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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46화 (146/650)

146화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

장근수의 표정은 창백해지다 못해 거뭇하게 변하고 말았다.

한진영의 발언은 최석영의 발언보다 강도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장근수는 말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전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던 장근수였다.

그러나 고 회장에게 제지를 당한 상황에서 최석영에게 했던 것처럼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장근수는 애초에 한진영의 부탁을 들어줘서는 안 됐다고 후회했다.

이런 장근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진영은 차분히 술렁이는 VIP들을 살폈다.

그리고 VIP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없이 기다렸다.

충분히 VIP들이 생각을 마친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 회장은 곁에 앉아 있는 다른 회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 부부문장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한진영은 고 회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팔짱을 꼈다.

고 회장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조금 전 한진영이 한 말을 들은 뒤 가진 의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 주식에 넣은 돈을 다 빼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겁니까?”

고 회장의 말에 장근수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자리에 있는 사람은 겨우 열다섯이었다.

신성증권의 고객 숫자를 생각했을 때 열다섯이라는 숫자는 미미하다 못해 지점 한곳의 하루 방문 고객 숫자보다도 못했다.

그러나 이 열다섯이 가진 자본의 크기는 수천억을 가볍게 넘기는 수준이었다.

가장 적게 투자를 하는 정 회장이라는 사람도 개인 계좌로 100억을 집어넣고 있었으니, 이들의 힘이 곧 신성증권 WM 본부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자금 회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 살 떨리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WM 본부는 물론이고, 신성증권 전체가 휘청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근수의 얼굴이 점차 사색으로 변해갔다.

한진영은 식은땀을 흘리는 장근수를 슬쩍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뺄 타이밍이 아니라 오히려 매수를 준비해야 할 타이밍이기에 오늘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매수를 준비해야 한다고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좋은 이야기는 잔뜩 해놓고 매수를 준비하자니 앞뒤가 안 맞아도 심각하게 안 맞는듯한 느낌을 받은 VIP들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에게서 최석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다음 화면을 띄우게 했다.

화면에는 지난 시절 충격 뒤에 벌어졌던 상황이 나왔다.

한진영은 그런 화면을 보고 차분히 설명했다.

“제가 예상하는 이번 악재는 서브프라임과 같은 류는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시장을 오랫동안 짓눌러 숨도 못 쉬게 만드는 스타일의 악재는 시장이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 다시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지금은 천재지변 류의 악재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상황입니다.”

화면 속에는 고베 대지진 이후의 증시 상황과 개별종목의 움직임 등이 그려져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화면을 VIP들과 같이 바라보며 말했다.

“고베 대지진. 95년 1월 벌어진 이 일로 시장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대지진으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엔화 또한 크게 출렁였다는 것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집과 건물이 쓰러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었으니까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16년 전에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보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그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고베 대지진은 당시에 큰 충격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영이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시장을 설명한다는 것은 의외였다.

한진영에게는 당시가 중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나이였다.

그래서 당시 시장 상황을 몸으로 경험했다기보다는 글로 배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한진영은 마치 당시 시장을 경험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국내 증시도 타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장 개방을 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에 지금처럼 세계 증시 상황과 함께 움직이는 경향이 조금은 덜했던 당시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대지진이 벌어진 날 이후로 며칠 동안은 시장이 허우적대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한진영은 화면을 보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VIP들을 향해 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요? 일본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우리는 반사이익을 받았습니다. 자동차 수출이 호조를 보였으며 전자와 반도체 등이 일본제 앞에서 숨죽이던 것을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지요. 결국…….”

한진영이 손가락으로 지시를 내리자 최석영이 화면을 넘겼다.

화면 속에는 커다랗게 상승한 전자와 자동차 관련 주들이 보였다.

“이걸 보여드리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한진영은 뒤에 펼쳐진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상승이 펼쳐질 시장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전고점을 넘기며 새로운 역사를 쓴 증시. 그에 대한 반락이 나오며 시장을 끌어내리는 악재. 그리고 이어진 생각도 못 한 쇼크. 이것으로 시장이 재편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지금은 돈을 뺄 때가 아니라 투자를 준비할 때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한진영을 말을 마치고 잠시 자리에 앉아 있던 VIP들을 둘러봤다.

VIP들은 황당하게 느껴질 만한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했다.

“그러니까 고베 대지진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요?”

한진영은 질문을 던진 고 회장을 향해 미소 지었다.

생각 같아서는 일본의 동북부지역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으로 우리나라는 큰 반사이익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한진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진영은 지금 이곳에 예언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대지진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아니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 말의 의도는 생각지 못한 천재지변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임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재지변이 우리나라 증시를 보고 나타나는 일이던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창원의 유지인 김 회장이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이런 김 회장의 말에 동조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천재지변을 예측할 수 있다면 기상청에 가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편이 나라를 위해서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기까지 오려고 2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달려왔구먼. 결국 들은 소리는 천재지변을 대비하자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습니다.”

