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못 보던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런 그의 귀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성우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회장의 비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서 이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맞으시죠?”
“오셨어요?”
“아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는 이성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주변에서 잔뜩 경계하고 있는 보안요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성우를 위아래로 훑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무슨 일 있어야 여기 오나요?”
“그럼요. 항상 그러셨잖아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는…….”
“그만. 그만요.”
이성우는 지난번에 아버지가 있는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의 이유를 떠올리고 급히 비서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아직도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성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회장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아는 사람이 잘 없었다.
보통 회장의 아들이면 기풍철강 본사에서 한자리를 해먹고 있어야 정상인데, 딸만 보일 뿐 아들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금해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 소문 속의 아들이 기풍철강 본사 로비에 서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제 저 올라가도 되나요?”
이성우는 조금 전까지 자기를 막았던 보안요원을 향해 물었다.
보안요원은 급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성우는 보안요원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아버지 계시죠? 요새 출장 자주 다니시지 않는다는 이야기 듣고 왔는데…… 제가 설마 시간을 잘못 맞춘 건 아니죠?”
“사무실에 계시기는 하는데…….”
“잘됐네요. 그럼 가요.”
이성우는 잘됐다는 얼굴을 하고 열린 게이트를 지나 아버지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정훈 회장의 비서와 함께여서 그런지 어디를 가든지 프리패스로 통과가 됐다.
대신 이성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로비에서 느꼈던 것과 같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회장 아들의 등장에 다들 신기한 구경을 하듯이 이성우를 바라봤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회장 비서실을 지나자 몇몇 사람들은 이성우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기풍철강 본사에서 이제 겨우 이성우를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회장님.”
“들어오라고 그래.”
누가 찾아왔다는지 알리지도 않았는데 안에서는 이성우가 온 것을 아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우는 눈을 감고 잠시 크게 심호흡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오랜만에 보는 아들인데도 첫 마디는 떨떠름한 목소리가 나오는 이정훈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이성우를 바라보고 물었다.
“왜 온 거야?”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드릴 말씀? 또 사고 쳤냐?”
이정훈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이성우를 향해 소리쳤다.
“너는 나이가 몇이냐?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러고 살아? 한심스럽다. 한심스러워.”
이정훈은 이성우를 향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저었다.
“보기 싫으니까 나가. 밖에다가 내가 이야기해놓을 테니까 원하는 만큼 달라고 들고 나가도록 해. 똑똑히 알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손가락으로 이성우를 가리킨 이정훈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다시는 회사로 찾아오지 마. 너도 아마 오늘 느꼈을 거다. 직원들도 네 얼굴 보는 걸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너는 여기와 어울리지 않는 놈이니 너 사는 곳에서 네 멋대로 살아. 대신 내가 있는 이곳에는 발도 들이지 마. 알았어?”
이성우는 이정훈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말에 마주 소리치고 사무실을 뛰쳐나갔을지 몰랐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으니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한진영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받고 연습한 채 찾아온 곳이었다.
이런 말이 나올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이성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정훈에게 이야기했다.
“들으시면 아버지가 좋아하실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으니까요.”
“내가 좋아할 만한 얘기?”
이정훈은 수화기를 든 채 이성우를 바라봤다.
평소와는 다른 이성우의 모습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이정훈은 수화기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후 수화기를 다시 제자리에 올려놨다.
그리고 몸을 조금 뒤로 눕힌 후 이성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만 별로라면 그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쫓겨날 줄 알아라. 네가 여기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니까 잘 생각하고 말해.”
“뭘 가지러 온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뭘 가지러 온 게 아니라고? 네가?”
비웃음 가득한 표정의 이정훈이었다.
이성우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음을 꾹꾹 눌러 참은 이성우였다.
“지금까지 네가 여기에 찾아와서 빈손으로 나가는걸 본 적이 없는데 잘도 그런 이야기를 지껄이는구나. 뭐 어쨌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아. 너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시간이 아까우니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해라. 너와 달리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까.”
이성우를 세워놓은 채 몇 마디 말만 들어보겠다는 이정훈을 향해 이성우가 큰 한숨을 내쉰 뒤 이곳에 온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돈을 벌 좋은 기회가 있어 그걸 알려 드리기 위해 왔어요.”
“돈? 네가? 풋.”
이정훈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한심스러운 듯이 이성우를 쳐다봤다.
“또 어디서 사기꾼 같은 자식들의 이야기에 홀딱 넘어가서 찾아왔구먼. 꺼져. 네 상판대기 보기도 싫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세요.”
“끝까지 들을 게 뭐 있어? 뻔한 스토리지. 누가 뭐 좋은 기회가 있으니 너한테 돈 좀 투자하라고 하던? 그런 이야기 지껄이는 놈한테 가서 똑똑히 이야기해. 네가 이곳 기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풍의 아들로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말이야. 너 같은 놈에게 기풍의 재산이 넘어갈 일은 절대 없다고…….”
이정훈은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서들을 불러들여 이성우를 완력으로라도 끌어내라는 지시를 하려 했다.
이성우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한 걸음 다가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누구와 일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세요.”
이정훈은 수화기를 들고 말을 하려던 것을 멈추고 다시 이성우를 바라봤다.
“어디서? 누구와?”
“네. 제가 있는 곳은 신성증권이고 저는 한진영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 잊으신 건 아니시죠?”
