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잊고 있던 그리움
LZ그룹과 두선그룹 간의 딜은 이제 실무진 단계의 협상으로 돌입했다.
큰 줄기의 협상을 마무리한 상태에서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정하기 위해 실무진 간의 논의가 이어진 것이었다.
회사명을 언제까지 유지할지부터 시작해서 기존 직원들의 처우 그리고 기업이 있는 지방정부와의 관계 유지에 필요한 것들까지 세세한 것들이 모두 협상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논의로 큰 틀이 바뀔 일은 없었다.
그저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었다.
여기서부터 한진영은 임재홍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전면에 나서 움직이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이 안정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임재홍은 이런 한진영의 선택에 크게 감동했다.
자기는 물론이고 리서치센터에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리서치센터에서 진행되던 일이 삐걱거려 파투가 날 걱정을 하는 단계까지 갔었던 협상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마지막에는 슬며시 빠져주며 한진영이 리서치센터에 힘을 실어 준 것이었다.
임재홍은 이런 한진영의 모습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다른 곳이라면 기대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의뢰인 측에서 사업부를 지정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어깨에 힘을 주고 리서치센터를 종 부리듯이 부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 것에 임재홍은 한진영에게 은혜를 받은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비록 한진영이 뒤로 물러났지만, 인수협상 과정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한진영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임재홍의 모습에 신기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임재홍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것이 한진영이 자기에게 준 기회를 제대로 쓰는 것으로 생각했다.
“네. 알겠습니다. 임 센터장님의 결정대로 하시죠.”
한진영은 차 안에서 임재홍의 보고를 들으며 운전하는 중이었다.
오늘 있었던 논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임재홍이 한진영에게 전화로 보고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임재홍의 보고에 가볍게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차를 몰아 오랜만에 본가가 있는 서산으로 향했다.
서산은 한진영이 태어나 학창시절을 모두 보냈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이었으며 학창시절의 즐거움과 함께한 곳이었다.
또한 가족인 어머니 아버지가 아직도 그 집에서 사시기에 그에게 고향은 서산 한 곳밖에 없었다.
지난 세월까지 합하면 서울에서 보낸 시간이 더욱 길었기에 한진영은 서울이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역시 고향은 서산이라는 느낌을 받게 됐다.
오랜만에 찾아간다는 설렘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운전을 하는 중에도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엄마.”
한진영은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대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힘없이 한진영의 손에 열렸다.
한진영은 양손에 가득 선물을 사 들고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또한 힘없이 열리는 것이 부모님께서 문을 열어놓으신 채로 외출한 것만 같았다.
“문 열어놓고 사는 건 여전하네.”
한진영은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가 않았다.
한진영은 오랜만에 찾은 본가를 두리번거렸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어제 온 것 같네.”
지난 시절에도 잘해야 일 년에 한번 찾았던 본가였다.
게다가 이곳으로 오기 얼마 전에는 3년 동안이나 본가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바빴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었던 한진영이었다.
지금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착실히 계단을 쌓아 올리느라 본가로 오는 것을 잊었을 만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 이제야 겨우 시간을 내서 본가에 찾아온 것이었다.
지난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양손 가득 선물을 사 들고서 말이다.
“왜 아무도 없어?”
부모님이 반갑게 맞아줄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막상 아무도 없는 집을 보자 서운함이 조금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한진영은 그렇게 집안을 살피다 전화기를 들어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따르릉.
몇 번의 신호가 간 뒤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진영아.
“어디에요?”
-어디긴? 집에 가는 길이지. 어머. 너 벌써 도착했니?
-그럼요. 집 문은 다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다녀오세요?
-네 아빠랑 중왕리에 좀 다녀오는 길이야.
“중왕리에는 왜요?”
-너 온다고 해서 낙지 잡으러 갔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도착하니까.
오랜만에 아들을 만난다고 해서 그런 것인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부터 반가움이 느껴졌다.
