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돈이 되는 일을 물어왔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정훈은 이성우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직접 이야기했다는 말이냐?”
“네. 다른 곳에 제안을 넣기 전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제가 답을 가지고 온 뒤에 투자자를 모집하라고요.”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이성우의 모습에 이정훈은 만족했다.
사실 이야기를 잘 생각해보면 이상할 수도 있었다.
이성우가 아무리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투자자 모집까지 멈추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성우가 직접 한진영에게 기다리라고 했다는 말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정훈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성우가 먼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어떤 이야기라도 귀에 즐겁게 들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정훈은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돈이 될까?”
“돈이 돼요.”
이성우는 이정훈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한 것에 이미 마음이 많이 기울어졌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관심이 없다면 여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이야기를 바로 덮었을 이정훈이었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이정훈에게 손까지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일종의 담보대출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도 알고 있어. 유상증자에 참여해서 LZ상사의 주식을 손에 쥐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용재 그놈에게 넘기는 거라는 거. 잠시 우리는 담보물로 들고만 있는 거고…….”
“맞아요. 그동안 우리는 꽤 높은 금리로 이자를 받을 수 있고요. 시장금리에 스프레드 금리까지 더해지니 연 8%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요. 이 정도 금리는…….”
“찾아보기가 어렵지.”
이성우는 고민하는 이정훈을 향해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성증권을 인수하려 했던 자금이라든지 지난 철광석 건으로 올린 수익 등이 창고에 꽤 쌓여 있을 텐데…… 그걸 그냥 쌓아놓고 지켜만 보실 생각이세요? 어디 국 끓여 드실 것도 아니고…….”
생각을 하던 이정훈은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들어 이성우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왜? 국 끓여 먹으면 안 되냐?”
“아깝잖아요.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성우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더욱 은밀하게 말했다.
“왜 조용재 상무가 LZ상사의 유증에 참여하겠어요? 그것도 LZ신소재라는 앞으로 LZ그룹에서 쭉쭉 밀어줄 게 뻔히 보이는 대표기업의 지분을 담보로 해서 말이에요.”
이정훈은 낮게 말하고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성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걸 내가 모르고 있을 것 같으냐?”
“아시죠? 아시면…… 위험이 없는 도박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신 거죠?”
“알지. LZ상사를 중심으로 LZ그룹이 재편에 들어가는데 LZ상사의 주식이 우리가 받을 유상증자 가격보다 내려갈 일이 없지.”
“그게 핵심이죠.”
이성우는 이정훈이 자기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에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엉덩이를 다시 소파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이정훈은 이런 이성우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정말로 네가 모를 거로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아시겠죠. 왜 모르시겠어요? 아버지가 누군데요.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잠시 헷갈릴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리저리 재다가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요. 그래서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시라고 이야기드린 거예요.”
“나한테 도움을 주겠다고? 네가? 많이 컸구나.”
“회사에서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성우는 옷에 묻은 먼지들을 손으로 털어냈다.
이정훈은 이런 이성우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성우는 먼지를 털어내던 손을 멈추고 이정훈을 가만히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은 이성우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이번에는 속는 셈 치고 네가 말한 대로 하지.”
“그럼 얼마나…….”
“뭘 얼마나야?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하고 나눠 먹어야겠냐? 지난번에 번 것도 있고 하니까 한 번에 내가 다 집어넣도록 하겠다.”
“2,000억을 다요?”
이성우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잘하면 1,000억 그게 아니라면 최소 500억 이상을 기대하고 이정훈을 찾아온 거였다.
그런데 단숨에 2,000억을 다 넣는다는 이야기에 이성우도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네 말을 들으니 구미가 당기는 일이야. 위험성도 보이지 않고…… 이럴 때는 과감하게 배팅해야지. 위험을 다른 사람하고 나누겠다고 지분을 쪼개면 나중에 어떤 골치 아픈 일에 휩쓸릴지 몰라. 그러니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돌아가서 말해. 그 한가 놈에게 말이야.”
“음…… 무리하시는 건 아니죠?”
