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20화 (120/650)

120화 이제 계단을 오를 시간이 됐다

대회의실에서는 신성증권의 임원급들이 모여 리서치센터가 주도하고 있는 LZ그룹과 두선그룹 간의 딜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딜의 진행 상황과 완료 시점 그리고 신성증권이 무엇을 더 세심하게 봐야 할지 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한진영도 참석했다.

엎어질 것 같던 프로젝트를 살려낸 사람인 데다 그 누구보다 지금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그룹에 2,000억을 투자할 투자자를 유치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네. LZ상사가 유상증자를 하기 위해서는 2,000억의 자금이 조용재 상무 측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조건이 만족하였을 때 나머지 일들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끝나 있는 상태입니다.”

남원석 사장은 임재홍 센터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슬며시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부부문장님.”

남원석은 은근한 목소리로 한진영을 불렀다.

“네.”

“생각해둔 게 있으시죠?”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빨리 3자 배정 유상증자기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 돈을 가지고 LZ상사가 두선화학에 대한 인수자금을 대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앞단에 해당하는 투자자 유치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뒷단들이 모두 멈춰진 상태였다.

첫 단추를 최대한 빨리 풀어야만 나머지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계획대로 내년 초 빅딜 완료가 가능한 상태였다.

남원석은 재무적 투자자 유치도 자기가 해 보겠다고 말한 한진영을 은근한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까지 실망을 안겨준 적이 없는 한진영이었기에 이번에도 따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투자자 유치…… 센터장님. 우선 우리 계획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투자자를 유치해야 하죠?”

임 센터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던 TRS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투자목적법인을 세우고 계약을 체결해야 하므로, 적어도 이달 말까지는 투자유치에 관한 협약을 진행할 곳을 선정해야 합니다.”

“이달 말이라…….”

한진영은 잠시 고민한 뒤 여전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남원석을 향해 대답했다.

“슬슬 움직여야겠네요.”

“역시 계획이 있었죠?”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제가 어찌 맡겨달라고 했겠습니까? 다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한시름 놨네요.”

남원석은 시원하다는 듯이 책상을 두드리고 자리에 있던 임원들을 향해 한차례 쓸어봤다.

“사장단 회의를 하러 갈 때마다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실적을 낼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다면서 회장님께서 다른 사장단들 앞에서 저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주셨지요. 그때 자리에 같이 있던 사장단들 표정을 여러분들이 보셨어야 했는데…… 솔직히 우리가 좀 천덕꾸러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환골탈태를 했으니 다들 부러움과 질투를 보내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남원석은 말을 하고 한진영을 슬쩍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한진영 덕분이라는 뜻이 담긴 사랑스러운 눈길이었다.

자리에 있던 다른 임원들도 남원석이 어떤 의미로 한진영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을 시선이었다.

남원석은 잠시 한진영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다시 이야기했다.

“이제 슬슬 한해 마무리가 들어가는 지금 이번 건까지만 잘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따뜻한 연말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들더라도 다들 조금만 더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원석은 마무리 발언을 한 후 한진영을 불렀다.

“그리고 한 부부장님은 잠시 저 좀 보시죠.”

자리에서 일어나서 임원들이 밖으로 모두 나가고 난 커다란 회의실에 한진영과 남원석만이 남았다.

한진영은 남원석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동해 자리를 빼 앉으며 말했다.

“혹시 투자자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건 걱정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 한 부부장님이 생각해 둔 게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거면 됐습니다. 나머지는 한 부부장님이 알아서 해주시면 됩니다.”

남원석의 표정에는 정말로 걱정의 빛이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한진영이 생각해둔 게 있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럼 어떤 이유로…….”

“다름이 아니라.”

남원석은 잠시 비어 있는 회의실을 살폈다.

커다란 회의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눈에 보기에도 둘뿐이었지만 재차 확인하는 모습이 마치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남원석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한진영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회장님께서요? 저를요?”

“네. 사장단 회의에서 칭찬한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아 말씀드리기 어려웠는데 회장님께서는 한 부부장님도 주의 깊게 보고 계신다고 하셨어요.”

남원석은 마치 자기 얘기라도 되는 것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한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한 부부장님은 회사 일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탄탄대로예요. 탄탄대로.”

웃음을 터트리는 남원석과는 달리 한진영은 남원석의 이야기를 듣고도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회장이 어떤 의미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꿍꿍이가 있으니 나를 관심 있게 보는 거겠지.’

한진영은 남원석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저는 언제라도 괜찮으니 시간이 정해지면 알려주세요.”

“그래요. 내가 중간에서 잘 조정해서 알려줄게요.”

회장이 한진영에게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남원석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신성증권에 관심이 있으니 일개 사업부의 부부문장까지 본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한진영과 접점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남원석이 유일했다.

남원석을 통해서만 한진영과 연락이 가능했고 마찬가지로 한진영도 남원석을 통해야지만 회장과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둘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다른 방법이 생기겠지만 어쨌든 아직은 남원석이 유일한 통로였다.

남원석은 이런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 부부문장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 봐요.”

한진영은 뻔히 보이는 남원석의 꿍꿍이에 슬며시 웃었다.

이 정도쯤은 한진영 입장에서 웃으며 넘길만한 일이었다.

‘정작 중요한 건 다른 곳에 있지.’

한진영은 회의실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이달 말까지 재무적 투자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이제 움직일 시간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이성우를 찾았다.

“성우야.”

