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몸이 하나 더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도이츠증권 사태의 여파가 잠잠해지고, 연말 장에는 산타 랠리라 부를 수 있는 상승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기 전에 찍었던 2,000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이대로 뒤로 물러나기는 아쉽다는 듯이 시장이 위를 쳐다보고 몸을 움직인 것이었다.
한진영의 말을 들은 FICC 본부와 WM 본부는 1,900이 깨졌을 때부터 구축해 놓은 상방 포지션 덕분에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너는 오늘도 여기 있는 거냐?”
“그러는 너도 여기 있으면서 왜 나한테 여기 있는 거냐고 물어? 왔으면 그냥 앉지 못하고…….”
장근수의 말에 김정대는 쓴웃음을 짓고는 한진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근수는 김정대가 앉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2,100까지라고 했지?”
장근수는 김정대가 오기 전까지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네. 2,100이요. 그런데 장 본부장님.”
“어? 왜?”
“이건 어제도 물어보신 거잖아요.”
“알지. 알아. 귀찮다는 거. 그런데 내 입장도 이해해줘야 해.”
“어떤 입장이요?”
“확인해보고 싶어 하는 입장. 이런 건 확실하게 하고 가는 게 중요하니까 그렇지?”
장근수가 고개를 돌려 김정대에게 묻자 김정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거봐. 김 본부장도 그렇다잖아. 그러니까. 2,100?”
“하아~ 장 본부장님. 그냥 저희 사업부 앞에 커다랗게 종이로 적어 놓을까요? 내년 연초까지 2,100이라고요.”
“안 돼. 그건 반대야.”
“반대라고요?”
“그래. 많은 사람이 알면 좋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끼리만. 어? 그렇지 정대야.”
김정대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뭐 그건 두 사람끼리 알아서 하고…… 내가 온 건 다른 것 때문이야.”
“다른 것? 뭐?”
김정대는 잠시 곁에 있는 장근수에게 시선을 보낸 뒤 천천히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유가가…… 심상치 않다.”
“유가가 왜? 지금 80불대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잘 잡고 있더니만.”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
김정대는 신경질적으로 장근수에게 소리쳤다.
장근수는 그런 김정대의 말투에 발끈하고는 맞받아쳤다.
“내가 틀린 말 했어? 나도 유가 매번 확인해. 그런데 내 말대로 80불대 초반에서 잘 움직이고 있던데 왜 신경질이야?”
“내가 뭐 언제 얼마나 신경질 부렸다고 그래?”
“어허. 여기 나만 있나? 진영아. 너도 들었지. 신경질 부리는 거 말이야. 내 말이 틀리면 틀렸다고 말해.”
김정대는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장 본부장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이야기하자. 너도 확인하고 있지?”
“본부장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조금 천천히. 천천히 가세요.”
“뭐 알고 있는 게 있구나.”
한진영은 김정대의 말에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장근수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다.
“뭐야? 진짜 유가가 뭐 있는 거야?”
김정대는 답답하다는 듯이 장근수를 돌아봤다.
“뭐 있으니까 내가 왔지. 갑자기 거래량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니까. 새로운 곳에서 들어온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디인지 당최 모르겠어. 상방으로 배팅을 하는 건지, 하방으로 배팅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러다 지난번처럼 내리꽂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되고 말이야.”
한진영은 확실히 김정대는 다르다는 생각하게 됐다.
아직 위도 아래도 아닌 그저 거래량만 늘고 있는 수준이었는데도 그걸 보고 이상을 감지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속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조금 더 연말을 즐기세요. 고민은 나중에 하시고요.”
“아는 거 있으면 좀 이야기해봐. 너희 사업부에서도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는 건 있는데…… 아직은 아니라서요.”
“아는 건 있는데 아직은 아니라는 이야기는 뭔가 있다는 이야기잖아. 그렇지?”
한진영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뭐 좋아. 뭐가 있다는 거 확인했으니 기다릴게. 대신 변화가 생기면 바로 이야기해야 한다.”
“뭐야? 뭐야? 진짜 뭐 있는 거야?”
장근수는 한진영과 김정대를 번갈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편한 표정으로 김정대를 안심시켰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연말과 연초는 즐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변화가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편하게 계셔도 괜찮습니다.”
