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실패한 자식 농사
한진영은 이성우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강선건설에서 왔던 전화를 떠올렸다.
겨우 설득하여 시간을 잡았다는 천정모의 목소리에서 고단함이 묻어났다.
‘그만큼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천계산은 맨손으로 동네 노가다 사무소를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건설사로 일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회사를 물려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그룹을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성격도 강하고 고집도 세며 자기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들인 천정모가 사람을 의심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버지인 천계산의 의심은 듣던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한진영은 그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천정모가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진영아.”
이성우는 운전하며 한진영을 슬쩍 돌아봤다.
그리고 운전대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한진영에게 물었다.
“차 안이라 아무도 없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을 하고는 곁눈질로 슬쩍 한진영을 살핀 이성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에도 용재 형 때 썼던 방법 이용할 거야?”
“아니. 그땐 특별했으니까. 그 방법을 쓰기 위해 강선건설보고 인수합병을 진행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 수천억 아끼겠다고 수조를 그냥 써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이성우는 한진영을 슬쩍 돌아보고 웃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웃음이 무얼 뜻하는지 깨닫고 마주 웃었다.
“너한테 쓸 방법은 내가 다 생각하고 있다니까. 걱정하지 마. 너는 그런 걸 걱정할 단계가 아니야. 상속은 둘째치고 아직 아버지한테 인정받기도 쉽지 않은 녀석이 별걸 다 신경 쓰고 있어.”
“아니야. 이래 봬도 아버지한테 엄청 인정 받았어. 지난번에 그 LZ그룹 투자 건으로 아버지가 또 연락해서 칭찬까지 했단 말이야.”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좀 안 좋은 방법을 쓸 거야. 그래서 너한테 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안 좋은 방법? 어떻게 안 좋은데? 불법이야?”
“내가 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을 하겠어. 그렇다고 고객을 무덤에 묻을 방법을 서슴지 않고 쓸 만큼 내가 악독한 사람도 아니야. 그냥…… 뭐랄까?”
한진영은 말을 잠시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다그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한진영이 알아서 대답해줄 거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성우의 생각이 맞았는지 생각을 정리하던 한진영이 고개를 돌려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을 시작했다.
“법으로는 규제를 받지 않지만, 나중에는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방법?”
“나중에 문제가 된다는 게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건데?”
“도덕적으로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을만한 일이야. 불공정 문제에 휩싸일 수 있어서…… 그래서 나중에 기업 이미지에 치명타를 받을 수 있어. 만약 잘못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불매운동이라도 벌어진다면 골치 아파질 수 있지. 그래서 강선건설 같이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않은 회사들이나 좀 쓸만한 방법이야.”
“우리도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 건 아닌데…….”
“너는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일을 너한테 내가 하게 할 것 같아? 너는 깨끗이 물려받는 쪽을 선택해. 그래야 나중에 네 발목을 잡을 일이 없어.”
“알았어.”
잠시 시무룩해진 이성우는 앞을 바라보고 운전만 계속했다.
그러다 아직 정확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게 정확하게 뭔데?”
“일감 몰아주기.”
“어? 뭘 몰아준다고?”
이성우는 자기 생각과 너무 동떨어진 대답이 들려오자 놀란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채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얼굴에 손을 대 앞을 바라보게 했다.
“운전하다가 그렇게 고개 훽훽 돌리지 말아라. 옆에 앉은 사람 사고 날 것 같아 불안하니까.”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제대로 들었어. 일을 몰아주는 게 이번에 쓸 방법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강선건설에 가서 이야기하게 될 테니까 그때 듣도록 해. 지금은 운전하는 거에 집중해.”
이성우는 일감 몰아주기로 상속 문제가 어떻게 해결된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뒤면 알 수 있다는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지금은 운전에 집중했다.
약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강선건설의 본사가 자리한 곳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한진영과 지난번에 만났던 강선건설 직원이 내리는 한진영의 눈에 들어왔다.
“어? 저번에도 뵈었던 분이군요.”