이성우는 김준하 자리에서 무언가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 이성우의 귀에 한진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나를 애타게 찾아? 임원회의 들어간다고 하더니 무슨 일 있었어?”

“잠깐 나 좀 보자.”

“나? 나는 왜?”

“따라와.”

한진영은 이성우를 끌고 사무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자그마한 회의실로 향했다.

이성우는 갑작스럽게 자기를 보자는 한진영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따로 자기와 이렇게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의실에 들어간 한진영은 문을 닫자마자 블라인드를 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회의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았던 한진영이었기에 이런 모습이 이성우의 눈에 더 이상하게 보였다.

“뭔데 그래?”

먼저 자리에 앉은 이성우는 창에 나 있는 모든 블라인드를 치고 맞은편에 앉는 한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참았다.”

“잘 참았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성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진영을 향해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자세를 고쳐 앉은 이성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기풍철강 꼭대기에 올려주겠다고 해놓고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아서 답답했지? 이제 답답한 것도 끝이다. 움직일 때가 와서 널 부른 거야.”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이성우를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너도 알다시피 한 번에 갈 수는 없어. 차근차근 네 아버지의 신뢰를 쌓는 게 우선이지. 그건 알고 있지?”

이성우는 천천히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우선 그것부터 하자.”

“어떤 거? 아버지한테 내 신뢰를 쌓는 거?”

“그래. 그거.”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신뢰를 어떻게 쌓아야 하는데?”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슬그머니 오른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쌓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게 뭔지 알아? 상대방이 제일 좋아하는 걸 하게 해줬을 때 신뢰가 쌓여.”

“제일 좋아하는 거?”

“그래. 마찬가지로 너도 네 아버지이자 기풍철강의 회장님이 제일 좋아할 만한 일을 해드리면 되는 거야. 네 동생도 그걸 잘해서 너보다 앞서 나가지 않냐?”

“그건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뭘 제일 좋아하는데? 나 아버지 안 만난 지 오래라 요즘 뭘 좋아하는지 몰라. 그렇다고 만난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부자 사이가 좋지도 못해서…… 당최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이성우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와 친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취미나 여가생활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따로 나와 사는 데다 1년에 몇 번 얼굴도 보지 않아 아버지가 뭘 좋아하는지 떠올려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없었다.

한진영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이성우를 보고 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좋아하는 게 잘 바뀌지 않아. 그러니 어린 시절을 떠올려봐. 아버지가 어렸을 때 뭘 좋아했어?”

“어…… 우리 집 개? 한때 낚시도 좀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맞다. 골프? 골프 싫어하는 사람 없잖아. 공치는 거 제일 좋아했어. 그리고 아마 지금도 좋아하실 거다. 골프 이야기하는 거 맞지?”

“아니야.”

한진영은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리고 흔들던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골프는 여가일 뿐이지. 내가 말하는 건 가장 원초적인 거야. 손에 넣었을 때 도파민으로 샤워를 하는 거. 네가 언제 도파민 샤워를 하냐?”

“나? 어…… 돈 땄을 때? 경마나 경륜 혹은 카지노 가서…… 어?”

이야기하던 이성우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한진영을 향해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거야. 그게 바로 너희 아버지인 기풍철강 회장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다. 그건 골프하고 비교할 차원이 아니지.”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아버지는 돈 버는 일을 가장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럼…….”

“네가 돈을 벌만 한 일을 물고 찾아가면 되는 거야. 방법은 내가 알려줄 테니까.”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한쪽에 놓여 있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앞에 놓인 펜을 빼 들었다.

“잘 기억하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말씀드려. 그럼 네 신뢰는 이전과는 다르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걸 첫걸음으로 하자. 네가 올라가는 계단의 첫걸음. 그럼 시작할 게 네가 회장님을 찾아가서…….”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펜을 들어 화이트보드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이성우가 기풍철강을 찾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거기다 스스로의 의지로 직접 찾은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됐었다.

“후우~”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의 문 앞에서 이성우는 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발을 굴러 마음을 다잡고는 본사를 향해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 것인지 이성우는 본사 건물에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건물은 많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바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로비 중앙에 서서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기풍철강 본사를 지키는 보안요원이 이성우를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성우는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자기를 찾아온 보안요원을 향해 본사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이정훈 회장님 뵈러 왔는데요.”

“네? 누굴 뵈러 왔다고요?”

대수롭지 않게 아는 지인을 만나러 왔다면 인포데스크를 통해 연락을 취하라는 말을 하려 했던 보안요원은 이성우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성우는 이런 보안요원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갑작스러우실 텐데 괜찮으시면 회장님께 연락 좀 해주시겠어요?”

“어이. 여기.”

보안요원은 이성우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자기가 있는 곳으로 로비에 대기하고 있던 동료들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무전기를 들고 모이는 보안요원들의 모습에 이성우는 순간 움찔했다.

“저기…… 회장님을…….”

“여기 수상한 사람이 있어. 혹시 모르니까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더 없는지 확인해봐.”

동료에게 이성우가 수상하다고 말한 보안요원은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허리춤에 자리한 무기에 손을 올려놓는 것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에 급히 이성우는 양손을 들어 맨손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정말로 회장님을 만나러 온 사람이에요. 정 수상하시면 비서실로 연락 한번 해보세요.”

이성우의 말에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인포데스크의 직원이 회장 비서실로 연락을 넣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보안요원들은 이성우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사람이 돌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던 듯싶었다.

이성우는 로비에 들어오자마자 벌어진 이 황당무계한 상황에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보안요원이 쉽게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이성우는 로비에 잠시 서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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