“알았어. 대신 나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해 줘야 한다는 것 잊지 마.”
“알겠습니다. 제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김정대는 한진영이 알겠다고 말하자 소매를 털고 의자에 편히 앉았다.
김정대의 손짓으로 고민이 모두 날아간 것만 같았다.
장근수는 도대체 유가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야기해 준다는 말에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김정대가 아는 순간이 바로 자기가 아는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정대와 장근수가 고민을 떨쳐내자 회의실에서는 편한 잡담만이 이어졌다.
연말에 뭐 할 거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는 이야기까지 업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근수와 김정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그리고 2,000억 건은 걱정하지 마. 확실하게 밀어줄 테니까.”
“기대하겠습니다.”
장근수가 강선건설에서 투자금 건에 대해 다시 한번 큰소리를 친 후 회의실을 나섰다.
김정대도 장근수와 함께 회의실을 나가며 같은 약속을 했다.
하지만 김정대는 약속 뒤에 꼭 유가에 변동이 생길 시에 이야기해달라는 다짐을 받아냈다.
김정대는 이곳을 찾은 이유를 잊지 않은 것이었다.
김정대와 다시 한번 약속을 나눈 한진영은 떠나는 두 사람을 밖에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김준하를 불렀다.
“들어와.”
한진영은 회의실로 김준하를 끌고 들어와 블라인드를 쳤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등을 창문 쪽으로 하여 몸을 돌리고 김준하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공식이 어디까지 진행됐어?”
김준하는 한진영의 질문에 같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대답했다.
“전략은 완성이 됐고 계속 검증을 하고 있어요.”
“승률은?”
“현재 80%쯤이요.”
“80%? 흐음…….”
한진영은 잠시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물었다.
“만약 변동성이 10%까지 상승한다면? 그래도 80% 승률을 유지할 수 있어?”
“10%요? 기간은요?”
“당일.”
“당일 변동성이요? 하루에 위아래 10%가 움직인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크게 놀랐는지 펄쩍 뛰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의 어깨를 잡아 진정시키고는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 밖에서 들을지도 모르니까.”
조심스러운 한진영의 모습에 김준하는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쳐다봤다.
“농담이 아니네요.”
“농담 아니지. 나 진지해.”
“정말 유가에서 당일 변동이 10%가 나온다는 이야기예요?”
김준하의 말에 한진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일 위아래로 2%만 움직여도 엄청난 움직임을 보였다고 말할만한 유가였다.
그런 곳에서 10%의 변동이 터진다니 김준하가 놀라고만 것이었다.
김준하는 잠시 한진영의 말을 곱씹은 뒤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황급히 한진영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서브프라임 사태 같은 일이 또 터지는 거예요?”
김준하의 기억 속에 유가가 당일 10%의 변동을 보였던 적은 서브프라임 때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김준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유가만 신경 쓰라고 하겠어?”
“유가 뒤에 다른 것도 해야 하니 빨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잖아요.”
“그래. 내가 ‘뒤에’라고 이야기했잖아. 만약 서브프라임 같은 일이 터진다면 ‘함께’라고 이야기했겠지.”
한진영의 말을 들은 김준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잡았던 한진영의 소매를 놓았다.
“다행이네요. 저는 또 서브프라임 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 알고 놀랐어요.”
“그런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아.”
“아직이라면…….”
한진영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린 김준하는 다시 한진영에게 물으려 했지만 한진영은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유가야. 프로그램이 유가에서 승률이 90%가 나올 때까지 끌어 올려야 해. 그리고 당일 변동성이 10% 가까이 나오더라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이걸 전제로 무조건 올해 안에 전략을 짜고 1월 중으로 테스트가 끝나야 해. 알았지? 다른 사람들은 연말이라고 해서 쉴지 몰라도 너하고 나는 쉴 틈이 없어.”
“최선을 다할게요.”
한진영은 김준하가 믿음직스러웠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공식은 거의 완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유가만 있다면 상관이 없는데, 그 뒤에 터질 커다란 것까지 생각한다면 몸이 하나 더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한진영은 다른 사람들에게 편히 연말을 보내라고 했지만, 편히 지낼 수가 없었다.
내년에 터질 이벤트들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연말이라고 해서 편히 보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
신성증권은 연말 분위기 속에서도 좋은 소식을 계속 쏟아냈다.