“이 녀석이 이 아빌 뭐로 보고…… 하하하.”
기분이 좋은 듯이 웃음을 터트린 이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책상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돌아가서 서류 정리해서 들고 와. 사인해 줄 테니까. 그리고…….”
이정훈은 책상을 손으로 짚은 채 이성우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네가 걸음마를 뗀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을 했다. 선물로 뭘 줄까?”
“네?”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라 이 말이야.”
이성우는 이정훈의 이런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스스로 무언가를 주겠다고 나선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이성우였다.
그런데 지금 이정훈은 늦은 저녁 술 마시고 들어온 아버지가 아들에게 용돈을 주고 싶어 지갑을 여는 것처럼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무언가를 이성우에게 던졌다.
이성우는 반사적으로 이정훈이 던진 것을 받았다.
열쇠 머리에 사자 모양의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열쇠였다.
“성수동 쪽에 이번에 새로 올라간 곳 아파트다. 서울숲 공원에 있어서 뭐 가끔 기분 전환하려고 하나 사둔 건데 네가 써라.”
“제가…… 써요?”
“너 가지라고.”
이정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이성우를 보고 기분이 좋은 듯이 이야기했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김에 주는 거니까 안에 인테리어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해. 내가 다 이야기해둘 테니까. 아. 입주는 내년부터라니까 바로 이사하겠다고 설치지는 마. 그럼 가봐라.”
기분이 좋아 이것저것 이야기한 이정훈은 이만 가보라고 이성우에게 말했다.
이성우는 이정훈의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나가려는 듯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밖에서 잠시 이성우와 이야기를 나눈 김 비서는 성수동 아파트를 줬다는 이성우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하고 회장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성수동…….”
“어. 그거 저 녀석 앞으로 돌려.”
“그거 도련님 혼자 쓰기에는 크지 않을까요? 회장님께서 가끔 지내실 생각에 마련한 거라 도련님께서 혼자 쓰기에는…… 99평이나 되는데…….”
이정훈은 김 비서의 말에 잠시 김 비서를 빤히 바라봤다.
김 비서는 그런 이정훈의 시선에 급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도련님 앞으로 명의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완공되면 인테리어 회사 붙여서 인테리어도 저 녀석 취향에 맞게 해주라고 해. 오랜만에 날 즐겁게 해줬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흐뭇한 표정을 짓는 이정훈의 모습에 김 비서는 조심스럽게 이정훈에게 물었다.
“매우 만족하신 것 같으십니다.”
“어. 흡족해. 아주 흡족해.”
“도련님께서 기분 좋은 소식이라도 가지고 오신 건가요?”
“이리 와 봐라. 내가 저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알려줄게.”
김 비서를 가까이 부른 이정훈은 조금 전 이성우와 있었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서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이야기할 때의 자기 기분까지 곁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이 흐뭇함을 넘어 감동까지 받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김 비서는 그런 이정훈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감탄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요? 도련님이요?”
“그렇다니까. 김 비서도 놀랐지?”
“놀란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던 분이 도련님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직접 돈 되는 일이라며 물어 가지고 오는 게…… 좀 바뀐 것 같아.”
“잘된 일입니다.”
“잘됐지. 그리고 그렇게 물어온 것도 운인지 아니면 진짜로 보는 눈이 있어서 스스로 파악한 뒤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걸 가지고 왔어. 아~ 주 좋은 걸 말이야.”
김 비서는 이정훈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좀 과장하여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정훈의 모습으로 보아 오히려 자기가 이해한 것이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김 비서는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이정훈에게 다시 물었다.
“그게 그렇게나 좋은 건가요? 저는 좋은 조건의 계약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감탄하는 모습이…… 제 생각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김 비서의 말에 이정훈의 오른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돈만 놓고 봐도 좋은 건 맞아. 어디 가서 이렇게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런데 더 중요한 건 LZ그룹의 재편에 우리가 관여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LZ상사의 주식을 통해서 말입니까?”
“그래.”
