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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28화 (128/650)

128화 두 번 부르지 않는 분

병든 닭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천정모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천계산은 천정모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천정모는 더욱 고개를 떨궜고 천계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계속 쳐다본다고 하여 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천정모에게서 시선을 거둔 천계산은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가죽끈이 다 낡아 덜렁거리는 시계는 금방이라도 천계산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이제 한 3분 남았군그래.”

“3분이요?”

이성우가 놀란 얼굴로 천계산을 바라봤다.

이제 들어온 지 5분이 겨우 지난 것 같은데 3분이 남았다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쓸데없는 자리에 할애할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나? 이 녀석에게 10분을 내주겠다고 약속했지. 그 시간이 이제 3분…… 아니군. 이제 2분 남았네. 자 이제 시작해보지.”

이성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살폈다.

천계산이 오자마자 자기에게 말을 건 게 그저 반가워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성우였다.

10분이라는 시간조차도 아까워 이성우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었다.

이성우는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한 듯한 모습에 한진영이 화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진영이 만나자고 사정하여 만들어진 자리도 아니건만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부당하게 느껴질 만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처음 천계산을 만나러 들어왔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시작하라는 천계산의 말에 오히려 바로 대답하기보다 앞에 놓인 종이컵을 들어 올리며 시간을 끌었다.

차를 내 주는 것조차 아깝다고 생각한 것인지 믹스커피가 종이컵에 담겨 나왔다.

천정모는 이런 것조차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한진영이 컵을 들어 올리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의 모습에서 한진영을 괜히 불렀다는 후회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천계산은 이제 겨우 2분이 남았다는 데도 자기보다 더 여유가 있어 보이는 한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한진영의 두어 마디 이야기만을 들은 뒤에 내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진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천계산의 생각을 한진영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 천계산을 만나 낡아빠진 스프링이 주저앉은 소파에 앉는 순간부터 이미 천계산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천계산이 먼저 말을 시켰더라도 쉽게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

시간을 끌며 상대를 애태운 뒤에 중요한 이야기만 던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천계산이 오히려 시간을 끌었고,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기 싫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 덕분에 한진영은 편안히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한진영은 자기 입만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런저런 이야기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10분이 아니라 저는 30초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천정모나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내보낼 생각을 하던 천계산 모두 한진영의 말에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한진영은 더욱 강렬한 말을 건넸다.

“상속 문제. 20억에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회장님 10억. 전무님 10억 도합 20억으로 말입니다.”

천계산의 양 눈썹이 서로 닿을 듯이 좁혀졌다.

붉게 물들어 있던 천정모의 얼굴은 부끄러움대신 온통 아리송함으로 가득 찼다.

이성우는 당최 한진영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천계산과 천정모를 살펴볼 뿐이었다.

회장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시간이 다 된 것 같군요.”

천계산이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한진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천계산은 그런 한진영을 잠시 불러 세웠다.

“잠깐만.”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20억이라고?”

“네. 20억이면 충분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내 귀에는 자네 말이 모두 허풍처럼 들려.”

“허풍이 아닙니다. 확실한 방법이라서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시는 분께서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그게 맞을 수도 있겠죠. 좋습니다. 그냥 허풍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게 편하시다면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천계산의 양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믿을 수가 없어. 세상에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네. 맞습니다.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이미 지난 것 같아서요.”

한진영이 말을 하고는 낡을 대로 낡아 덜렁거리는 천계산의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천계산도 한진영의 시선을 따라 자기의 시계를 확인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이미 약속된 시간은 지나있었다.

천정모는 곁에서 시계만 내려다보고 있는 천계산과 일어 서 있는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결국 참지 못하겠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진영을 잡았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보세요. 어떤 방법입니까?”

“글쎄요. 전무님과 회장님이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 회장님이 믿지를 못하면 저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서요.”

한진영의 말에 천계산이 시계를 내려본 채 말했다.

“좋지 못한 방법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많은 상속세를 20억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뻔해. 뭐 어떤 도둑놈에게 20억을 찔러주고 상속세를 회피하자 뭐 이런 류의 이야기겠지.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어. 그런 식의 일이 어디 통할성싶나? 천만에. 이제는 그런 식의 일 처리는 먹히지 않는 시대야.”

천정모는 천계산의 말에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정말 그런 식의 일입니까? 뇌물을 주고 회피하자는…….”

“글쎄요. 저는 그런 류의 일이 통하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방법이 통했나 보죠?”

천계산은 고개를 들어 서 있는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이죽거리지 말아라. 어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방법으로 나를 꾀려고 해? 20억? 택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너 같은 놈들을 잘 알아. 그런 식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말을 하고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먹으려는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내 아들은 속였을지 몰라도 내 눈을 피하지는 못해. 그만 이 방에서 나가.”

천계산은 말을 마치고 손을 휘저었다.

꼴도 보기 싫다는 그의 행동에 한진영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성우는 한진영을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야 하는지 몰라 했다.

천정모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인 천계산 회장이 이 정도로 화를 날줄은 몰랐다.

그래서 정말로 한진영이 자기를 현혹하여 돈을 털어먹으려 했던 사기꾼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성우와 천정모가 한진영과 천계산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한진영은 이미 방문 앞에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회장실 문을 열었다.

