠. 특히 우리나라는 저 위에 있는 곳에서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지거나 혹은 기업에서 생각지 못한 악재가 심심치 않게 나오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운용하는 500억만으로는 우리가 목표로 한 숫자를 모두 커버하기 어려워요. 100개까지 늘리는데도 벌써 허덕이는데 200개까지 늘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죠.”
“그럼 퀀트매매에 부족한 자금을 두선그룹에서 받는다는 거야?”
“네. 그거죠.”
이야기를 듣던 김석현이 조심스럽게 한진영에게 물었다.
“혹시 회사에서 추가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을까요? 우리 실적을 보면 오히려 욕심이 날 텐데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두선그룹에서 자금이 들어오면 기존에 있던 돈을 수거하려 할 겁니다.”
“네? 수거한다고요? 왜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2,000억을 담보대출로 조 상무에게 내보내고 나면 회사에서는 우리가 운용하는 돈에 눈독을 들이게 될 겁니다. 당장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는 거니까요. 게다가 두선그룹에서 돈까지 들어오게 된다면 100프로 운용자금이 더는 필요 없지 않냐면서 뺏어 갈 겁니다. 당장의 수익보다 500억이라는 돈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테니까요.”
“하긴 하루에 얻는 수천만 원의 이득보다 당장 500억이라는 돈이 아쉽기는 하겠지. 그런데 그럼 부부문장은 LZ그룹이 1조 3천억에 두선화학을 인수하는 거 맞지? 혹시라도 LZ그룹이 마음을 바꿔 먹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잖아.”
최준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말했다.
“저를 믿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면 됩니다. 준하야.”
“네?”
“계획대로 100개까지 늘리도록 진행해. 그리고 프로그램에 이상이 없는지 계속 모니터링해주시고요.”
한진영의 말에 박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에게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확신에 찬 한진영이었지만 주변에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촘촘히 짜인 계획 속에 여전히 LZ그룹에서 아무런 대답이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