몇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들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처음 최석영 과장이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뭐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예상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납득할 만한 설득력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천재지변? 이건 선을 넘은 것 아닙니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진영을 향해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근수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 상황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만약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손을 놓고 자기도 모르겠다고 나자빠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장근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떠나려는 VIP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최대한 한진영의 말을 변호하려 노력했다.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 시장에 가해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한진영에게 어서 자기 말에 동조하라는 애원이 담긴 눈빛을 보낸 장근수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의 기대를 무참히 깨버렸다.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천재지변이 발생한다는 것에 저는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이봐! 한 부부문장!”

황당해하는 장근수와 고개를 내젓는 VIP들.

한진영의 말에 앉아 있던 VIP들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장근수를 향해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괜히 자네 말에 반박한 것 같아. 자네 말대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우선은 확인하는 편이 바쁜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조금 전 장근수를 나무랐던 고 회장이 사과했다.

그리고 그는 실망감이 담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은 그런 고 회장을 비롯하여 금방이라도 나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혹시라도 다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으시다면 이번에 새롭게 설계되는 펀드에 투자해주시면 됩니다. 최소 계좌당 50억으로 설정된 펀드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소 계좌당 50억?”

VIP들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2계좌만 신청해도 100억이었다.

이런 류의 펀드를 소개하기 전에 천재지변을 운운한다는 것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던 VIP들이었다.

그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 컨벤션 룸을 빠져나갔다.

“회장님.”

장근수는 어떻게든 실망한 VIP들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떠난 그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붙잡는 장근수의 손을 뿌리친 채 자리를 떠났다.

자리에 돌아온 한진영은 의자에 앉아 말없이 VIP들이 떠나간 곳을 바라봤다.

최준호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퀀트 프로그램부터 보여줄 걸 그랬지 않아? 그걸 봤다면…… 꽤 관심을 받았을 텐데 말이야.”

“관심만 보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퀀트 프로그램에 투자하고 싶다고 했을 게 분명할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랬다면 조금 전 천재지변 이야기는…… 어느 정도 무마되지 않았을까 해서…….”

최준호는 무릎을 치며 아쉬워했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를 돌아보고 웃었다.

“일부러 퀀트 프로그램을 보여주지 않은 겁니다.”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고? 왜?”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요.”

“극적인 효과?”

미간을 깊게 찌푸리고 있던 김정대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진영이 하는 말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도저히 아닐 거라는 생각을 깊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VIP분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을 보여주지 않은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느새 다가온 장근수가 한진영을 향해 씩씩대며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를 향해 천천히 설명했다.

“저에 대한 실망이 크면 클수록 닥쳐온 상황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질 테니까요. 저에게 한 가닥 희망도 보지 못하도록 퀀트 프로그램을 시연을 안 한 거예요. 다 제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획했다고? 지금 이걸?”

장근수는 선 채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너한테만 실망한 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그게 아니라 회사에까지 실망하면 어쩌려고 그런 거야?”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래 걸리지 않아 조금 전 나가신 분들이 본부장님께 너도나도 전화를 걸어올 테니까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정대는 자신 있는 한진영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전화를 걸어온다는 게…… 정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거냐? 조금 전 네가 이야기한 상황이?”

“일어날 겁니다. 저는 확신하니까요.”

“뭘 믿고?”

장근수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장근수의 질문에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언제는 제가 믿음에 대한 증거로 무언가를 내놓은 적이 있던가요? 그저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실적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 지나고부터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통에 VIP분들이 떠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럼 다행인데…….”

장근수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겨우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지났는데 온몸을 땀으로 적신 것이 마라톤을 뛴 것만 같은 기분의 장근수였다.

최준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한진영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펀드는 뭔 소리야?”

“한 계좌당 50억짜리 펀드요?”

“어. 그런 펀드가 우리 사업부에 있었어? 아니. 사업부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 그런 펀드가 있어?”

최준호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표정으로 김정대와 장근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나 그들도 알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최준호를 향해 웃었다.

“제가 조금 전 생각해낸 거니 그런 펀드는 지금 없겠지요.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돌아가서 그 펀드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손님맞이를 하려면 간판을 달고 자리를 마련하는 것부터 해야 하니까요.”

“즉석에서 생각해냈다고?”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을 향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설 연휴가 다른 때보다 길었다.

기본적으로 달력에 새겨진 빨간 날이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였으며, 대부분의 회사는 월화까지 더하여 일주일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증시도 설 연휴를 앞두고 한가한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긴 연휴 기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보유하고 있던 계좌들을 비워냈다.

가뜩이나 아프리카부터 시작된 소요사태에 사람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줄어든 거래량 속에서 증시는 결국 2,100이라는 역사적 고점을 터치하게 됐다.

2,000을 몇 번이나 장악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지난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2,100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었다.

증시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정부에서는 새롭게 등극한 지수에 모두 환호를 보냈다.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에 이제 다시는 2,000 아래로 가는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다시 한번 증시가 호황기에 접어들었다는 기대를 품고 설 연휴를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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