한진영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한진영은 전화를 끊은 뒤 거실에 선물을 놓고 능숙한 모습으로 자기 쓰던 방으로 향했다.
“어휴. 고추냄새.”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방바닥에 비닐을 깔고 넣어놓은 고추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한진영은 코를 막고 옷장에서 편하게 입을 츄리닝을 꺼냈다.
그러나 츄리닝에서도 고추냄새가 배어 있는 것이, 하루 이틀 방을 고추 말리는 데 쓴 것 같지가 않았다.
한진영은 한숨을 내쉬고 옷을 입었다.
어차피 하룻밤만 자고 올라갈 예정이라 고추냄새가 나더라도 참으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옷을 들어 마당에 나와 털어내고 있을 때, 문을 열고 한진영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들~”
문이 열릴 때부터 코맹맹이 소리의 한진영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 와락 한진영을 안았다.
“어이구. 우리 아들 이게 얼마 만이냐?”
한진영은 자기를 안아오는 어머니의 팔에 안겼다.
그녀는 한진영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일주일에 꼭 한두 번씩은 통화해서 별로 안 그리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너 보니까 반갑다. 왜 그동안은 통 안 내려왔어?”
한진영을 풀어준 어머니는 한진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진영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머니 젊은 시절의 모습이 한진영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주름이 져 걷는 것도 힘들어하던 어머니가 아니라 아직 환갑이 안된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한진영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진영의 눈가에는 살짝 눈물이 고였다.
“건강하셨어요?”
“그럼. 우리 아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 용돈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니?”
“괜찮아요. 혹시 돈 모자라지 않으세요?”
“우리가 돈이 뭐 필요할 게 있어? 네 아버지 연금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지낸다. 엄마 친구들이 우리 집 아주 부러워해. 다 늙어서 내가 팔자가 폈다고 말이야.”
한진영은 어머니의 말에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때는 이런 느낌이 들 줄 몰랐었던 한진영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몇 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시간이 날 때 찾아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 시절의 어머니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었다.
“들어가자. 왜 여기서들 그래?”
한진영의 아버지 또한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퇴직 후 소일거리 겸 즐겨 했던 대나무 낚싯대와 통발이 들려 있었다.
한진영의 아버지는 한진영을 흘깃 살펴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가자. 엄마가 낙지수제비 해줄게. 너 낙지수제비 좋아했잖아.”
“네. 그거 먹고 싶네요.”
“그래. 아들이 뭐 먹고 싶어하는지는 엄마가 제일 잘 알지. 들어가자. 춥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의 어머니는 한진영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은 입고 내려온 양복을 걸어놓고 아직도 고추냄새가 배어있는 츄리닝을 입고 나왔다.
한진영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기분 좋은 얼굴로 쳐다본 후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거실 소파에 가 아버지 옆에 앉았다.
아버지는 한진영이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진영의 엉덩이가 소파에 붙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돈 많이 보내지 마라. 우리는 내 연금만으로 충분히 먹고산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계속 이야기했다.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모아. 그래야 나중에 나이 먹어서 고생하지 않는다. 그냥 나처럼 공무원을 하지. 네가 얼마나 버는지 모르겠다만…… 젊었을 때야 공무원 월급이 보잘것없지만, 나이 먹으면 공무원만 한 게 없다. 내 친구들은…….”
“아니. 왜 오랜만에 만난 아들 잡고 잔소리예요. 진영아. 이루와. 여기 와서 엄마랑 이야기하자. 하여튼 저 양반은 돈 아끼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나.”
부엌에서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는 거실에 있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고 한진영을 불렀다.
한진영은 이런 모습에도 웃음이 나오기만 했다.
그리워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막상 상황이 펼쳐지자 자기도 모르게 이런 모습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 저 괜찮아요. 엄마에게 그 정도 용돈은 줄 수 있어요. 혹시 아버지는 차 필요하지 않으세요? 차 바꿔 드릴까요? 계속 엄마한테만 용돈 줘서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아버지도 뭐하나 해 드릴까요?”