이정훈은 기분이 좋은지 책상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LZ그룹의 지분구조에 끼어들어 난장을 피울 이유는 없지. 다만 난장을 피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신경을 거슬리게 할 수 있어. 그렇다면 LZ그룹과의 거래에서 매우 좋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게다가 LZ상사의 지분을 잘 가지고 있다가 조용재 상무가 지분을 취득한다고 할 때 고이 내어주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조용재 상무에게 큰 빚을 지우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그렇군요. 그냥 자리 잡고 앉아있는 것만으로 LZ그룹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거 군요.”
“그래. 이런 걸 보고 꽃놀이 패를 쥐었다고 하는 거야.”
이정훈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성우가 나간 쪽을 바라보고 손가락질했다.
“그걸 저 자식이 가지고 왔어. 나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혹시 그 한진영이라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줬겠지. 괜찮아. 좋은 영향을 받는 친구는 곁에 두는 편이 좋아.”
이정훈은 몇 번을 생각해도 기분 좋은 일이었는지 고개를 연신 이리저리 돌리며 즐거워했다.
***
이성우가 기풍철강을 다녀온 이후 신성증권은 바빠졌다.
제일 앞단에 위치한 문제가 풀리며 스왑딜 작업에 속도가 붙었기 때문이다.
유상증자에 참여한 투자자가 선정된 만큼 바로 유상증자 작업에 돌입하게 됐다.
주관사는 당연히 신성증권이 됐다.
지금까지 진행을 맡아 여기까지 끌고 온 만큼 주관사 선정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가 없었다.
LZ그룹과 두선그룹 간의 협상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모든 밑 작업이 끝난 상황에서 다른 의견이 없는 만큼 해가 넘어가기 전에 빨리 계약을 성사시키고 이 계획을 세우고 신년 발표를 하고 싶어 하는 양 그룹의 의견이 통일을 이루었다.
그들은 실무진 간의 몇 차례 회의 이후 빠르게 본계약 체결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본계약은 유상증자를 위한 기풍철강의 투자의견서가 신성증권에 도착한 뒤 열흘 뒤에 LZ그룹의 본사에서 이루어지게 됐다.
LZ그룹 회장의 강력한 요청과 큰 이득을 얻은 두선그룹의 양보로 그들은 사인을 LZ그룹 본사가 위치한 여의도에서 진행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취재진과 관계자들이 몰려온 컨퍼런스홀은 사람들 북적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LZ그룹 본사의 모든 보안요원이 출동한 것이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검은 양복에 귀에 이어폰을 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을 쏟아부었기에 그래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보안요원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질서는 고사하고 난장판이 일어났어도 백 번은 일어날 정도로 컨퍼런스홀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여기 좀 봐주세요.”
“이번 딜로 인해 LZ그룹은 화학으로 두선그룹은 중공업계열로 재편이 되는 겁니까?”
“혹시 두선화학을 인수하는 것과 함께 LZ그룹의 지주사 전환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LZ상사를 지주사로 승격시키고 후계 구도를 확립하려 하시는 것 아닙니까? 대답 좀 해주세요.”
수많은 기자가 플래시 세례를 터트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LZ그룹과 두선그룹은 그런 기자들을 향해 조만간 보도자료를 배포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로 질문을 회피했다.
그러나 기자들의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조 단위 대형 딜이 결정된 만큼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기 때문이다.
“조용재 상무님. 이번 거래로 인해 후계 구도가 확립됐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아. 그건 차차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계약 체결식 자리인 만큼 그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조용재가 LZ그룹 대표 자리에 가 앉으며 기자의 질문을 가볍게 회피했다.
그리고 곁에 앉아 있는 두선그룹의 김종운 기획실 실장을 향해 인사했다.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죠? 지난 LZ그룹 40주년 기념식 때 뵙고 5년 만이네요.”
김종운은 조용재를 위아래로 훑었다.
5년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아직도 배울 것이 많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김중운의 말에 조용재가 가볍게 웃은 뒤 앞에 놓은 계약서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시작하실까요?”
“그러시죠.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플래시 세례가 터지며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LZ기계와 두선화학의 스왑딜을 체결하는 계약서에 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