“가자.”

“어? 어…….”

한진영에게로 다가가는 이성우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한 발걸음이었다.

이성우가 한진영에게 다가오자 한진영은 문을 활짝 연 채 천계산을 향해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도이츠증권 너무 믿지 마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있는 곳이니까요.”

“잠깐. 그걸…… 어떻게 알았지? 도이츠증권에서 이야기 들은 건가?”

도이츠라는 말이 나오자 천계산이 반응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천계산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도이츠증권이 조만간 큰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을 구상하다가는 괜한 구설수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뭐라고?”

“회장님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 아닙니까? 게다가 도이츠증권과 하려는 것이 하필이면…… 대중에게 민감한 소재인 상속과 관련된 일이고요. 좋지 않으니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무슨 소린가?”

“딱 일주일. 일주일만 참으십시오. 제가 드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천계산이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요구했지만, 한진영은 자기가 할 말만 다 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성우는 방을 나가는 한진영의 모습에 천계산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한진영의 뒤를 급히 따랐다.

“진영아!”

이성우는 회장실을 나오자마자 한진영을 다급히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봐. 진영아.”

“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춰선 한진영이었다.

이성우는 혹시라도 한진영이 도망갈까 걱정이 됐던지 한진영의 옷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도이츠증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전에…… 이대로 그냥 나와도 돼? 저분은 절대 두 번 부를 분이 아니야. 한번 아니다 싶으면 뒤도 쳐다보지 않으셔. 그런데 그런 분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냥 이대로 네 발로 나와도 괜찮은 거야?”

“두 번 부르지 않는 분이라고?”

“그래. 절대…… 두 번…….”

이성우는 말을 하다 말고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부부문장님.”

천정모가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잠시만 아버지께서…… 아니. 회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이야기를 조금만 더 나누자고 말입니다.”

이성우는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기라도 하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네?”

한진영의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천정모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그런 천정모를 그 자리에 두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천정모는 다급히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아버지께서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어 그런 것이니 마음 상하셨다고 하더라도 저를 보고 한 번만 참아주십시오.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말입니다.”

“아니요. 마음이 상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진영은 당황한 천정모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제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한번 꼬아 들으실 게 분명합니다.”

천정모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산이라면 그러고도 남을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저보다는 도이츠증권에 대한 신뢰가 더 높은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마음속에서는 거부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얼굴을 마주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대로 간다면 다시 부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저는…… 20억에 상속세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 말이 매우 궁금합니다. 정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저에게만이라도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럼 제가 듣고 아버님께 잘 이야기해 보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이성우는 차라리 이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천정모는 한진영의 말에 큰 호기심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천정모를 통해 천계산의 흥미를 끌어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진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전무님. 전무님께서는 지금 하실 일은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떻게든 도이츠증권과 진행하려는 일을 나흘만 뒤로 미루도록 하는 것. 그게 지금 전무님께서 치열하게 회장님과 싸워서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천정모는 손을 올려 엘리베이터 문을 가로막으며 몸을 반쯤 엘리베이터 안에 태웠다.

그리고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도대체 우리가 도이츠증권과 일을 진행하려 하는 것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한진영은 의심이 가득한 천정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슬며시 천정모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나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도이츠 증권이 사고 치기 전에 어떻게든 지금 진행하는 일을 보류하는 것. 그게 전무님께서 하실 첫 번째 일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그 뒤에 나누도록 하시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뒤에 서서 한진영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진영이 한 말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진영은 열쇠를 들고 차 문 앞에 서서 멍하니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해. 내가 두 번 붙잡지 않는 천 회장이 이야기를 더 나눠보자고 했는데도 그냥 온 게 아쉬워서 그래?”

“어? 어…… 그것도 있고…….”

“타.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돌아가면서 이야기하자.”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우선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차에 올라탔다.

한진영이 직접 설명해준다는 말에 더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성우였다.

차가 강선건설의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한진영은 이성우를 향해 조금 전 자기의 행동을 설명했다.

“지금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면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천 회장이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되면 앞으로 거래를 하는 내내 끌려다니게 될 수 있어. 그러니 그들이 아쉬워서 나를 찾을 때. 그때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런 거야. 지금은 때가 아니란 거지.”

“아쉬워할 때가…… 그 도이츠증권이 문제를 일으킬 때라는 거지?”

“그렇지.”

“그런데 왜 정모 형한테 나흘만 회장님을 잡아두라고 그런 거야?”

“나흘 뒤에 사고가 터질 테니까.”

“나흘?”

“그래. 정확히는 만기 날 사고를 칠 거야. 그러니 나흘만 기다리라고 이야기한 거야. 그 정도면 기다릴 만도 할 테니까.”

“만기 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이성우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한진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날짜까지 언급하는 것에 더욱 궁금증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 사무실에서 했던 내기를 생각해 봐.”

“내기? 직원들끼리 250오버인지 언더인지 내기를 했던 그거?”

“그래. 네가 그랬지. 당연히 250오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이야.”

“어. 그랬어. 그런데…… 그게 지금 이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됐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만기 날 도이츠증권이 지수를 가지고 장난친다는 말이야?”

당황한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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