강선건설과 신성증권이 업무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밖으로 알려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업무협약을 통해 2,000억의 자금이 강선건설에서 신성증권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보통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업무협약이 맺어지고 2,000억이라는 투자금을 유치하자 신성증권 내부에서는 이 2,000억에 대한 사용처를 놓고 커다란 논의가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이렇게 큰 자금을 유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뇌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어휴~ 골치 아프다. 골치 아파.”
마라톤 회의에 지친 최준호가 한진영 자리로 찾아와 땀을 닦았다.
“결론이 났습니까?”
“결론? 올해 안에 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강경해. 아주 강경해.”
“사장님이요?”
“그래. 사장님뿐만이 아니라 고문이라는 분들까지 아주 난리야. 나는 우리 회사에 고문이라는 분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니까.”
한진영의 예상대로 2,000억을 놓고 회사 내부에서 격론이 오가는 중이었다.
서로 쓰겠다고 하는 부서가 나타났으며, 심지어 본사에서도 2,000억을 놓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네가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2,000억 중에 500억이 뭐야. 100억 가지고 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 같아.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어.”
최준호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두 본부장님이 그래도 많이 도와주나 보네요.”
“많이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야. 나 대신해서 싸워주기까지 하신다니까. 그 덕분에 지금까지 버틴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거야. 내가 그중에서는 제일 끗발이 안되니까.”
연말 장이 쉬지 않고 상승하자 김정대와 장근수가 열렬히 나서서 최준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한진영에게 얻을 것이 많은 김정대가 특히 더 앞에 나섰다.
유가 문제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통에 한진영에게서 들을 것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최준호는 두 사람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며 얼굴을 훔쳤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보고 힘을 불어넣었다.
“조금만 힘내세요. 받아오고 나서 쓸 곳이 많은 돈이라 꼭 다 받아와야 하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사업부도 본부급으로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테니까요. 부문장님도 본부장 직함 다셔야죠.”
“내가? 내가 본부장이 된다고?”
“그럼 설마 이대로 부문장으로 끝나려 하셨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정말 내가 본부장이 될 수 있을까?”
최준호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 담겨있었다.
본부장이라면 임원 중에서도 고위 임원에 올라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위에는 사장만이 존재하는 고위 임원.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살짝 붉게 달아오른 최준호의 양 볼을 보고 말했다.
“본부장님 되실 수 있으시죠. 왜 못되겠습니까? 사업부가 계속 실적을 쌓아 올리고 규모와 인원이 점차 늘어나면 당연히 우리 사업부가 본부로 올라서지 않겠습니까? FICC 사업부가 본부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문장님이 본부장님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아니다. 네가 할 수 있다고 말하면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해서든 2,000억 다 가지고 오도록 할 테니까. 나한테 맡겨줘.”
최준호는 가슴까지 두드려 보이며 한진영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조금 전까지 격론이 펼쳐졌던 대회의실에서 주눅 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최준호는 한진영을 향해 다시 한번 힘을 내겠다는 말을 전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싸움터에 나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부문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진영은 최준호가 다시 자신감을 찾은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조수아가 한진영이 나가려는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네. 저는 나갔다가 바로 퇴근할 테니 다른 분들도 그냥 바로 퇴근하면 된다고 전해주세요. 연말이니 가족과 연인들끼리 시간 보내라고 말입니다.”
“부부문장님도 연인과 시간을 보내려고 나가시는 거예요?”
“연인이요? 흐음…… 연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연인보다 더 좋은 사람이요? 어떤 사람이길래 연인보다 더 좋다고 말씀하세요?”
조수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연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한진영이었다.
그런데 연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도대체 그게 누구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저도 떨리네요.”
“그게 도대체 누구인데요?”
“저에게 돈을 벌게 해주실 분이요.”
한진영의 말에 그러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샌 얼굴을 지어 보인 조수아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난 또 어떤 여자가 부부문장 같은 분을 만날까 궁금했는데…… 결국 일하러 가신다는 이야기네요.”
“저는 연애보다 그게 더 가슴 떨리고 좋습니다. 하하하.”
한진영은 시원하게 웃고는 옷을 여미고 손을 들어간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대한정유의 본사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