한진영의 말에 TV만 쳐다보던 한진영의 아버지 얼굴이 천천히 한진영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냉랭하던 한진영 아버지의 눈에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망이 말로 튀어나오기 전에 한진영의 어머니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진영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저 양반 이랬다 저랬다하는 소리에 엄마 밤잠 설친다. TV 바꿔준다고 했을 때 기억 안 나니?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이랬다 저랬다 하는 통에 엄마 정신 사나워 죽는 줄 알았어. 그러더니 봐라. TV 바꾸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일 좋아하지 않니? 차도 제일 좋아할 거면서 이랬다 저랬다 아마 백 번은 더 할 거다. 그냥 놔둬. 아직 차 쓸만해.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여기 좀 와봐. 엄마가 할 말이 있어.”
한진영의 어머니가 단숨에 한진영의 말을 끊어냈다.
그리고 손짓까지 하며 한진영을 불렀다.
한진영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한진영의 등을 향해 한진영의 아버지가 말없이 애달픈 눈으로 바라봤다.
요리를 하고 있는 부엌에 놓여있는 식탁 의자를 빼 앉은 한진영은 몸을 돌려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낙지에 묻어있는 뻘을 빼내며 말했다.
“너 혹시 만나고 있는 아가씨는 있니?”
“아가씨는요 무슨…….”
“그럼 선이라도 볼래? 마을에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
“엄마. 결혼하라는 말씀 하실 거면 저 다시 소파로 돌아갈래요.”
한진영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어머니는 낙지를 든 채 한진영의 몸을 막았다.
“알았다. 알았어. 녀석. 뭐 그렇게 발끈해? 알았으니까. 결혼은 네가 알아서 해.”
한진영은 어머니의 말에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또 하실 말씀 있으세요?”
“혹시 네가 다니는 회사가 신성증권이니?”
“네. 맞아요. 그런데 지난번까지는 회사 이름도 잘 몰라 가물가물하시더니 이번에는 또렷이 말씀하시네요.”
의아한 듯한 한진영의 말에 거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진영의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참. 놔두라니까.”
“아 가만있어봐요. 왜 당신은 자꾸 놔두라고 그래요?”
“당신이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래. 다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야.”
“사회생활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그리고 당신 승진이 다 당신이 혼자 잘나서 그렇게 한 줄 알아요? 내가 알게 모르게 당신 상사 집에 찾아가서 김장해주고 이사할 때마다 청소한 덕도 있다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놈의 사회생활은 왜 이야기해요?”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걸 아쉬워하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발끈했다.
한진영은 두 사람을 말리며 왜 갑자기 사회생활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해했다.
“그만들 하세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이야기해보세요.”
한진영의 어머니는 여전히 낙지를 든 채 씩씩대던 모습을 잠시 진정시키고 한진영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보이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이 봄바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법원 쪽에 사는 우리 계주 아들도 신성증권에 다닌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한진영은 그게 뭐 화낼 일인가 싶어 아버지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창피한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한진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요?”
한진영이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낙지를 놓고 한진영 곁에 앉았다.
“그 사람 아들도 본사에 있다고 하더라. 너도 본사에 있다면서? 그렇지?”
한진영은 혹시 자기에게 아는 사람 아들을 잘 봐달라는 말을 건넬지 모른다는 생각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누군가의 뒤를 봐주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라 어머니가 하는 말에 먼저 듣기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어머니의 질문에 우선 대답부터 했다.
“네. 본사에 있어요.”
“그래. 잘 됐구나.”
한진영의 어머니는 한진영의 손을 잡은 뒤 한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 아들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더구나. 마침 그 사람 아들도 집에 내려온다고 하니까 내일 점심때 잠시 만나 인사나 하자. 응?”
한진영은 생각도 못 한 어머니의 부탁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