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회장님께서 선물을 준비했다
계약 체결식이 진행되는 내내 양측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양쪽이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낸 것에 어디에서도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곳이 없었다.
널따란 컨퍼런스홀의 분주함 속에서도 분위기만큼은 다른 체결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가장 큰 힘을 발휘한 한진영과 신성증권의 사장 남원석이 한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수고했어요.”
“사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수고한 게 뭐 있나요? 이게 모두 한 부부문장이 열심히 일한 결과인데요. 저는 그저 조용히 한 부부문장이 일하는 걸 지켜본 게 전부입니다.”
남원석 사장은 인자한 미소로 한진영을 향해 웃었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을 향해 고개 숙였다.
말이 쉬워 지켜본 것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께서 계셨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겁니다. 이게 모두 사장님께서 저를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나는 한 부부문장만 믿고 있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체결식을 마무리 짓고는 기자들 앞에 계약서를 들어 보인 LZ그룹과 두선그룹을 가만히 지켜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이걸로 일단락된 건가요?”
“네. 이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한 겁니다. 남은 건 시간이 흐르는 걸 기다리면 되는 거죠.”
“잘됐군요. 그럼…….”
남원석이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늘 어떻습니까?”
“네? 오늘 무슨…….”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 말입니다.”
“지난번에요?”
한진영은 남원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며 박수 소리가 커다란 컨퍼런스홀 전체를 울렸다.
남원석은 소리에 맞춰 함께 손뼉을 치면서 한진영의 귀에 속삭였다.
“회장님 만나는 것 말입니다.”
함께 손뼉을 치던 한진영이 놀란 눈으로 남원석을 돌아봤다.
남원석은 한진영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손뼉을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게 체결식이 잘 마무리되어 기쁘다기보다는 신성증권 회장에게 한진영을 소개할 수 있다는 걸 기뻐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 만나기로 이야기가 다 되었나 보구나.’
한진영은 남원석이 아무런 계획 없이 날짜를 정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리 사전에 신성증권 회장과 만남 자리에 대한 교감을 나눴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오늘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손바닥이 벌게질 정도로 여러 차례 손뼉을 친 남원석은 컨퍼런스홀 전체를 울렸던 박수소라기 잠잠해질 때쯤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한진영에게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을 떠올린 듯 보였다.
그는 다시 한진영에게 물었다.
“왜?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으십니까? 혹시 중요한 약속이 아니면…….”
“아닙니다. 오늘 괜찮습니다.”
“괜찮으시죠? 잘 됐습니다. 그럼…… 바로 가실까요?”
한진영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남원석이 손을 내밀어 나갈 것을 권했다.
한진영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컨퍼런스홀 가운데 있는 조용재 상무 등을 바라봤다.
계약서를 들고 사진을 찍고는 있지만, 끝이 나려면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한진영은 끝까지 보지 않고 가느냐는 눈으로 남원석을 바라봤다.
남원석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것을 구경하며 마무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하면서 이번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더 좋은 일이요?”
“네. 회장님께서 한진영 부부문장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가보시죠.”
선물을 준다는 사람은 신성그룹 회장이었으며 받는 사람은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남원석이 더 신이 난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의 안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른 쪽에 서서 박수를 치던 최준호 부문장은 컨퍼런스홀을 떠나는 남원석과 한진영을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어디 가십니까?”
“아~ 최 부문장. 마침 잘 왔습니다. 우리는 잠시 나가니 마무리 잘 부탁드립니다.”
“마무리를…… 제가 하라고요? 다들 사장님을 찾을 텐데요?”
중형 증권사도 아니라 냉정하게 분류를 한다면 중소형증권사에 들어갈 신성증권이었다.
그런 신성증권이 어떻게 역사에 남을만한 이런 딜을 성공시켰는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했다.
게다가 유상증자의 주관사로 선정되기까지도 했다.
스왑딜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해낸 것에 언론 관계자들은 신성증권의 입을 통해 이번 스왑딜의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해줄 두 사람이 모두 자리를 떠난다는 사실에 최준호는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최준호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사실 최준호가 긴장하는 것은 남원석이 자리를 뜨는 것보다 한진영이 자리를 떠서였다.
남원석이야 별 기대를 하지 않았고 한진영이 나서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난데없이 컨퍼런스홀을 떠난다는 이야기에 최준호는 계약 체결식이 마무리된 이후 몰려올 기자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했다.
한진영은 최준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라도 하다는 듯이 최석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부문장님. 최 과장이 우리 사업부에 있는 이유를 잊지 마세요.”
최준호는 고개를 돌려 최석영을 바라봤다.
바짝 긴장해 있는 자기와 달리 최석영은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최석영이 주로 어떤 일에 특화되었는지 떠올렸다.
“아~ 그렇지. 우리 얼굴로 쓰려고 최 과장을 데리고 온 거지?”
“이런 압박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 최석영 과장을 내세우면 무리 없이 잘 진행될 겁니다. 그러니 부문장님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할게. 최 과장이 있었어.”
최준호는 언론을 상대할 때 최석영을 내세우면 된다는 생각에 한결 개운해진 표정을 보였다.
남원석과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뒤로하고 컨퍼런스홀을 나왔다.
남원석 사장의 차를 이용하여 신성그룹의 본사로 가는 동안 남원석은 신성그룹의 역사를 한진영에게 설명했다.
“회장님의 조부이신 창업주 이재응 회장님께서는 일본인 밑에서 공부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만류로 정미소에서 일을 시작하셨어요. 그러다 광복 이후 건설업을 영위하는 신성건설을 세우시고는 도로, 항만, 발전소는 물론이고 비료, 정유, 제철 등 국가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해서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셨죠. 그 뜻을 이어받은 지금의 회장님이신 이수암 회장님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사재출연도 마다치 않으실 만큼 애국자입니다.”