“흐음…….”
짧은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은 이정훈은 이성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속 이야기해봐.”
이정훈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조금 전과는 달리 신중한 모습으로 이성우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했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대형프로젝트가 있어요.”
“너희 회사에서 진행하는 거라면…… LZ와 두선 놈들이 진행하는 그거?”
“알고 계시네요.”
“알고 있지. LZ기계야 우리 주요 고객 중 하나니까.”
이성우는 역시 한진영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닫고 조금은 자신을 가졌다.
여기까지 한진영의 예상대로 흘러갔던 만큼 이 뒤로도 한진영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우는 이정훈에게 다시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지난번 일로 재미를 자주 보셨죠?”
“지난번 일이라면…….”
“호주 철광석 일이요. 호주 철광석 회사가 합병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 싸게 철광석을 확보해서 쏠쏠한 수익을 올렸다는 건 업계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이정훈은 그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지 얼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그 덕분에 재미를 크게 보기는 했지. 우리는 싸게 철광석을 확보했고, 자재 가격은 철광석 가격이 올랐다는 이유로 올려 받은 덕분에 2배, 아니 3배의 수익을 더 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 공치사를 하라고 하더냐? 나는 분명 받은 만큼 돌려준 기억이 있는데?”
이성우는 이정훈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공치사하기 위해 제가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저는 그런 일을 다시 할 생각이 있느냐는 것을 물어보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온 거예요.”
“다시 할 생각이 있느냐고?”
이정훈은 이성우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 보여주던 이성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업 이야기를 하는 이성우의 모습에 이정훈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너 혹시 뭐 잘못 먹었느냐?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잘못 먹은 게 아니라 제대로 먹기 시작한 거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 그 보지 못했던 게 도대체 뭐냐?”
이성우는 이정훈이 점차 자기의 말에 관심을 두는 모습을 보이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LZ기계와 두선화학의 스왑딜을 위해 LZ그룹 측에서 4천억을 모으고 있어요.”
“4천억?”
이정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이성우가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이정훈에게 이야기했다.
특별히 비밀이 있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상황을 설명해야 이정훈이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직 외부로 이야기 나오지 않은 것들은 이정훈에게 설명한 것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이정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LZ그룹이 정말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이해가 안 가는구나. 와서 앉아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해보자.”
이정훈은 응접용 소파에 앉은 후 이성우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차를 내올 것을 주문했다.
이성우는 밖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정훈이 들어와 이성우를 끌어내려는 지시가 나올까 봐 문 앞에는 비서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끌어내지도 않았으며 제 발로 이성우가 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를 내오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에 밖에 있던 비서들은 안에 상황이 어떻게 돼가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이정훈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잠시 살핀 뒤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이성우에게 물었다.
“LZ그룹의 조 회장이 확실히 승낙한 게 맞아?”
“맞아요. 바로 우리 사업부가 그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절 믿으세요.”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그 자린고비가 3,000억이나 비싸게 주고 그걸 인수한다고? 그 조 회장이?”
누구보다 조병수를 잘 알고 있는 이정훈이었기에 이성우의 말이 더 믿기지 않는 듯한 이정훈이었다.
그는 몇 차례나 같은 말을 반복한 후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돈을 벌 기회가 왔다는 걸 보면 LZ그룹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네. 조금 전에 말씀드린 4,000억의 조달 계획 중 외부에서 끌어오는 2,000억. 거기에 들어가는 게 어떠냐는 걸 물어보려 한 거예요.”
이성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돌려 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누구보다 이정훈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일에서는 쓸데없는 것으로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 판단한 이성우였다.
이야기를 들은 이정훈은 팔짱을 낀 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 차를 든 비서가 안으로 들어와 이정훈과 이성우 앞에 차를 놓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한 이정훈의 모습을 보고 놀란 눈을 한 채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차를 가지고 온 비서가 회장실을 나갔는데도 한참 동안 이정훈은 생각에 잠겼다.
그만큼 고민이 되는 문제였고, 그만큼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생각을 한참이나 정리한 이정훈은 이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이정훈이 생각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이성우는 이정훈의 시선을 받자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모습에 이정훈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 같았으면 풀 먹은 종이처럼 축 처져 있을 놈이 오늘은 다르구나.”
“많이 변한 것으로 보이나요?”
“그래. 많이 변했어. 그놈하고 같이 다녀서 그런가?”
이정훈의 말에 이성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꼬리에 웃는 기운이 어리는 것이 말보다 더 확실한 대답 같아 보였다.
“보기 좋아.”
“아버지 입에서 보기 좋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나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정훈은 말을 하고 소파에 팔을 걸친 채 이성우를 바라봤다.
처음 이성우를 바라봤을 때 보았던 차가운 눈빛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따뜻한 빛이 감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이정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생각해낸 것은 아닐 테고…….”
이성우는 한진영이 당부한 말을 떠올렸다.
‘진실은 90%. 거짓은 10%.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면 진실 속에 한두 개의 거짓만 담으라고 했지?’
이성우는 한진영이 알려준 것을 몇 번이나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진영이가 알려준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물었어요. 이런 방법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그래서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말고 우선 기다리라고 했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먼저 물어보고 온다고요.”
이야기 속에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성우는 이곳에 온 것이 자기의 의지였다는 것 한 가지만 이정훈을 향해 속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