“네. 안녕하셨습니까? 전무님께서 아무래도 제가 나가서 뵙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나오게 됐습니다. 열쇠를 주시면 제가 안전한 곳에 주차하고 비서실에 맡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발렛파킹을 하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열쇠를…….”
강선건설 직원이 두 손을 고이 모아 내밀자 한진영은 이성우에게 열쇠를 주라는 눈짓을 했다.
이성우가 열쇠를 건네자 직원은 인사를 꾸벅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뒤를 이어 다른 직원이 한진영에게 다가왔다.
“그럼 위에까지는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앞장서 걷는 직원의 뒤를 따르며 강선건설 본사 건물을 살폈다.
다른 건설사들의 본사 건물보다 강선건설의 본사 건물은 규모가 상당히 작게만 느껴졌다.
40층의 건물을 통으로 다 쓰는 LZ그룹은 물론이고 부현그룹이나 하다못해 강선건설의 눈치를 보는 신성그룹의 본사만도 못한 모습이었다.
“우리 아버지 회사보다도 못한데?”
이성우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기풍철강 본사보다 못한 강산건설의 본사 모습을 살피며 슬그머니 한진영에게 말했다.
최근 기업들은 사옥을 지을 때 최대한 공간에 여유를 준 채로 사옥을 짓는 것을 즐겼다.
20층 건물이면 충분한 곳도 30층, 40층을 지어 위로 높이 올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옥을 올릴 땅을 최대한 확보하여 건평을 넓히는 경쟁을 치열하게 하는 게 최근 풍속이었다.
이런 모습은 미리 공간을 확보하여 나중에 외형이 불어났을 때를 대비한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사옥을 팔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있나 보지.”
한진영은 살짝 웃으며 강선건설이 협소하게 느껴지는 공간을 사옥으로 쓰는 이유를 말했다.
IMF를 비롯하여 여러 위기를 겪으며 기업들은 무엇이 돈이 되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위기를 겪었을 때 타개할 방책이 무엇이 있는지도 기업들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부동산.
특히 사옥과 같이 이미 지어진 건물의 경우에는 위급할 때 물건을 내놓기 좋았다.
구매하는 측에게는 사옥과 같이 이미 임차인이 들어와 있는 물건은 값어치가 굉장히 높은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그래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은 사옥을 매각한 뒤, 그곳에 임대 형식으로 들어가며 급전을 돌리는 방법을 종종 애용했다.
그리고 으리으리한 사옥은 회사 매각 시에도 커다란 이득을 안겨줬다.
자산 계산에서 사옥의 건물값은 항상 뻥튀기시키기 가장 좋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이유를 가지고 사옥을 크게 짓는 것을 경쟁하듯이 하던 다른 곳들과 달리 강선건설은 겨우 10여 층이 약간 넘기는 사옥을 품고 있는 게 전부였다.
이 정도의 건물은 강선건설이라는 토목 분야 도급순위 10위권 내의 기업이 보유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오히려 이런 크기라면 자산평가에서 사옥은 마이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무슨 의미로 이야기하는지 한번에 깨닫고 다시 한번 강선건설의 사옥을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성우의 눈에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아끼려고 그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에게 들은 천계산에 대한 평가를 미루어 봤을 때 아낀다는 평가가 자신감보다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진영과 이성우는 강선건설의 어울리지 않은 사옥으로 들어가 회장실이 자리한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이곳입니다.”
직원의 안내에 문 앞에 선 한진영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임원들에게 3평 남짓의 공간을 내어주고 개인비서도 용납하지 않던 LZ그룹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도 최소한 회장실만큼은 으리으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선건설의 회장실은 신성증권의 투자전략사업부 부문장실보다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부터 느껴졌다.
그만큼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문이었다.