한진영은 남원석의 설명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겠지.’
남원석이 신성그룹 회장인 이수암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지만, 한진영의 귀에는 마냥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부정적인 이미지로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이수암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회사를 팔지만 않았어도 일이 꼬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한진영이 자산운용사를 세울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찌 보면 독립하는 이유를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이수암 회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한진영은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가만히 남원석의 이야기를 들었다.
***
한진영과 남원석은 종로에 자리한 본사 사옥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재응 회장이 신성건설을 세웠을 때 자리 잡았던 곳으로 건물을 새로 올려 본사 사옥으로 여전히 사용하는 중이었다.
오기 전에 계약 체결식에 참여했던 LZ그룹의 사옥이나 전에 갔던 두선그룹의 사옥에는 못 미치는 모습이었다.
직원 단위가 만 단위를 훌쩍 넘어가는 두 곳과 달리 신성그룹의 본사 직원 규모는 2,000여 명 정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곳보다 작은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실 테니 어서 갑시다.”
본사에 도착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는지 남원석이 한진영을 서둘러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원석은 밖에서 안내를 담당하는 직원을 향해 아는 척했다.
신성증권에 내려오기 전에 본사에서 업무를 보며 익숙했던 직원이었던 듯싶었다.
남원석은 그에게 회장실에 연락을 넣으라는 말을 하고 한진영을 끌고 회장실이 위치한 곳으로 이동했다.
“한 부부문장님.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그래도 회장님께는 꼭 예의를 차리셔야 합니다. 회장님의 조부이신 이재응 창업주께서…….”
“한학에 정통해서 예의를 깊게 따지신다고요?”
“알고 계셨습니까?”
“신성그룹 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야기죠.”
“그렇죠.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다행입니다. 그래도 이미 알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럼 이제 안심하고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남원석은 마지막 걱정거리까지 날려 버렸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로…….”
미리 연락이 가서 그런 것인지 의전담당 비서가 나와 찾아온 남원석과 한진영을 맞았다.
그리고 그들을 안으로 안내하며 이야기했다.
“오늘 준비된 차는 경산에서 재배한 대추차와 강배전블렌딩의 브라질산 원두커피 그리고 로네펠트 홍차입니다.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손님을 맞는 것이 익숙한 모습의 비서는 회장실로 들어가며 기호에 맞는 차를 먼저 물어봤다.
보통은 대충 차나 커피를 알아서 내오는 다른 곳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남원석은 이런 모습이 익숙한 것인지 먼저 의전 담당 비서를 향해 대답했다.
“나는 홍차로 주시고…… 한 부부문장은 뭘 드시겠습니까?”
“저도 같은 것으로 주시죠.”
무엇을 먹던 똑같은 한진영이었다.
그런 한진영에게 어떤 차가 나오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리는 듯한 모습에 한진영은 코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이런 사람이…….’
지난 시절 신성증권을 매각할 때 물건 집어 던지듯이 신성증권을 헐값에 집어 던졌던 것이 떠오른 한진영은 열린 회장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셨습니까?”
남원석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한진영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이수암 회장이 급히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어서와.”
남원석과 악수를 하며 어깨를 두드린 이수암은 남원석의 손을 잡은 채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쪽이…….”
“네. 이번에 LZ그룹 건을 잘 처리한 한진영 부부문장입니다.”
남원석이 한진영을 대신하여 소개하고는 한진영에게 손짓했다.
한진영은 다시 한번 이수암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한진영…… 부부문장이라고 했던가요?”
“네. 부부문장입니다.”
“그래요. 우리 한진영 부부문장. 반가워요. 반가워. 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유능한 사원이 이렇게 연달아 큰일을 해냈는지 궁금했지요. 그래서 남 사장님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뵙습니다. 반가워요.”
몇 차례나 반갑다고 말한 이수암 회장은 한진영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이야기를 서서 한다는 생각에 민망한 듯이 자리를 안내했다.
“와서 앉아요.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내가 너무 반가워서 서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군요.”
한진영의 손을 잡고 응접용 소파로 간 이수암은 곁에 한진영을 앉게 하고는 한진영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한진영은 그런 이수암 회장의 시선을 말없이 가만히 받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이수암 회장은 남원석 사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주 힘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네. 회장님. 잘 보셨습니다. 한 부부문장이 일을 추진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젊은 친구라서 패기도 있고 추진력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강단 있는 모습도 보이고요.”
“거기에 능력까지 출중하니 앞으로가 기대되는군요.”
이수암 회장은 뿌듯한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마치 친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에 한진영이 오히려 당황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던가?’
한진영은 자기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이수암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시절의 이수암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다른 재벌들과 달리 예의와 범절 그리고 깊은 유교사상으로 인해 학자와 같다는 평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런 평과 달리 신성증권을 매각하는 과정이 좋지가 못해 외부에 보인 모습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던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이수암 회장이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남원석 사장을 통해 들었을 때도 꿍꿍이가 있어 자기를 보고 싶다고 하는 거로만 생각했다.
신성증권을 매각할 때 장사꾼이 마감을 남겨놓고 떨이 물건을 팔듯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신성증권을 넘기려 하던 것이 생생히 기억났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영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이수암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마치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자식을 바라보듯이 이수암의 미소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남 사장님. 제가 오기 전에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이수암은 한진영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신성증권을 이렇게 끌어올린 한 부부문장에게 무엇을 답례로 주면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이수암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진영의 손에 쥐어줬다.
한진영은 손을 천천히 펼치며 이수암이 건넨 것을 내려다봤다.
손 위에는 이성우가 아버지에게 받아왔다며 한참 동안 한진영에게 자랑했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키가 올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