문을 열어주거나 안에 손님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비서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한진영은 스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 앞에 펼쳐진 문안 풍경도 문밖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 사옥을 마주했을 때 그 느낌 그대로 문안에 펼쳐진 회장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샀는지 모를 것 같은 응접용 소파와 다리가 고장 났는지 노란색 테이프가 둘둘 말려진 의자 다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작업복을 입고 앉아 있는 새까맣게 생긴 남자가 천정모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한진영이 꾸벅 인사를 하자 이성우도 뒤를 이어 인사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너는…… 얼굴이 좋아졌구나.”
천계산이 한진영이 아닌 이성우를 향해 먼저 아는 척했다.
이성우는 그런 천계산의 말에 머쓱한 듯이 뒷머리를 만지며 대답했다.
“제가 뭐 언제 얼굴이 안 좋았던 적이 있었나요?”
“이 녀석들하고 어울릴 때는 얼굴이 안 좋았지.”
천계산이 천정모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천정모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도 서슴없이 자기 뒤통수를 때리는 아버지의 손길이 불편했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싫다거나 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폼이, 부자 관계에서 누가 주도권을 확실히 가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앉아. 앉아요.”
천계산은 이성우와 한진영에게 앉을 것을 권하고 한진영을 찬찬히 살폈다.
한진영도 천계산의 시선을 받으며 상대를 살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에게 천계산이라는 존재는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살피는 사이 먼저 천정모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부부문장님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고…….”
“가만.”
천계산이 입을 열려는 천정모를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쓸데없이 먼저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천정모를 흘겨봤다.
천정모는 그런 천계산의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계산은 그렇게 아들의 입을 막고 이성우를 향해 이야기했다.
“아버님께서는 잘 계시나?”
“네. 잘 계십니다.”
“요새는 잘 찾아뵙고?”
“얼마 전에도 뵙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잘됐구나. 나는 네 아버지가 너를 버린 줄 알았는데…….”
상대를 앞에 놓고도 서슴없이 말하는 천계산이었다.
이성우는 그런 천계산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천계산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내 말이 기분이 나쁘게 느껴졌냐?”
“아니요. 사실이니까요. 회장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저도 그렇게 느꼈으니까요.”
“그래. 그건 너와 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이야기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아라. 그만큼 네가 예전에는 별 볼 일 없었다는 이야기니까.”
이성우가 단숨에 인정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네 아버지가 많이 바뀌었어. 네 자랑을 곧잘 하더구나. 으음…… 용재한테 돈을 대주는 거. 그걸 네가 물어왔다며? 돈 되는 일이라고 말이야.”
“네. 뭐…….”
“네가 이제 어디가 돈이 되는 일인지 알게 된 것 같다고 우리끼리 있을 때도 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그동안은 아들 하나 없는 셈 치고 살겠다고 했던 양반이었는데 말이야.”
천계산은 말을 하며 슬쩍 한진영을 돌아봤다.
마치 이성우가 이렇게 변하게 된 계기를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성우는 천계산의 말에 머쓱한 듯이 다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제라도 아버지 마음에 들어 다행이에요.”
“그래. 그래서 나도 잠깐 생각했었다. 자식을 끼고 있는 게 아니라 내보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야. 그런데 또 아비 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식을 맡길 수가 있어야지. 내 품에 있는데도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내 눈 밖에 나가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겠어.”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천정모를 돌아본 천계산은 다시 이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됐든 네 아버지는 성공했어. 뭐…… 아직 완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봤을 때는 나보다 네 아버지가 더 성공한 것 같다. 자식 농사만큼은 말이야.”
이성우는 천계산의 말에 슬쩍 천정모를 살폈다.
천정모에게 이성우는 또래도 아니라 한참 후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성우를 앞에 놓고 자기를 깎아 내리는 아버지의 말에 천정모가 불편하게 느껴질 것 같다고 생각한 이성우였다.
이성우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천정모는 눈까지 내리깔고 아버지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미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빨개진 모습에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성우는 차라리 자기에게 쏠린 관심을 천계산이 이제는 거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이성우를 데리고 왔단 한진영은 자기가 원하는 광경이 펼쳐지자 뿌듯한 마음으로 천계산 부자를 가만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